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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年代 初 衛正斥邪運動에 대한 연구

Title
1880年代 初 衛正斥邪運動에 대한 연구
Other Titles
(A) Study on the Yuejungchugsa movement, in the early 1880's : As the focus of the Exclusion movement of 『Chosun chaekryak』
Authors
李美淑
Issue Date
1995
Department/Major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Keywords
위정척사운동1880년대조선책략배척운동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This study is based on the exclusion movement of 『Chosun chaekryak』 which the followers of the theory of administration of state and exclusion of evil were active in during the period of the Korean invasion by Japan. The study analyses the revolutionary movement of the party, their characteristics and their shortcomings by considering the role of the exclusion movement of 『Chosun chaekryak』and the historical implications. For the sake of this, I made as the study of object An Kee Young's plot to become a moment of stopping an appeal letter and movement against 『Chosun chaekryak』. The theory of Yuejungchugsa movement is based on the theory of Chu-tzu. It was based on the movement to protect te imperial state and traditional ways during King Chong-jo's reign against the onslaught of Catholicism which stood for all that is foreign and threatening to the old manner of living. However, the introduction of the 『Chosun chaekryak』 led to an exclusion movement of 『Chosun chaekryak』 by confucian scholars such as Yu Won Shik, Hub Won Shik, Lee Man Son, Hwang Jae Hyun, Hong Shee Joong, Hong Jae Hak, etc. was developed into a movement of appeal which encompassed far outspoken and popular thoughts including the nationalistic spirit as opposed to the essentially conservative and closed nature of the original theory of Yuejungchugsa movement. The Chosun chaekryak caused the Min administration to introduce the theory of enlightenment and treatises with the US. The party of exclusionists reacted with the exclusion movement of 『Chosun chaekryak』 which strongly opposed the infiltration of evil foreign elements and further acted as a central factor which upheld the nationalistic spirit. The theory of Yuejungchugsa movement which appeared during historical hardships had no choice but to lean toward the conservative and exclusivist dimension rather than the nationalistic administration of state. However, within the movement one can easily detect the national spirit which upholds the historical and traditional values of Chosun dynasty Korea. The theory of enlightenment without independence and national pride is what the foreign invasion was aiming for and what the exclusion movement of 『Chosun chaekryak』 so strongly opposed.;본 연구는 1880년 외세의 침략이 시작하던 내우외환을 전후하여 전래된 《朝鮮策略》을 표적으로 한 衛正斥邪派의 배척운동 전개과정을 儒林의 上疏運動을 中心으로 살펴 이들의 외세 대응자세를 분석해봄으로써 운동의 성격과 한계를 규정해 《朝鮮策略》의 영향과 《朝鮮策略》排斥運動의 역할을 재평가하고자 연구한 것이다. 朱予學的 華夷論을 기조로 한 衛正斥邪思想은 正祖때 왕조질서체제를 위협하는 天主敎로부터 朱子學과 전통질서를 지키고자 형성되었다. 따라서 이때의 衛正이란 왕조의 전통질서를 수호하는 것이며 斥邪란 이러한 衛正에 도전하는 이질문화인 天主敎를 배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제국주의 열강과 부딪히면서 개화사상과 대립하는 보수적인 斥邪思想으로 자리잡았으며 외부적 침략이 민족적 생존마저 위협하는 朝鮮朝 末期부터는 문화적 전통과 결부되어 自己保存을 위한 긍정적 의식형태로 발전하여 민족의 생존권과 국가적 자주권을 보존하려는 일련의 민족정신으로 형성되어 갔다. 1880년대 初 衛正斥邪運動은 제2차 修信使로 파견되었던 金弘集이 귀국하면서 일본에서 가져온 黃遵憲의 私擬冊子인 《朝鮮策略》이 문제되어 일어났다. 黃遵憲의 《朝鮮策略》은 세계정세와 조선의 외교정책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써, 제정 러시아를 견제하려면 「중국과 친하고(新中國) 일본과 힘을 합하며(結日本) 미국과 손을 잡으라(聯美國)」는 내용인데, 이면에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남하정책을 서두르고 있던 제정 러시아를 견제하면서 조선에서의 자국이익을 안정적으로 추구하려던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의 침략의도가 관철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高宗은 《朝鮮策略》의 내용을 여러 大臣들에게 검토하게 하고, 이를 복사하여 전국의 儒生들에게 배포하였다. 당시 1880년대에는 개항 이래 견문의 화해로 개화의식이 광범하게 형성되어 가고 있었고, 개화세력이 정계에 자리잡아 종래의 華夷秩序를 탈피하고 淸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歐美諸國과 門戶를 開放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朝鮮策略》의 유입은 儒林으로 하여금 衛正斥邪運動을 전개시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斥邪派는 이러한 봉건정부의 정책변화와 《朝鮮策略》의 내용을 접하게 되면서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런데 1880년대 《朝鮮策略》을 표적으로 하는 배척운동은 兵曹正郎 劉元植, 前正言 허원식, 영남유생 李晩孫, 武科出身 黃載顯·洪時中, 강원유생 洪在鶴 등의 集團上疏運動으로 나타났고 《朝鮮策略》排斥運動은 전재과정에서 표적이 《朝鮮策略》에서 점차 민씨정권과 제국주의 열강으로 심화되면서 衛正斥邪運動은 더욱더 강화·발전되어 갔다. 그러나 개화와 보수세력간의 갈등·대립심화로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지 못한 채 유림의 上疏운동은 安驥泳事件을 계기로 조정에 의해 무력으로 강력하게 저지당했고, 이와반대로 민씨정권은 그동안 미루어 오던 개화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나아가 구미와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결국 《朝鮮策略》의 영향으로 민씨정권이 개화정책과 구미와의 조약(聯美論)을 추진하게 되자 斥邪派는 일제히 일어나서 《朝鮮策略》排斥運動을 전개하게 되었고, 이러한 운동은 종래의 天主敎 배척, 서구열강, 일제에 대한 배척 논리를 계승하여 당시 추진되었던 개화정책을 비판하면서 지속적인 上疏運動을 통해 제국주의 침략의 부당성과 민족자존의식의 필요성을 피력함으로써 배타적·보수적인 衛正斥邪思想을 민족적·애국적 성향을 지닌 민족운동으로 강화·발전시키는 촉매제 내지는 가교역할을 함으로써 민족주체성을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1880년대 初의 《朝鮮策略》排斥運動은 유림의 전국적인 대규모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비판도 종래 조정의 善政을 촉구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시정을 요구한데서 그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斥邪의 대상을 명시하기 시작했던 것은 막연한 外勢擊退論에서 벗어나 외세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막으려고 했던데서 보다 구체적인 실천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이 주체적인 개화를 위한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다만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朱子學的 이념 및 정치체제와 사회·경제질서를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근대적인 성격이 강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러한 衛正斥邪運動이 민족주체성 확립의 계기를 마련하여 정립·강화시키는 데 기여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당시 정부로 하여금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 되었고 그만큼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역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외세의 침략이 가중된 역사의 어려운 시점에서 《朝鮮策略》을 표적으로 한 배척운동은 부득이 민족적·민주적인 衛正보다는 배타적·보수적인 斥邪쪽으로 그 모습이 기울 수 밖에 없었지만 유림들이 전개한 上疏운동의 斥邪의지 속에서는 민족의 自主나 역사의 자존을 찾으려는 민족주체성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자주없는 개화·주체없는 근대가 바로 침략자가 받아내려한 한국사의 마지막 귀결이었다고 할때 衛正斥邪運動의 민족주체성 정립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朝鮮策略》排斥運動의 역할은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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