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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前期 漢陽 西郊地域 墳墓出土 陶磁 硏究

Title
朝鮮前期 漢陽 西郊地域 墳墓出土 陶磁 硏究
Other Titles
A Study on the excavated Ceramics from the Seokyo's Tombs of Hanyang in early Joseon Dynasty
Authors
장지영
Issue Date
2011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장남원
Abstract
Joseon dynasty has enacted the laws and systems according to the Neo-Confucianism ideology since the nation's founding. The funeral ritual, without exception, was applied to the confucian form, against to the Buddhistic funeral ritual, cremation which had been a custom of Goryeo dynasty. For this reason, Josoen built a cemetery called 'Bangmyo' modelled on the cemetery of Zhou Dynasty which means the ideal society based on the Neo-Confucianism. The site of Bangmyo can be confirmed in 《Mokminsimsoe》written by Jung Yak-young who was a scholar in late Joseon. He mentioned that Bangmyo was located in 'Dongkyo' and 'Seokyo' in his book. According to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Dongkyo of Hanyang, the capital of Joseon and former name of Seoul, means the area of near the post station 'Youngseoyouk' where is in Uijeongbu now, and Seokyo of Hanyang means the area of near 'Hongjewon', a post station 'Pabal' and 'Jingwansa' where is near Jingwandong. This site is the place where I examine as a subject of the thesis. Recently Jingwandong has extensively been excavated as a part of the town development plan. As a result, 4,237 tombs have been discovered. It is such a remarkable quantity. In this site various artifacts have been excavated, inter alia, 473 ceramics have been discovered. Grave ceramics reflect the political, social, and cultural aspect of an era. In this point of view, I have examined those ceramics and the tomb furnishings, excavated in Seokyo which was the cemetery of Joseon dynasty called 'Bangmyo', and defined the features of ceramics through Joseon dynasty's political, social, and cultural background. In the process, I could find out four main points that represent the meaning of Seokyo ceramics. Firstly, various kinds and types of porcelain which occupy most of excavated ceramics have been discovered in the site. Giving details, 420 porcelains out of 473 ceramics have been excavated, it is about 90 percentage of whole items. And there are various kinds of porcelains like bowls, plates, cups, pots, jars, epitaph tablets, waterdroppers, Myounggi, etc. These were made in many craft work places which have been settled around Hanyang. Therefore, It is Seokyo that were supplied with porcelains from those work places spread across the wide area. Secondly, It is confirmed that the main period when ceramics were buried in Seokyo, was concentrated from early 15th to late 16th. Normally ceramics let us know when they have been buried with their appearance aspect, bottom style, making method, and it is defined that excavated porcelains in Soekyo show early Joseon style such as spreaded lips, curved bodies, bamboo styled bottom. Thirdly, the grave ceramics were buried by the upper class who was allowed to bury ceramics by the law. It proved as the tomb furnishings observed the funeral ritual. According to the rules, the tomb furnishings have had to be distinguished by status. For instance, pots and instruments were for loyal familly, pots and jars for upper nobleman, and pots and bowls for nobleman, but there are no rules for the peoples. Finally, theses ceramics, particularly, porcelains have been related with excavated porcelains from Hanyang's official departments and markets site. They have the same way of making bottom which can be distinguished the period of making. Hence, it is considered that people who lived in Hanyang were connected with the Seokyo cemetery. In conclusion, this study attempts to define the features and Socio-historical factors of excavated ceramics from Seokyo's tombs of Hanyang through the ceramics and the tomb furnishings, Therefore, the excavated ceramics have interrelated with the porcelains of various types used by the upper class living in Hanyang in early Joseon.;조선시대에는 성리학 이념에 따라 법과 제도가 정비되었는데, 상장의례에 있어서도 유교적 예제가 적용되어 고려시대 불교적 장례법인 화장이 철저히 부정되고, 매장제가 강력히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이 추구하던 성리학 이상사회인 주대(周代)의 공동묘역을 모방하여 조선에서도 이 같은 공동묘역을 조성하였다. 『주례(周禮)』에는 이를 방묘(邦墓)라 하였는데, 조선에도 ‘동교(東郊)’와 ‘서교(西郊)’라는 지역을 방묘로 정하여 공동묘역으로 사용하였음을 『목민심서(牧民心書)』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동교’와 ‘서교’에 관한 지역성을 나타내주는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공동묘역이 존재했던 한양의 ‘동교’는 의정부 일대를 말하며, ‘서교’는 본고에서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진관동 일대를 이르는 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한양의 공동묘역이었던 서교지역 분묘에서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에서 도자는 개별 유물의 특징과 함께 분묘의 형식, 부장위치 및 부장구성을 통해 다음과 같은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도자의 부장시기는 15~17세기로 한정되어 있으며, 주로 15~16세기에 용기류를 집중적으로 부장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도자를 부장했던 사람들은 조선전기의 예제에 따라 도자를 부장하는 특징을 부장위치와 구성을 통해 나타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서교지역에 도자를 부장했던 계층이 예제를 지킬 수 있는 양인 이상의 계층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셋째, 출토된 백자의 기종 중 발과 접시에서는 동일한 제작양상 속에서도 다양한 형식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동시기에 다양한 생산지에서 제작된 도자가 유입되었음을 반증한다. 이중 서교지역에 도자가 시기적으로 한정된 부장양상을 나타내게 된 원인을 꼽아보면, 먼저 상장의례 기준서의 변화에 따른 도자 부장예제의 축소를 들 수 있다. 서교지역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방묘였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있었으므로 제도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이에 조선전기 왕·대부·사·서인이 구분된 유교식 상장례가 왕실은『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로 예제가 갖춰진 이래 『속오례의(續五禮儀)』로 상장례 절차 및 부장예제가 간소화되었으며, 대부·사·서인은 『상례비요(喪禮備要)』와 『사례편람(四禮便覽)』으로 두 차례에 걸쳐 상장례가 정비되어 부장도자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수취체제 변화이다. 사림세력의 정계진출과 함께 부세 종목 중 방납의 폐단으로 민생을 불안정하게 했던 공납제를 토지에 따라 미곡으로 수취하는 대동법으로 변환되어 시행되었다. 공납을 위해 생산되었던 지방 특산품들이 미곡으로 대체가능해지면서 지방 특산물 중 하나였던 도자의 생산도 자연히 감소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과정에서 한양으로 유입된 도자의 수량도 현저히 줄어들게 되고, 부장제도의 변화와 함께 자연적인 감소현상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로 사회적 혼란을 들 수 있다. 조선은 인조반정 이후 명·청과의 외교문제에 있어서 친명배청외교를 천명한 결과, 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고, 임진왜란에 이은 두 차례의 호란(胡亂)으로 상당수의 도성민이 한양을 벗어나 유망하면서 시신은 유기되거나 타 지역에 매장되었다. 이로 인해 한양의 방묘지인 서교지역에서의 부장은 지속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넷째로 성리학 수용자세의 변화이다. 조선 중기 이후, 지방사회는 향교를 중심으로 재건을 시작되면서 성리학 이념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상장의례에 있어서도 『주자가례』의 예법을 철저히 따르고자 하였다. 『주자가례』에서는 조상의 안거(安居)를 위해 택지(宅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길지(吉地)를 선정하여 분묘를 조성하게 되었고, 이것이 점차 확산되면서 점차 방묘지인 서교지역을 이탈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근 지역의 유력가문의 족장형 분묘군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된다. 다음으로 서교지역에서 출토된 도자가 계층성을 갖고 있음을 확인시켜줄 근거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문헌기록을 통해 확인된 도자부장자의 제한성이다.『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도자를 부장하는 계층은 ‘왕·대부·사’까지로 한정시켰는데, 성리학 지배이념에 따라 신분에 따른 차등적 의례기준을 제정하여 상장례에 속하는 부장제도에서도 이와 같은 신분차등을 적용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실제 출토 도자의 비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교지역에서 유물이 출토된 유구는 전체의 23%로 이중 도자가 출토된 유구는 3.4%에 불과하다. 이렇게 일부에 국한되어 부장되었던 도자는 앞서 살펴보았던 예제에 의거한 부장자의 한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실제로 출토된 도자의 부장위치와 구성을 통해서도 이들이 예제에 따라 도자를 부장했던 계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근거로는 서교지역 출토 도자의 특수성이다. 서교지역 분묘에서 출토된 도자는 한양을 중심으로 한 서울·경기권의 분묘군 출토 도자와는 차별되는 특징을 나타낸다. 특히 대략적인 시기를 같이하고 있는 평택 소사동 유적의 경우 부장된 도자가 전체 유구의 4%에 불과하며 출토된 도자도 모두 단독으로 부장된다는 점에서 서교지역 도자 부장자들과는 차별성을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그 밖의 분묘유적은 ‘서교’와 같은 대형 분묘군이 아닌 소집단 분묘군에 해당되며, 이들의 운영시기가 주로 서교지역을 벗어난 시점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서교지역이 갖는 한양의 방묘로서의 역할 및 의의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실제 신분이 밝혀진 피장자들을 통해서도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서교지역에서 확인된 피장자의 신분으로는 통정대부, 중추부사, 숙인, 학생 및 유인 등이 있다. 이들은 5품에 해당하는 관직을 비롯하여 궁궐에 직역했던 신분에 해당되거나 문관으로 모두 양인계층에 속하는데, 이들 가운데 백자청화묘지와 백자발이 출토된 분묘가 확인되고 있어, 이러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도자를 부장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서교지역 출토도자의 다양한 특성이 나타나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출토된 백자는 모두 420점으로 이중 121점이 백자용기류이고 299점이 백자명기류로 출토도자의 대부분이 백자인 것을 알 수 있다. 백자 중에서도 전기에 집중적으로 부장된 용기류의 경우, 발과 접시에서 다양한 형식이 확인되고 있는데, 이는 앞서 살펴본 서교지역 피장자들의 신분계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즉, 확인된 피장자들의 신분이 궁궐에 직역을 둔 집안의 사람이거나 무관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그 밖에 9품 혹은 관직이 없는 양인계층의 사람들도 매장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이곳 서교지역은 한양의 방묘지로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신분의 사람들에 의해 도자가 유입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따라 도자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기형은 동시기 한양민의 다양한 도자소비성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양에서 발굴·조사된 관청유적, 시전유적, 생활유적의 출토 도자를 각각 살펴보았는데, 생활유적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시전유적에서도 명기와 같은 출토품이 확인되어 부장품의 유통 상황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결국 서교지역 출토 도자의 특성을 종합해 볼 때, 조선전기와 서교지역으로 한정된 다양한 양상의 출토 도자는 한양에 근간을 둔 양인계층에 의해 소비되었던 다양한 형식의 도자가 서교지역 및 분묘유적으로 유입되었던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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