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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방곡령사건(1889~1893년)과 조선에서의 일본의 세력확대

Title
함경도 방곡령사건(1889~1893년)과 조선에서의 일본의 세력확대
Authors
이수지
Issue Date
2003
Department/Major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차남희
Abstract
이 논문은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조·청·일 간의 상권대립과 세력경쟁의 양상을 1889년 함경도 방곡령사건을 사례로 하여 살펴본 것이다. 19세기 후반기의 조선은 청일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강화도 조약을 강제하여 먼저 조선에 진출한 일본세력은 불평등조약을 바탕으로 각종 이권을 획득하면서 조선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이러한 일본의 진출에 점차 위기감을 느낀 청은 종래 종주국으로서의 위치를 내세우면서 임오군란을 계기로 뒤늦게 조선에서의 영향력 확보에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청일간의 세력다툼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한 친일파의 몰락과 거문도사건을 계기로 가시화된 러시아의 조선침투 위협으로 인해 청의 우위확보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 시기 일본은 아직 타국과 정면대결을 할 만큼의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고, 청의 영향력을 통해 러시아의 위협을 막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 하에 조선에서 청의 정치적 우위를 승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조선 내 세력침투를 견제한다는 측면에서 공통의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던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의 대결을 회피하는 방침을 취하게 되었다. 이로써 표면적으로는 조선문제를 둘러싼 청일 협조노선이 전개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청일간의 겉으로 드러난 외교적 노선에도 불구하고 이면에서는 양 세력간의 영향력 확대 경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청의 조선내 정치적 영향력을 승인하는 입장으로 돌아선 일본은 이를 대신하여 경제적인 영향력의 확대에 주력하는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 물론 경제적 영향력 확대는 일본이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이래 꾸준히 진행되어 온 대조선정책의 한 측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세력의 후퇴를 만회해야 하는 일본으로써는 더욱 강경한 자세로 경제적 세력의 확대를 도모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데 정치·군사적 세력을 배경으로 한 청상의 조선진출이 확대됨에 따라 기존에 독점해 오던 일상의 조선무역에서의 세력 후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조선 내 경제적 영향력의 확대정책에서도 청일간의 대립이 청상 대 일상이라는 상권의 대립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정부는 자국의 세력확대라는 차원에서 상권보호정책을 강경하게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1889~1893년의 함경도 방곡령사건이다. 함경도 방곡령사건은 대두무역을 둘러싼 조선상인과 일본상인간의 상권대립이 원인이 된 것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청상과의 경쟁으로 인한 일상의 세력 축소에 대한 위기감이 놓여 있었다. 특히 1887년 이후 조선무역에서 청상이 점유하는 비율이 급격하게 증가함에 따라 일본상인의 상권은 더욱 위축되어 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정부는 조선무역 회복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 방안의 하나는 청상과의 경쟁이 없는 분야를 주력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원산항의 경우, 사금수출에서 밀리던 일상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품목은 대두였다. 대두 무역은 내지 행상의 확대에 힘입어 더욱 증가하고 있는 추세였다. 게다가 일본에서의 수요도 증가하여 이윤이 높은 상품으로서 원산항 일본무역상의 대부분이 대두수출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지 행상의 확대는 원산항 개항장객주들이 종래 담당해 오던 중간 매매자로써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일본상인들이 개항장객주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함경도 각지를 돌면서 대두를 다량 매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항장 곡물 유통구조의 변화는 개항장객주와 일상간의 갈등을 초래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조선의 상권을 보호하려는 함경도 감사 조병식의 방곡령이 발령되었던 것이다. 한편 조병식의 집요한 방곡 시행에 의해 일본상인의 대두 무역이 타격을 입게 되자 일본정부는 강경한 자세로 방곡령의 철회와 감사의 처분을 강요해 왔다. 그리고 일본측이 원하는 대로 함경도 감사의 전임으로 사건을 종료한 지 1년 8개월 여만에 다시 부당한 손해배상을 강요했다. 손해배상액으로 요구한 액수는 조선측이 실제 손해액이라고 인정한 것의 2배가 넘는 거액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자까지 포함된 부당한 금액이었다. 그리고 조선측이 계속해서 일본이 제시한 액수를 배상할 수 없다고 하자 일본정부는 청을 통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이는 청과의 협조노선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청을 역으로 이용하여 사건의 해결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사건이 해결된다면 결과적으로 조선 내 일본의 세력은 더욱 강화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의 교섭 중재도 효과를 거둘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한 순간, 일본정부는 군사적 대결까지 감행하고자 하는 강경하고 과감한 태도를 취하였다. 최후통첩을 발령함과 동시에 구미 각국의 영사관에 통보하여 일본이 조선에게 보복조치를 가할 것임을 예고했던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처럼 일본의 대응이 강경할 수 있었던 원인을 우선 18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조선 내 경제적 세력확대 정책의 일환으로 설명하였다. 정치적 영향력의 후퇴를 만회하기 위한 방법으로 경제적 영향력 확대에 주력한 일본이 자국의 상권확대를 통해 이러한 경제적 세력 확장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상권에 저해가 된 방곡령사건에서 일본정부의 대응은 매우 강경한 것이었다. 특히 조병식 감사의 처분은 일도(一道) 감사의 처분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내정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영향력 확대에 방해가 되는 세력의 처분을 감행할 정도로 강경한 대응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그만큼 일본의 조선 내 영향력이 강화되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한편 감사처분으로 종료된 사건을 상당 시일이 경과하고 나서 다시 문제시하여 배상청구를 강요하게 된 데에는 1890년대 이후 일본정부의 외교노선의 변화가 뒷받침되어 있었다. 1890년 야마가타(山縣) 내각의 방침은 일본이라는 주권선, 즉 자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는 일본의 안보에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는 이익선인 조선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 내 일본의 우위를 확고하게 해 두고 더욱 적극적으로 세력의 확대를 도모해야 한다고 일본정부는 판단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1890년대 조선문제에 대한 대응은 더욱 강경한 자세로 전개되었다. 게다가 1892년 8월 등장한 제 2차 이토오 내각은 자유당과의 제휴를 이루어 냄으로써 정부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키게 되었다. 때문에 일본정부는 이익선 보호라는 적극 외교에 보다 강경한 자세로 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정부의 배상교섭은 강압적인 태도로 전개되었고 청의 중재가 무너지자 군사적 대결도 감행하려는 자세를 보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응에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계기로 일본 국내에서 준비해 왔던 군사력의 확장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는 대청협조노선을 내세워 협상의 중재를 요청했으면서도, 성과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선 즉시 청과의 군사대결을 예상하고서도 최후통첩을 발령하는 과감함을 보였다. 이러한 강경한 대응은 조선에서의 군사적 대립을 회피하고자 했던 청의 이홍장의 노력으로 인해 실제화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강경방침은 청의 대결회피 노력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청일간의 세력경쟁에서 정치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일본이 그동안 착실히 키워 온 군사력과 1890년대 정부의 적극적인 이익선 보호정책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우위는 이듬해인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로 이어지게 되었다. ; This study is aimed to understand how Meiji Japan expanded her power in Korea, by studying a case of the grain export prohibition in Hamgyoung province during the period of 1889~1893. After the Imo army rebellion(1882) and the Kapsin coup d etat(1884), the Japan s influences in Korea was weakened while that of China became stronger. Under this condition, Japan tried to strengthen her economic power, instead of political influence that Japan had lost since the mid-1880s. However as China also intended to expand her economic power in Korea, it was inevitable the conflict of commercial power between Japan and China. This dissertation analyzed the Grain Export Prohibition in Hamgyoung province from the viewpoint of the conflict of commercial power. Japan has monopolized the Korean market since 1876, but gave way to China from the mid-1880. This tendency was noticeable especially in Wonsan and Incheon, the two of three trade ports in Korea. Focusing on Wonsan, the port of Hamgyoung province, this study traced how its trade structure had been transformed since the opening of Wonsan in 1880. As a result, it was found that Chinese merchants started to occupy the export of gold, an important item dominated by Japanese merchants in the past, in the province. The export of gold to China rapidly increased, while that to Japan decreased. Besides, the situation was the same for import. Since 1887, the import from China steadily grew larger in contrast to that of Japan. Under these circumstances, Japanese merchants started to concentrate on the export of soybeans, another main article of commerce. The export of soybeans increased, supported by the right of peddling in Korea, and therefore, most of the Japanese merchants in the province were engaged in it. Namely, Japan, through the trade of soybeans, intended to recover her commercial power in Wonsan. The Grain Export Prohibition(mainly for soybeans) issue can be understood in this context. The enforcement of the ban in 1889 caused damages to Japanese merchants in Wonsan. In response to them, the Japanese government, who had been concerned about commercial situation in Wonsan, took measures immediately. Firstly, Japan forced to dismiss a provincial governor, Byoung-sik Cho who was in charge of the illegal ban. Secondly, after resigning Cho, Japan demanded a large amount of damages. Finally, Japan decided to send troops to Korea for indemnity. This study analyzed why Japan has taken such a coercive attitude in two aspects. The one is that Japan wanted to expand her economic power in Korea. For that reason, Japan compelled the Korean government to resign Cho who had interfered with the Japan s expansion of commercial power. In addition, Japan demanded damages after the incident had been already settled by the Cho s resignation. The other is related to the change of the cabinet in Japan. In 1890s, the Yamagata s cabinet began to emphasize on protecting the interests-line(Korea) for the sovereignty-line(Japan). For the protection of the interests-line, the cabinet decided to take more influential policy to Korea, which continued during the Matsukata s and Ito s cabinet in 1890s. Moreover, the growth of military power supported its positive attitude. The Japan s effort for the expansion of power achieved its aim. After the incident of Hamgyoung province, the Japan s power that had been diminished since the mid-1880s was recovered. Furthermore, with the superiority over China, Japan could provoke the Sino-Japanese war in 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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