View : 74 Download: 0

한국 가톨릭미술에 관한 연구

Title
한국 가톨릭미술에 관한 연구
Authors
방오석
Issue Date
1977
Department/Major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바티칸 제2회 공의회에서 채택한 전례헌장에는 가톨릭교 신앙생활과 교회의 모든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고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은 바로 전례자체이고(전례헌장10조) 변경이 가능한 한도 내에서 시대적 환경과 요구에 따라 쇄신하고 개혁할 수 있다(전례헌장1조)라고 규정짓고 있다. 이 말은 가톨릭교 자체가 가장 기본적인 교리는 하등의 변경 없이 고수하면서도 그의 미술적 표현에 있어서는 환경적응과 더욱 시대를 영도하는 전위적인 지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구체적인 예를 우리는 서양미술의 중심을 흐르고 있는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영역히 볼 수가 있다. 구체적인 예로서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전교하여야 할 이교도들에게 시각적인 방법인 미술표현으로 그리스도교를 전도한다든가 또는 글을 모르는 문맹자들에게 역시 시각적 수단에 의하여 교를 전파하는 방법으로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와같은 가톨릭미술의 본질은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8세기부터 북경루트를 통하여 줄기차게 전래된 가톨릭교의 흐름은 초기의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하여 많은 미술적 수단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가톨릭 미술 전래에 따르는 미술의 유물은 그 후에 줄기차게 일어난 박해로 말미암아 거의 인멸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인멸된 상황을 바탕으로 해서 아직도 살아남은 몇 몇 유물을 거점으로 본 연구에 출발점을 삼는다. 절두산에 있는 순교자기념관의 소장품이나 숭전대 박물관에 있는 유물들이 바로 그것이다. 1887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자 교직자들은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집회장소 즉 성당의 건립이 무엇보다도 급한 일로 되었던 것이다. 약현성당, 명동성당을 비롯한 이른바 한국양관의 선구적인 서양식 건물로 꽃피는 성당건축이 세워진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였다. 이때 상황은 마치 서양에 있어서 서력3세기에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상황과 비슷한 것이 있다. 19세기 말에 우리나라에서 세워진 이들 성당건축은 그 안에 많은 벽화와 조각과 스텐드글라스를 내포하면서 종합예술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가톨릭 미술은 그리스도교가 서양에서 전래하듯이 그의 미술도 서양에서 흘러 들어왔을 뿐이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게 합병을 당한 이후에도 서양 성직자들에 의한 전교활동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가톨릭미술은 19세기와도 마찬가지로 근대 다시 말해서 20세기 초기에서도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만 다른점이 있다면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 독점된 한국의 교회가 일본의 가톨릭교회를 대표로 하는 일본 성직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양상으로 이루워졌다는 점이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 치열해진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의 양상은 가톨릭교의 신앙생활에도 음으로 양으로 압박을 주어서 가톨릭 미술의 발전을 저해시켰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많은 성당 건축이 세워져서 교회의 세력을 확장해 갔다. 1945년 8. 15 해방은 이땅에 일제에서의 해방의 기쁨과 독립에서의 희망을 안겨줬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미군정3년이라는 하나의 과정을 밟게 되는데 이 미군정은 그리스도교 확장에 있어서는 하나의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에 진주한 유엔군들은 대부분 가톨릭이 아니면 프로테스탄의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그들은 자기의 막사 내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주일에는 거리에 교회당을 찾아서 미사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유엔군의 교회당 출입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어서 가톨릭 미술은 갑자기 활발한 양상을 보인다.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서 폐허가 된 잿더미 위에 새로운 성당건축이 세워지는 것을 전국에서 엿볼 수 있었다. 그런 유엔군의 도움을 계기로 해서 한국인들도 자체건립에 힘을 썼다. 이때 가톨릭 미술에 주동이 되는 것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다시 말해서 외국 성직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한국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워진다. 그 한국의 미술가들은 바로 해방 후에 미술대학을 나온 미술가들이다. 그들은 건축을 설계하고 성당 내에 그려진 그림을 그리고 성당내외 그의 주변을 장식하는 조각을 만들고 미사를 비롯한 각종 예식에서 필요로 하는 공예품을 만들었다. 그러한 가톨릭교회의 미술가들은 가톨릭 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매년 한번씩 전시회를 갖음으로서 가톨릭 미술의 이메지를 일반에게 심는데 노력하였다. 이처럼 한국의 가톨릭미술은 서양의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은 외래적인 양식의 시대서부터 국내에 한국인화가들에 의해서 이루워지는 이른바 토착화의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외동포사상과 인류형제의 현상 밑에 존재하는 범세계적인 가톨릭 교회는 그야말로 가장 보편적인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민족의 특성을 살리는 토착화를 허용하고 있는 것은 이미 괴테가 말했듯이 「가장 세계적인 것은 민족적인 것이고 민족적인 것은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과 같이 그 둘을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 논문은 이제까지 아무도 들보지 않았던 한국의 가톨릭미술에 관한 전체적인 흐름을 쫓아서 자료를 정리하고 체계를 세웠기에 지극히 개괄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결국 필자가 바라는 것은 문제를 제기하고 깊이 파고드는 방식이 아니라 문제를 수평적으로 전개시키고 전체의 부감도나 설계도를 만드는 데 뜻이 있었다.;A divine charter adopted at the second Vatican Council reads as follows: ""The summit to which the religious life in the Roman Catholic Church converges and the spring of all ecclesiastic power is the very divine code. Within the scope of possible reform, it can be replaced and reformed, at the demand of the times and environment."" The above statements denote that the basic doctrine of the church must remain unchanged by all means but that in the artistic expression, the church allows to a greater extent adjustment to the environment of the times and therefore the painting exerts a great influence on the society. We can trace such a tradition to Christian painting, which forms a backbone current in the western painting world. For instance, Christianity was propagated to the pagans by means of visual images or paintings beyond of language barriers and for the illiterates, the church also employed a visual means. It is the same in Korea, Catholic church, which was introduced from the continent to the peninsula at the turn of the l8th century, brought many paintings and images here to overcome language difficulty in its initial stage, Such relics of paintings were nearly destroyed at the ensuing persecutions. Only a small piece of the relics survived the great persecution imposed toward the fall of the Yi Dynasty and they constitute important parts for this study. At the hilltop of Mt. Choldu on the southern outskirts of Seoul, there is a memorial hall of the martyred blessed which collects some items testifying to the persecution, Relics are also preserved, in the Soongjon University Museum. Catholic clergymen felt the necessity to build church temples throughout the country to lead the religious life when the Korean court allowed the freedom of the Western religion here in 1887. Under circumstances, Myongdong Cathedral and Yakhyun Church, the first Western style structures in Korea, were set up in Seoul. The controversial situation in Korea at the time is similar to the society of the third-century primitive Christianity. Church buildings constructed at the latter part of the 19th century include many mural paintings sculptural works and stard glasses, forming anintegrated arts itself. However, the Catholic paintings in Koreaat the time were completely Western. Even after the country was annexed by the Japanese imperialists in 1910, the mission of Western clergymen continued here. Therefore, the Catholic painting of the 19th century shows the same tendency and pattern even in the early 29th century. Only difference is that the church in Korea first established ay the Westerners was being replaced by the Japanese clergymen. The triggered by the Japanese imperalists, which was at its height at the late 1930's, oppressed the religious life in Korea and thus hampered the development of Catholic paintings. Despite such suppression by the Japanese government here, an in-creasing number of church buildings were set up throughout the country. Shortly after the nation's liberation from the Japanese colonial rule in 1945, the Americans came to aid Korea. The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gave a vital force to the promotion of the Catholic church here, Most of the soldiers stationed in Korea were Catholics and Protestants. In weekdays, they led religious life in their units but they attended masses at Korean churches In weekends. Such frequent visits of the U. N. troops abruptly spurred the promotion of Catholic painting. With the aid of U. N. troops, many churches began to be built on the ruins during and after the Korean War throughout the country And the Korean people made strenuous efforts to build the temples for themselves, It is noteworthy that the Koreans began to produce their own Catholic paintings with little help of foreigners. The young graduates of fine art colleges initiative. They sculptured ornamental pieces for the church, painted murals, and other handicraft arts for various ceremonial use. The Catholic-linked artists inaugurated the Association of Catholic painters and held exhibitions every year to further public interest In the Catholic painting. Since then on, the Korean Catholic painting began to take its roots in the native soil, far departure from foreign influence. The cosmopolitan Catholic church under the ideal of brethren and friendship is the most generalistic religious organization in the world. Nevertheless, the church allows the ethnic features in the religious life. German novelist Goethe puts, ""The most cosmopolitan in the nationalistic, and vice versa."" As his saying, the two does not confront each other, but coexists. This thesis is designed to set up a frame of reference on the study of Catholic painting which remains unchallenged and unexplored. Although this thesis has only a superficial knowledge of the subject, this writer adopted a method to make a general survey of the study, abandoning the investigative way.
Fulltext
Show the fulltext
Appears in Collections:
교육대학원 > 미술교육전공 > Theses_Master
Files in This Item:
There are no files associated with this item.
Export
RIS (EndNote)
XLS (Excel)
XML


qrcode

Items in D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