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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9세기 단성형 지형의 향촌 사회 재편

Title
18, 19세기 단성형 지형의 향촌 사회 재편
Authors
노은영
Issue Date
2003
Department/Major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본 연구는 조선후기에 사회 변동이 가장 활발하였다고 보여지는 18·19세기 단성지역의 分洞과 관련된 문제와 관련지어 향촌사회변동의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먼저 조선후기 사회 변화에 따라 단성 사족층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면서 나타난 재지사족들의 분열상황을 살펴보았다. 정인홍을 정점으로 하는 대북정권의 몰락 이후 남명학파를 이단시하는 결과까지 나오게 되자 단성지역의 사림들은 대거 남인화되어 갔고, 일부는 서인화 되어 갔다. 또한 17세기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오던 향안입록이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중단된 후 향안 자손들은 연대하여 단성의 제반문제를 개입하던 향교와 서원에서의 제례·향음주례 등의 행사 및 유교적 교화활동을 통해 향촌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해 나가려고 하였다. 한편 이러한 향촌사회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면서 관주도의 향촌통제정책의 강화는 수령권의 강화와 부세정책의 정비로 나타나게 되었다. 중앙의 향촌 지배정책이 어떻게 관철되어 갔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군역과 환곡의 운역이다. 군역과 관련된 부세정책은 양역변통 논의와 18세기 중엽의 균역법 실시로 귀결되면서 변화하였다. 군역세의 총액이 군현단위로 배정되면서 점차 신역에 응하는 자가 감소되었고, 신분제 변동도 가속화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진휼정책의 하나였던 환곡제의 부세화는 향리들의 포흠이 가장 문제가 되었고, 백성들뿐만 아니라 사족들도 수탈대상이 되어갔다. 조선후기 부세 체계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부세가 토지를 중심으로 집중 일원화되어지면서 총액제(공동납제)를 채택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최말단의 부세단위로써 촌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같은 공동납의 강화는 종래 유지되어왔던 사회체제를 기반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변화된 현실을 충분히 포용하지도 못하였고 향촌사회 내부에 갈등이 심화되어졌고 촌락 질서가 변화되어지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사족지배질서의 해체와 촌락 통제방식의 변화는 이미 내부적인 변화를 겪고 있던 촌락들이 더욱 빠른 속도로 변화하게 하였다. 조선 후기 향촌사회의 분화현상은 이와 같은 내외적인 변화를 통한 이루어졌다. 조선후기에 일반화되어지는 分洞·分村의 문제는 각각 촌락이 지녔던 공동체적 기반과 촌락주도세력의 면모와 관련이 된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후반 단성지역에서는 방위면 체제를 대신하여 面里制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이 시기에는 사족층의 거주여부와 영향력의 범위가 面里制를 규정짓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단성현에서는 면의 편제에는 변화가 없으나 분동이 집중적으로 진행되어지는데, 분동은 주로 사족이 거주하는 거대리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중소규모의 리까지 광범위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사족 거주지역에서는 노비의 입호를 기피하여 호수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전반적인 분동의 현상은 둔화되어지지만, 소규모 리의 분동과 일부호의 독립편제가 계속되어 잔리들의 증가하였다. 그 결과 1786년 사족 거주지 중에서도 노비호의 비율이 높은 곳과 민촌으로 군역호나 학직호의 숫자가 많은 곳이 대리로 편제되어졌다. 따라서 이 시기에도 여전히 사족거주여부가 리의 편제에 영향을 미쳤지만 결국 18세기 단성현의 면리편제는 군총제의 면별 추이에서 볼 수 있듯이 점차 부세운영단위로 편제되어져 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조선후기 분동의 과정은 전반적으로 국가의 지배력이 하부단위까지 침투되어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의도처럼 호수에 기초한 면리편제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分洞의 결과는 동족마을의 형성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단성현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동족마을들이 18세가 말에서 19세기 초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동족마을은 반촌뿐만 아니라 민촌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동족마을의 형태는 조선 후기 유교적 가족·친족제도의 확산과 정치적·경제적 입지가 약화되어진 사족들의 자기 대응책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ore the division of Ri(里) units, and the social changes in Dansung Hyun(丹城縣) area in the 18th·19th Centuries. After the restoration of the dynasty by Injo(仁祖), it was inevitable that the downfall of the Nammyong school had an influence on the dignitaries in Dansong. But they tried to solidify their footing through more positive responses than those in other districts as appeared in the movement of exalting the Nammyong school. Though they confronted each other because of the differences of their parties, they sometimes responded jointly and severally against the social changes. They also responded on the villages and the clans, though the roles of the hyanghwae(鄕會) were weakened. Their descendants kept bonds and were actively engaged in the operations of the hyanhwae. These activities showed the phase of the structure of newly hardened exploitations to people. In spite of their various activities, they failed to hold their own institutional means to dominate the local power and protect their class interests. During the 18th century, by strengthening the policy initiated by the government to control the local area, the local power was transferred from the hands of the sajok the ih-hyang group who allied with local cheifs. Especially the government s taxation efforts newly became a major factor in the configuration of the local communities. During the 18th·19th century, the super-size Ri(里) units which were the living areas of the Sajok(士族) were divided into the smaller-size Ri units. This shows that the Ri units divisions were not natural occurrences triggered by population increase or local developments, but clearly engineered chain of events necessitated by administrational reason. The changes of the divisions of Ri units can be understood as a process of permeation of government s control into the lower level of units. It seems, however, that the Myun, Ri units which were supposed to be based on the number of house was not made in accordance with the government s original plan. Rather, the result of the division of units was the formation of Dongjok villages--units of the same blood. In case of Dansung hyun, this kind of Dongjok villages seems to have settled down mostly between in the late 18th Century and 19th Century. This particular unit of Dongjok village must have been related to the spread of family and kinship system influenced by Confucianism, and to the countermeasure of Sajok class by themselves as well. As this Dongjok villages became common in the society, Munjung circle and Jok circle started to sp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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