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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상감청자(象嵌靑瓷) 연구

Title
조선 전기 상감청자(象嵌靑瓷) 연구
Other Titles
From Pattern to Pictograph : Revisiting Sanggam Celadon of the Early Joseon Dynasty
Authors
안유정
Issue Date
2021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장남원
Abstract
상감청자(象嵌靑瓷)는 태토의 표면에 문양을 조각한 후 그 안에 바탕재와 다른 색상의 흙을 감입하여 강한 색 대비 효과를 연출하는 상감기법과 미량의 철분이 함유된 태토 위에 철분 1-3%가 섞인 장석유(長石釉)를 시유한 후 환원염(還元焰)으로 번조한 청자가 결합한 용어이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역사 편찬(historiography) 과정을 거치며 오랜 기간 상감청자는 국내외 학계와 일반에서 고려시대의 독특한 조형적 성과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도 전국에 산포하는 여러 가마터에서 상감청자가 제작되었고 다양한 소비유적에서 사용된 예가 확인된다. 그러나 조선 전기 도자사 연구에서는 ‘상감분청사기’·‘조선청자’ 등의 명칭을 고안하여 해당 자기를 발전론적 역사 인식에 입각한 조선이란 새 왕조의 미술·공예 양식의 일부로 정의해왔다. 또한 상감청자라는 연구적 관심과 축적된 성과에 비해, 시대 분절을 넘어 ‘상감청자’라는 유형을 종합적으로 통찰한 연구가 부족했다고 여겨진다. 본 연구에서 다룰 ‘조선 전기 상감청자’는 퇴락한 고려 말 상감청자 유형, 조선 초 분장회청사기로 이행하기 이전의 과도기적 자기류로 간주되거나, 중앙·왕실 소용으로 제한적으로 제작된 특수한 성격의 자기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문화사적 관점에서 당시 유통되던 다양한 도자 기명 중 백색 자기와 구분되는 청색 자기에 문양을 장식하여 뚜렷한 색상 대비 효과를 구현한 기명에 대한 기호 및 수요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조선 전기 상감청자는 국가 제도와 관련한 수요·공급이란 유기적 관계 속에서 고려해보면 기존 인식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성격을 지닌 물질문화로 판단된다. 이에 본 연구는 고려 ‘청자’와 조선 ‘분청사기’라는 제작시기를 중요한 분류 기준으로 삼은 기존 연구방법론 대신 제작기법을 중심으로 ‘상감청자’를 분석하고자 한다. 즉 회청색·담청색 유조를 띠는 기면에 선상감 및 면상감기법으로 문양을 장식한 자기류를 상감청자로 통칭하여 분화된 연구 범주를 단일 이론선상에서 재검토하였다. 조선 건국을 전후한 시기부터 임란 이전까지 제작된 상감청자의 성격을 정의하고 당대 문화 구성원들이 공유한 시각적 인지 양식의 일면을 파악한다는 목적 하에 상감청자의 유형, 제작·소비 양상, 양식적 전개 등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논점을 제시 및 정리할 수 있었다. 조선 전기에 상감청자가 제작된 배경은 공납자기라는 경제적 측면과 의례기라는 의례문화사적 측면에서 국가·왕실 재원으로서 상감청자의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 상감청자가 전국에서 제작되고 유통된 배경은 일차적으로 고려 말 상감청자 제작 인력의 확산 및 기술·양식의 전승과 관련 있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 고려 후기의 수취체제를 상당 부분 계승하여 지방관의 책임 하에 중앙 각사로 공물을 분납한[據案直納] 현물 중심의 국가 재정 운영 구조도 이를 뒷받침한다. 조선 초 전국 요지에서는 고려 말 요업 체계를 계승하여 공납(수납처) 관련 명문을 기입하고 선상감과 인화상감기법이 혼용된 규격화된 문양을 장식한 상감청자의 제작을 지속하였다. 이미 조선 건국 당시부터 상감청자는 공납자기로서의 성격이 짙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배경에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제도적 ‘연속성’이 전제된다. 또한 그동안 기존에는 상감청자 주요 생산지였던 강진요의 폐요 경위를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으로 해석해왔으나 공민왕대부터 추진된 체제 개혁 속에서 여말선초 세곡공물 집결지의 변동과 유통망의 다원화의 영향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요업 중심지가 재배치되고 그 과정에서 서해안으로 축소된 조운 경로 밖에 입지한 강진요의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여겨진다. 1417년경 이후 견양에 따라 일정한 양식으로 제작된 분장회청사기가 중앙 관청용 자기로 정착되고, 백자가 왕실 내용자기로 전용되기 시작함에 따라 상감청자는 초기부터 획득했던 공납자기의 역할을 새롭게 출현한 자기류와 분담하면서 국가·왕실 재원 중 ‘의례재원’으로써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감청자의 성격 변화는 생산 기종 및 조형·양식에서도 나타난다. 1417년 이후에도 왕실 및 중앙관청 소용의 상감청자 기명은 제작되지만 일상용 식기보다는 제기·호·뚜껑·대발 등의 특수기명으로 제작되는 빈도가 높아진다. 이때 상감청자 조형은 기종별 조형의 정형성을 유지하면서도 고려 말 상감청자 조형으로부터 탈피한 특징을 보인다. 즉 상감청자는 여전히 국가·왕실 재원으로써 기능하지만 공판용 인화분장회청사기와 다른 맥락의 의례용 특수기명으로 주로 제작·소비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때 국가 및 왕실의 의례재원은 공납용 명문 자기와 같이 각 지방에서 중앙각사에 정례적으로 일괄 조달되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비정기적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의례 관련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 양방향으로의 공급과 관리가 이루어져야 하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태종 연간부터 본격화된 의제 정비 과정에서 일원적 치제 방식 및 의기(儀器) 통일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중앙 소용의 상감청자는 별도로 분정된 지역에서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관리의 감조를 통해 제작 및 조달하되, 지방 소용 의례기의 공급은 중앙에서 공급한 견양에 따라 통일된 양식으로 제작한 후 인근 제장에 공급하는 방식을 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조선 전기 상감청자가 다른 관사명 자기와 제작·유통·소비의 측면에서 차이를 보인는 점에서 주목되는 부분이다. 의례기의 제작 시 도화체제(圖畵體制) 혹은 견양에 따라 정확하게 모방되어야 했던 요소 중에는 기명의 크기·형태뿐만 아니라 정결하고 일정한 문양의 표현도 포함된다. 이에 따라 섬세한 문양 표현과 색상 대비를 통한 뚜렷한 시문 효과가 가능했던 상감기법이 의례기를 제작하는 데 차별화된 효용성을 지니며 선호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 상감청자 요지의 조사 자료를 검토한 결과 서울·경기·경상북도 지역과 전라도·충청도·경상남도 낙동강 유역의 요장 간에 운영 시기, 자기의 장식 기법, 기종 및 문양, 명문에서 밀접한 연관성이 나타나 고려 상감청자 양식의 계승 경로 및 중앙 공납용 자기이자 의례재원으로서 상감청자의 제작·유통 방식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상감청자 요지는 전국적인 분포를 이루는 가운데 서울·경기·경상북도와 전라·충청·경상남도로 양분되는 지역군 내에서 규칙성이 확인된다. 전자에 해당하는 요지는 대체로 선상감과 인화상감([A]식)기법이 혼용된 상감청자를 제작하다가 분장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백자를 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북한산 일대와 칠곡·상주 등의 경상북도 요지는 15세기 1/4분기 이전에 조 업활동이 활발했는데 요지에서 수습된 흑백선상감 용문 매병편 등 일부 기형과 문양은 강진 사당리 출토 상감청자와 유사성을 보인다. 한편 전라도·충청도 중심의 요지에서는 인화[B]·귀얄분장기법이 보편적인 가운데 철화, 박지 등 지역·가마별로 특화된 기법이 나타나고, 상감청자는 대체로 제기, 장군 등의 특수기명을 중심으로 소량 수습된다. 또한 부안 우동리, 공주 학봉리 일대의 전라도·충청도 요지에서는 면상감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고려시대 부안 유천리 요지로부터의 기법적 영향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이후 경기·경상북도 요지에서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상품 자기소로 등록될 정도의 기술력을 갖춘 중앙 공납용 백자 가마가 운영된다. 두 지역 간의 긴밀한 기술·양식적 친연성은 남한강 수계를 바탕으로 한 자기의 운송 체계와도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14세기 4/4분기-15세기 1/4분기 공납 관련 상감청자의 제작과 유통 방식을 추정할 수 있는 비교 자료가 된다. 조선 전기 상감청자의 기종 및 문양은 고려청자와 조선 백자·분장회청사기의 조형 요소가 혼재한 양상을 보이며 각 조형 요소와의 연속성·비연속성이 확인된다. 조선 전기 유적의 출토품과 전세품을 토대로 상감청자 기명은 발, 접시, 잔, 종자, 고족배, 잔받침, 주구발, 뿔잔, 매병, 호, 병, 편병, 자라병, 장군, 주자, 표형병, 대발, 대반, 합, 뚜껑, 향완, 향로, 화분, 장고, 베개, 벼루, 연적, 제기의 28가지 기종과 67개의 세부 기형으로 분류된다. 한편 주요 상감 문양 소재는 용, 물고기, 학, 봉황, 수금, 새, 자라, 게, 소, 코끼리, 버드나무, 갈대, 연화, 모란, 대나무, 매화, 구갑, 수파, 거치, 여의주, 태극 등을 아우르며, 시문 양상은 기명에 따라 다양한 편이다. 각각의 상감청자 기형과 문양은 고려시대의 전통 청자 유형을 계승하여 제작되지만 양식적 소략화·도형화를 거쳐 소멸하는 ‘소멸유형’, 고려시대부터 제작된 예가 확인되지만 전자와 달리 조선 전기에 양적·질적 하락을 겪지 않고 꾸준히 제작되면서 분장회청사기와 백자 조형으로 발전하는 ‘지속유형’, 고려청자에서 전례가 없는 ‘신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부 상감청자 기종과 문양에서는 명대 주기 및 다기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신유형에서 나타나는 금속기적 요소는 15세기 초 조선 왕실의 예제 및 의례기의 정비와 관련하여 논의될 수 있다. 조선 전기 상감청자의 전개를 세 단계로 구분하고 상감청자의 성격 규명을 시도한 결과 I기(1392년–1420년)는 고려 상감청자의 계승 및 재해석이 이루어진 시기로 요약된다. 고려 말의 법제를 계승한 조선 초의 상감청자는 고려 후기 공납용 청자 기형·문양을 계승한 양식으로 제작된다. 경상도 요지를 중심으로 봉황·학·수금·버드나무·갈대·전지연화 등의 문양소재를 장식한 발·접시가 대표적으로, 해당 유형은 시간이 지날수록 소략화 과정을 거쳐 해체되거나 인화문으로 변화한다. 위 문양군은 고려시대에 고급 청자 문양 혹은 공납 관련 문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14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 대부분 상위 위계를 지닌 도상이라기보다 다양한 소비처에서 여러 계층의 수요자들에게 애호된 공예적 장식 문양으로 소비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412년 이후까지 고려의 예제를 답습하면서도 유교 전례의 정비를 모색했던 당시 일부 고려청자 기명·문양은 명의 의장을 참고하여 새롭게 재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일례가 규격화된 3단 문양대에 흑백선상감 문양이 장식된 청자상감용문매병으로, 이전과 달리 의례와 관련된 새로운 성격의 기명·문양으로 기능하며 이후 백자 용준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Ⅱ기(1420년대–15세기 전반)는 제기로 대표되는 상감청자 의례기가 전라도·충청도 가마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제작되면서 의례기로서 상감청자의 성격이 강화된 시기이다. 의례상정소의 설치 이후 고제 연구가 본격화되고, 특정 제사에서 자제기의 사용과 중앙으로부터 통일된 의기의 제작 및 관리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또한 공상·공판용 기명으로 정착한 백자 및 인화분장회청사기와의 상호관계 속에 상감청자 발과 접시는 제작 비중이 축소되고 제한된 특수기명을 위주로 제작된다. 이때 대발과 같이 특정 기종에 특정 문양이 일정하게 결합하는 것은 고전에 근거한 견양의 보급 현상 속에 기형과 문양의 결합이 기명의 특수한 성격을 결정한다는 인식이 제작·소비 관련 계층 사이에 통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Ⅱ기의 일부 상감청자 문양은 개인의 기호와 관련된 공예 장식을 넘어 상징체계인 도상으로 사회적으로 공유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면상감 청자의 생산지는 전라도·충청도 지역 중심의 일부 요지로 제한적이지만 전국적인 소비 양상이 확인된다. 소비유적을 성격 검토할 때 분묘 부장, 지방 의례 등 특수한 목적에 사용된 예가 확인된다. 또한 굽을 상감 장식하거나 높이거나 깎는 등의 조형적 변화를 주는 양상이 면상감 청자에서 자주 나타난다. 굽을 강조하는 조형적 재인식은 같은 시기 자제기 등에 금속기적 요소인 굽, 손잡이, 거치형 돌대를 상형 혹은 문양으로 나타내는 것과 관련 있으며, 기명의 특수한 성격을 나타내고자 한 의도로 해석된다. Ⅲ기에 해당하는 15세기 후반 경부터는 중앙에 관요가 설치되고 중앙요·지방요 간 뚜렷한 질적 이원화 현상이 나타나며, 양질의 상감청자는 주로 관요와 한양에서 생산·소비된다. 1450년대 이후 지방 사기장이 관요로 차출됨에 따라 지방 요지에서는 호, 병, 장군, 뚜껑, 대발 등 일부 특수기명을 중심으로 이전에 비해 단순화된 어문·전지연화문·초문·당초문 계열의 문양을 장식한 상감청자가 극소량 제작된다. 그러나 16세기를 전후한 시기가 되면 지방요의 상감청자 제작은 대부분 중단된 것으로 파악된다. 반면 경기도 관요에서는 16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흑백선상감·면상감기법 등을 활용한 상감청자가 고려청자 유형의 화분과 향로로만 제작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그 배경으로 관요의 주 소비층인 왕실과 상림원 등 관청의 수요 외에도 당시 고려청자를 애호한 고동완상 풍조와 관련하여 한양의 특정 소비층의 기호품으로 애호되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둘 수 있다. 즉 16세기와 가까워지면 상감청자는 더 이상 제기로 제작되지 않고, 무문의 백자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상감청자에 나타난 문양은 화훼문이 중심이 되는데, 문양에 중점을 두었던 15세기와 차이를 보이게 된 배경에 대한 추가적 논의가 필요하다. 조선 전기 상감청자의 특징은 의례재원, 도상, 연속성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된다. 상감청자가 조선시대에도 전국 단위로 제작된 데는 국가·왕실의 수요로 인한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되었다. 상감청자는 특히 문양 혹은 도상의 정확한 표현이 중요했던 의례기에서 기법적 효용성을 인정받으며 집중 제작되었다. 의례재원으로서 상감청자는 조선 초 주기·다기 중심의 고려청자 유형으로, 이후에는 고대 청동 예기와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특수기명으로 집중 제작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따라 상감청자는 이전과 다른 맥락으로 제작 및 소비되며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고, 15세기 전반기에 다양한 백토분장·시유자기 조형의 범람 현상 속에서도 존속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 상감청자 문양은 공예적 장식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도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특정 기형과 문양에서 나타나는 보수성은 해당 문양이 단순한 장식이라기보다 기명의 속성을 정의할 수 있는 도상으로 기능하였음을 방증하는 예라 할 수 있다. 도상은 의례 도설과 같은 기록을 통해 그 의미를 일부 규명할 수 있지만, 도설을 해석하는 과정 혹은 삼차원적 실물과 이차원의 도안을 상호 번안하는 과정에서 도상적 규칙성과 동시에 불규칙성이 나타나 전체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조선 전기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당대 문화 구성원이 공유하였던 시각적 인지양식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조형 및 문양·도상의 의미와 연원을 해석하는 데 유용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를 발전론적 관점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진행되었다. 상감청자는 양식의 혼재로 단일 기명 체계 및 양식적 특징을 정의하기 어려운 특징이 있고, 그것은 해당 분야에서의 난점 혹은 한계로 평가된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 사이를 연속성의 관점에서 재고하는 방법은 고려시대 강진 및 부안요의 폐요 경위와 이후 양식적 전개 등 몇몇 논점을 풀어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The objective of this paper has been to reconsider sanggam celadon, or inlaid celadon, which used to be produced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1392–1910), using three art historical methodologies: reflecting on the historiography (the writing of history) of sanggam celadon, examining it in the context of the social and economic history of art and reinterpreting some of its elements as signifiers of a vast system of ritual vessels, or liqi, in East Asia. The term ‘celadon’─despite its arbitrary nomenclature having possibly been derived from the name of a character from a seventeenth-century French comedy─literally translates to ‘blue ware [靑瓷]’ without indicating the specific hue. Technically, it refers to grey-green-coloured stoneware that was produced by certain chemical reactions involving iron in the clay and iron oxide in the glaze under specific firing conditions. Among varied decoration techniques used in celadon production, the sanggam technique is distinctive for the strong colour contrast effect it creates. In this technique, designs are incised on the surface of the clay body before materials of different kinds and/or colours are stuck into the carved space. Such green ware, with exquisite inlaid patterns, is believed to have been invented during the early Goryeo dynasty (918–1392). It is regarded as an unique achievement of Goryeo potters owing to its rarity in China. The historiography of sanggam celadon had probably been commenced by nineteenth-century and early twentieth-century Japanese scholars. However, this has tended to depend on the context of the Goryeo dynasty. Recent excavatory evidence has confirmed that the large-scale production of grey-green stoneware decorated with sanggam designs continued at various kiln sites after the downfall of the Goryeo Kingdom and the subsequent establishment of the Joseon dynasty. Nonetheless, as per the aforementioned historical narratives, and due to the long-standing belief shared by both academics and the general public, sanggam celadon is considered quintessentially of Goryeo art. This has led scholars to devise new terms to define the sanggam ceramics that were unearthed at the Joseon kiln sites. These terms include ‘Joseon celadon’ or ‘buncheong’ ware with sanggam inlaid designs, which helps distinguish the new dynastic ceramics from ‘Goryeo sanggam celadon’. Consequently, despite the considerable studies on the subject, the discussion has been divided into two historically and terminologically separate contexts: Goryeo sanggam celadon and Joseon sanggam buncheong ware. This caused numerous issues during the dynastic transitional period that remained unsolved. This study focuses on the aspects that have been overlooked and discusses certain issues, which were previously discussed in the context of disconnection, with reference to continuity between the two dynasties. This paper suggests that ceramics that were decorated by sanggam inlaid designs during the Joseon dynasty should also be considered as sanggam celadon. This is because, first, despite slight variances associated with time and place, the ingredients, the potter groups and manufacturing process of the two stoneware do not present any radical changes. The term buncheong ware was coined by South Korea’s first art historian Go Yuseop and indicates the application of white slips (bunjang) on a grey-green (hoecheong) ware. It already testifies that both celadon and buncheong ware share the same clay body and coated glaze that contains iron. Thus, there is technically and essentially no difference between sanggam celadon and sanggam buncheong ware. Most importantly, it is unlikely that sanggam celadon and buncheong ware were perceived as separate ceramics among patrons or consumers during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periods. Instead, it can be surmised that both were conceived as green ware that creates a striking visual effect using black and white patterns. This effect was especially seen in the ceramics from the first half of the fifteenth century, in which the emergence of new types of white wares, such as porcelain and sgraffito buncheong ware, is witnessed. Therefore, instead of approaching the subject using dichotomous terms, such as Goryeo sanggam celadon and Joseon sanggam buncheong ware, the study will use a single unified term: sanggam celadon. The paper will also reassess the subject by assuming a comprehensive approach, compiling what has been called sanggam celadon, sanggam buncheong ware, and Joseon celadon to demonstrate how green ware with vivid sanggam images was defined, used and favoured. The accumulated excavation data has shown that the sanggam celadon from the Joseon period was manufactured in kiln sites located nationwide from 1392 to the mid-sixteenth century. Through the examination of the types and styles of the unearthed ceramics, it can be concluded that two groups of kiln sites─(A) Seoul, Gyeonggi and Gyeongsang Provinces and (B) Jeolla and Chungcheong Provinces─shared similar manufacturing tendencies. The kilns from Group (A) are believed to have produced a large quantity of sanggam celadon bowls and plates. Some vessel shards (e.g. from maebyeongs) decorated with a dragon motif have been discovered, which is unusual almost everywhere but in Gangjin kiln sites dating back to the late Goryeo period. This indicates the existence of a stylistic influence between the Gangjin kilns and the kilns located in Gyeongsang and Seoul regions. It can also be explained that the expansion of inland waterways transport, the use of Namhan-gang river for transporting the tribute grain and other goods, enabled the close technical and stylistic affinity between Seoul and Gyeongsang regions. Meanwhile, in the kilns around Jeolla and Chungcheong regions, sanggam celadon was produced along with various types of buncheong ware. In particular, certain kilns in Buan and Gongju invented a distinctive sanggam technique that carves a bigger surface area and fills it in with white slips, enhancing the range of whiteness. The unearthed sanggam celadon includes a wide range of tableware (e.g. bowls, plates, cups, stemmed cups, jars, maebyeong vases, bottles, flattened bottles, lidded bowls) as well as other vessels used on special occasions such as ritual vessels (e.g. liqi, incense burners), flower vases (e.g. pots), musical instruments (e.g. drums), stationery (e.g. inkstones, water droppers) and pillows. In addition, various sanggam inlaid designs have been identified; the subject matter includes dragons, fish, cranes, phoenixes, waterfowls, other birds, turtles, crabs, cows, elephants, willows, reeds, lotuses, peonies, bamboo, plum trees and other geometric patterns. The premise of the paper is that ceramics were socio-economic products and, therefore, produced, circulated and consumed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demand and supply. The reason behind the continued production of sanggam celadon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can be explained by the dispersion of potters and the subsequent transmission of the associated pottery techniques and styles. However, most importantly, the demand of the court and government offices as well as their institutional supports played a crucial role in the propagation of sanggam celadon across the country. Like during the late Goryeo dynasty, sanggam celadon primarily functioned as tribute goods in the early Joseon periods. It is likely that sanggam celadon had served as tableware that was used on occasions of daily dining, feasts and other events at court. This can be demonstrated by the fact that formal and stylistic features of early Joseon sanggam celadon present a strong resemblance to those of the Goryeo sanggam celadon associated with tribute ware. These features include, for instance, lotus scrolls, waterside scenes, phoenixes, cranes, willows and reeds patterns as well as inscriptions of the name of the government offices for which the product had been commissioned. This noteworthy affinity signifies that the manufacturing process as well as the social structure of the preceding dynasty continued despite the dynastic transition and a series of bureaucratic reforms. In other words, Joseon sanggam celadon was also considered tribute ware and was closely linked to the contemporaneous financial policy. In this respect, the closure of the Gangjin kilns during the early Joseon period can be explained by the significant relocation and diversification of the transportation network, which eventually caused the loss of the geographical benefits available at the Gangjin kiln site. Sanggam designs associated with tributes to the royal court were regarded as high-quality in the Goryeo dynasty. However, around the year 1400, the aforementioned motifs gradually became either simplified or dismantled or changed into stamped patterns. Sanggam celadon inlaid with such designs were no longer exclusively produced and consumed as tribute ware but was favoured by new consumers from diverse communities as decorative crafts. Around the reign of King Sejong (r. 1418–1450), or possibly after 1417, buncheong ware uniformly decorated by reiterated stamp patterns became the new preferred tribute ware. At the same time, white porcelain began to be used exclusively for royal vessels. This resulted in the change of the role of sanggam celadon. Its primary function as tribute tableware for the royal court and government offices was shared with the newly emerged type of ceramics. Therefore, as it remained a part of tribute ware, I argue that sanggam celadon from the 1420s acquired a new meaning and identity as vessels that are closely related to rituals. Accordingly, the ways in which sanggam celadon was manufactured and distributed began to change. It seems that this change was closely related to the contemporaneous practice of making ritual vessels from ceramic. Emperor Hongwu (r. 1368–1398) of the Ming court decreed that all ritual vessels used for ancestral worship and rituals for Heaven and Earth, which were traditionally made from bronze, should be replaced with ceramic. A similar discussion of producing ceramic ritual vessels for the ritual for Heaven (wongu) and rain also appeared six decades after, at the Joseon court. Conscious of the need of establishing a unitary ritual practice and vessel system, the Joseon court required accurate imitations of ancient bronzes or illustrations of them. The elements that were to be precisely reflected included not only size and shape but also the pattern engraved on the bronze liqi. When there was an increase in the demand of ceramic ritual vessels, it appears that sanggam celadon was particularly preferred for its explicit and delicate expression of the motifs associated with rituals. This change can also be evidenced by the type, shape and style of sanggam celadon. From the 1420s, sanggam designs were frequently used for ritual vessels and special tableware that were produced at a limited number at kilns. In contrast, the production of ordinary tableware (e.g. bowls, plates) with sanggam designs declined as buncheong ware became the official tableware supplied mainly to the governmental offices. In terms of style, the subject matter and composition of the design departed from those of traditional Goryeo celadon. Furthermore, certain motifs, including cintamani and taegeuk or taiji, symbols related to Confucius’s idea of yin and yang as well as crabs, emerged as sanggam subject matters. Unlike traditional Goryeo celadon designs, most of which became simple decorative patterns in the fifteenth century, it appears that the aforementioned motifs, for Joseon sanggam celadon, functioned as ‘icons’ or ‘pictographs’. In other words, theses involve nonverbal images that have a direct verbal translation by means of possessing certain meanings that could be understood by all members of a particular group, class or culture. The meaning of certain icons can be understood by referring to ritual books that contain illustrations. The other prominent feature is that some vessels produced during this period have unusually high legs/heels that are sometimes cut or decorated with inlaid patterns. Metallic elements, such as handles, heels and three-dimensional saw-toothed bands, also appeared in sanggam celadon, reflecting the direct translation from bronze to ceramics. As for production and circulation, it is also notable that the kilns that manufactured sanggam celadon with such features are located in Jeolla and Chungcheong Provinces. While the previous production and supply system was unitary, that is the vessels were regularly procured from one provincial kiln for the central government office, the ritual vessels and other wares for special occasions had to be supplied to both central and local consumers in order to meet the demands related to the various rituals held sporadically and irregularly across the country. Meanwhile, the establishment of the royal kiln near the capital in the 1460s led to the decline of local kilns. Therefore, the production of sanggam celadon in the local kilns almost completely ceased starting from the late fifteenth century. Instead, an extremely small volume of sanggam celadon was produced at the royal kiln located in the Gyeonggi Province. One of interesting trends from this period is that the types of sanggam celadon produced at royal kilns were limited to flower pots and incense burners. Given the fact that such sanggam celadon was unearthed from royal kilns, it can be assumed that there existed a special demand for ‘green’ celadon pots and incense burners in the royal court. However, to some extent, with regard to the trend of antiquarianism, it is also possible to assume that these pots and incense burners, manufactured in the Goryeo sanggam celadon style, were made to meet the demands of the general consumers living in Hanyang, the capital city of the Joseon dynasty. Thus through the paper’s analysis of the subject, the reason behind why the sanggam celadon produced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had such a complex and pluralistic character has been ver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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