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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출토 근대 위생도자기(衛生陶磁器) 연구

Title
국내 출토 근대 위생도자기(衛生陶磁器) 연구
Other Titles
A study on the Sanitary wares in the Modern era of Korea
Authors
한혜준
Issue Date
2019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장남원
Abstract
본 연구는 근대기에 형성된 위생개념이 도자 산업에 반영된 모습을 국내에서 출토된 위생도자기의 사례에서 살펴보고 그 특징과 성격을 파악하고자 의도되었다. 위생개념이 형성되면서 도자기는 위생설비에 사용될 최적의 재료로 인식되었으며 도자기 제조업체뿐만 아니라 설비업체에서도 위생도자기의 수요를 전망하여 위생도자기의 제작과 사용을 견인하였다. 이와 같은 전개 과정은 영국에서 먼저 보이며, 서구에서 시행된 위생 사업을 경험한 이와쿠라 사절단이나 유학생들을 통해서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는 1842년 에드윈 채드윅(Edwin Chadwick)의 『영국 노동계급의 위생 상태에 대한 보고서(Report on the Sanitary Conditions of the Labouring Classes of Creat Britain)』가 발간된 이후 공중위생법이 만들어졌으며, 도자기 제작소에서 적극적으로 도기제 위생설비를 생산하여 수질의 오염을 방지하도록 노력했다. 위생설비의 수요가 증대됨에 따라 도자기 제작소뿐만 아니라 배관 설비업체에서도 위생도자기의 호황에 편승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이들이 생산한 도자기제 위생설비들은 영국왕실로부터 제작 공로를 인정받았을 정도로 공중위생에 기여했다. 일본에서는 서구에서 시행된 위생 사업을 경험한 외교 사절단이나 유학생들을 통해서 위생개념이 확산되었으며, 영국의 선례처럼 위생도자기의 수요를 내다본 도자기 제조업체와 설비업체에서 도자기제 위생기를 제작하게 되었다. 나아가 일반 식기와는 달리 제작 시 부피가 크고 무게가 상당했기 때문에 초기 생산에서는 금이 생기거나 파손이 잦았다. 형태가 왜곡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지개발과 유약 시험이 불가피했고, 백색의 경질자기 개발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역시 영국에서도 보이는 전개 과정중 하나로, 위생도자기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강도 높은 소지를 얻기 위해 도기제(earthenware), 석기제(stoneware), 자기제(vitreous china)로 발전해가는 양상을 보인다. 국내에서는 개항 시점에서 개화파 인사들이 청결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을 전염병을 예방하고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하면서 위생문제에 주목했다. 그 결과 도시위생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治道略論』과『治道略則』(1883)이 김옥균에 의해 만들어졌고, 하수설비와 변소 같은 습식공간을 도기제 器具를 활용하여 위생을 실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위생도자기 중에서도 변기류는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토기로 제작하였고, 꾸준히 도기와 자기로 제작되어왔으나 근대기에는 위생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면서 도자기라는 재료 자체의 위생성에 주목했다는데 의미가있다. 귀족층의 전유물이었던 놋쇠제품이 조선후기에 이르면 일반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도자기제 위생기를 제작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청결이 강조되면서 금속에 비해 부식될 염려가 적은 도자기를 선택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고정세간으로 설치하기 위해서는 오수처리를 위한 설비문제가 있기 때문에 왕실과 외국인 공사관과 같은 특정 계층에서 위생도자기와 타일로 마감한 변소 공간을 누릴 수 있었고, 민가에서는 방 한 켠에 요강과 타구를 두고 사용하거나 공동변소를 이용할 뿐이었다. 일반에서 도자기제로 마감한 변소 공간을 접하게 되는 시점은 일제강점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위생과 청결이 관리되고 통제되면서부터로 보인다. 공중목욕탕, 공동변소와 같은 공용공간에 도자기제 위생기가 도입되었으며, 나아가 1920~30년대 문화주택과 개량주택이 선보이면서 위생도자기는 실내 공간에 자리하게 된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도 지방의 농가나 대도시라도 토막민이 밀집한 지역에서는 땅을 파기만 한 상태로 변소를 대신하여 위생도자기와 같은 위생설비가 갖춰진 변소는 부유층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출토된 위생도자기로도 확인되었다. 출토품의 종류가 요강과 대·소변기에 집중되었고, 수량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위생도자기를 종류별로 면밀히 살피는데 한계가 있었으나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해당하는 근대 유적 층위 중에서도 주로 궁궐유적과 일본인 관사, 온천장 내 여관에서 위생도자기가 출토되었으며, 출토품 대부분이 위생기임에도 불구하고 장식이 더해졌다는 점에서 당시 위생도자기가 갖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우선 요강은 동체가 풍만한 무경의 호 형태로, 출토품에서는 무문의 백색, 그물문, 모란문, 녹유 요강이 확인되었다. 국내 생산지에서는 경기도 광주 분원요지와 양구 칠전리 가마터에서 무문과 그물문 요강만 발견되었다. 크롬안료로 장식한 모란문 요강은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모란문 원호와 문양의 구도와 기형에 있어 유사함을 보이는데, 조선 후기에 유행한 모란문 원호를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국내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국내 생산지 유적에서는 지금까지 출토품으로 확인된 바가 없으며, 1939년 동아일보의 기사를 바탕으로 1940년에 이르러 경기도 여주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코발트와 크롬안료로 시문한 모란문 요강은 일본 하사미와 시오다지역에서도 전세품으로 확인되는데, 이 두 지역은 1914년~1929년 경 시행된 일본 요장 조사에서 조선수출용 식기와 함께 요강을 생산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모란문 요강은 일본에서 생산된 조선수출용 도자기들 중 한 종류였던 것으로 보인다. 모란문 요강이 출토품으로는 소량 확인되었지만 전세품으로 다수 남아있다는 것은 모란문을 선호한 한국인의 취향을 반영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대·소변기의 경우 국내 생산지 유적에서 출토된 예는 없고 모두 일본 세토나 동양도기주식회사에서 생산된 변기가 유입된 것이었다. 전체 대·소변기 중에서 청화로 장식한 예가 대부분이었는데, 1891년 노비대지진 이후 일본 세토에서 유행처럼 제작되고 유통되었던 유형이다. 이 장식변기는 당시에 개발된 최신 기법을 활용하여 장식한 것이며, 일본의 내국권업박람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명성이 높은 도공이 주력상품으로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려한 외형과는 달리 품질 면에서는 보완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1904~05년에 이르면 청화변기는 줄어들고 산화크롬으로 발색한 청자변기의 생산이 급증하며 국내에서는 창덕궁 대조전과 동대문운동장 유적에서 출토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생산지 유적에서 세반이 한 점, 생산지와 소비지 유적 통틀어 타구는 6점 출토되었을 정도로 소량만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위생도자기들은 요강의 경우 주로 상인이 각지에 행상을 하거나 시장의 기전에서 유통되었고, 배관설비가 동반되는 대·소변기류는 건축자재를 취급하는 대리점에서 판매되어 유통 방식에 차이를 보인다. 또한 박람회 공간에도 전시되었으며, 특설관 내의 즉매소에서 판매되기도 했다. 이상의 내용으로 국내에서 출토된 위생도자기의 성격은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국내에서 출토된 위생도자기들은 한국산과 일본산이 혼재하며 일본에서 제작된 위생도자기는 한국 내 도자시장을 확보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특히 일본산 요강은 기존에 일본에서는 생산되지 않았던 형태이며, 오히려 조선 말기의 관요나 지방 가마터에서 생산된 양식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제작 단계에서부터 조선 수출을 의도한 것으로 생각된다. 변기 역시 외국인이 운영한 수입상을 통해 서양의 위생도자기가 유통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출토품은 일본산이 대다수라는 점에서 위생도자기와 같은 특수 요업군 마저 한국 시장을 선점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위생도자기들은 박람회 공간에 진열되기도 하는데, 위생 행위를 위한 공간을 연출하고, 위생용품을 전시한 것은 위생개선의 인식을 심어주고 전시된 물품들은 생활개선을 위해 마땅히 투자하고 소비해야 할 것들로 인식하도록 한 조치로 보인다. 셋째, 위생도자기는 사적인 용무를 처리하는 도구이자 사람들이 꺼리는 공간에 두는 기물임에도 불구하고 공력을 들여 화려하게 장식을 더한 점에서 실내 장식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주로 궁궐유적이나 객관, 유명한 온천의 여관 등에서 출토되었으며, 필요 이상의 수량으로 구비해 놓기도 하여 과시 목적의 사치품으로써의 기능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위와 같이 본 연구는 주로 생활문화사나 산업사에서 다뤄졌던 주제를 도자사 측면에서도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나아가 국내에 전세되고, 출토되는 위생도자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부여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해 본다. ;The purpose of the study was to evaluate how the concept of hygiene formed in the modern era was reflected on the ceramic industry using the sanitary ware excavated in South Korea, and to understand the distinct features and characteristics of it. When the concept of hygiene was formed, ceramics have been recognized as the best material to be used for sanitary facilities. Therefore, not only ceramic manufacturers but also facility companies have led the production and use of the sanitary ware because they anticipated that there would be a great demand for it. The concept of hygiene had spread throughout Japan through diplomatic missions and study abroad students, who experienced the hygiene projects conducted in western countries. As it happened in the UK, ceramic manufacturers and facility companies foresaw the demand of sanitary ware and produced ceramic sanitary devices. Unlike ordinary tableware, sanitary ware is bulky and heavy. Therefore, the initial production often had cracks or was damaged. Therefore, it was inevitable to develop soil(substance) and test glaze in order to resolve the deformation issue. It led the development of white hard ceramics. This pattern also showed in the UK. It was evolving in the order of earthenware, stoneware, and vitreous china in order to obtain a strong soil that can bear the weight of the sanitary ware. When Korea opened her ports to trade, people of enlightenment party paid attention to the hygiene issue because maintaining a cleaning environment is a way to prevent infectious diseases and to achieve wealthy countries. As a result, Ok-Kyun Kim published “治道略論” and “治道略則”(1883) in order to improve the urban hygiene environment. Moreover, there was an attempt to practice hygiene by using ceramic devices in a wet environment such as sewage and restroom. Pottery toilets among sanitary wares were used from the era of the Three States and toilets were consistently made of earthenware and porcelain. It is noteworthy that the sanitary characteristics of ceramics caught attention as the concept of sanitary had been formed in the modern era. This pattern was also confirmed by excavated sanitary ware. Sanitary wares are mainly excavated from palace ruins, Japanese official residence, and inns in the hot spring area from the layers representing the latter part of Joseon Dynasty and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lthough the excavated items were mainly chamber pots, urinals, and toilets and only the quantity of the sanitary ware was small. The most of excavated items were decorated, even though they were sanitary items, and it implies the meaning of sanitary ware at that time. The importance of this study is that this study evaluated a subject, which was mainly dealt in terms of life culture history or industrial history, in the aspect of ceramic history. Moreover, authors hope that the findings of this study would give a new perspective to sanitary wares and excavated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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