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 641 Download: 0

高句麗 古墳壁畵에 나타난 生活風俗圖의 性格

Title
高句麗 古墳壁畵에 나타난 生活風俗圖의 性格
Other Titles
(A) Study on the Changes and Characteristics of the Tumulus Mural of Koguryo(高句麗)
Authors
朴賢貞
Issue Date
1997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Keywords
고구려고분벽화생활풍속도묘주 부부상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이 논문은 高句麗 古墳壁畵의 생활풍속도가 변화하는 과정과 그 의미에 대하여 墓主 夫婦像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생활풍속도에는 墓主 夫婦像, 墓主 生活圖, 사냥 및 전투도, 무용 과 놀이, 생활 용품, 행렬도, 城郭과 殿閣, 力士와 怪獸 등이 표현되었다. 이 주제들은 주변 국가의 문화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造營과정에서 고구려화의 과정을 밟고 있다. 墓主 夫婦像과 墓主 生活圖의 기원은 漢代 畵像石의 拜禮圍와 家居圖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후 平壤지역과 集安지역에도 벽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각 지역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 문화 특성으로 말미암아 지역성이 투영되는 과정에서 다른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양지역의 묘주 부부상은 시기별로 4세기, 5세기 전반, 5세기 후반으로 유형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安岳 3호분의 묘주상은 부부가 벽을 달리하여 표현되어 있고 묘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화려한 帳房과 복식, 머리장식, 위세품 등이 묘사되었다. 台城里 1호분은 기본적으로 안악 3호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德興里 壁書古墳의 묘주상은 화려한 장방, 얼굴 형태, 복식과 위세품 등은 기존의 흐름에 놓여 있으나 묘주와 시종과의 비례 차가 커지는 것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5세기 전반 경으로 편년 되는 龕神塚의 묘주상은 표현 양상이 상당히 간소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위세품인 부채가 없어진 점이 특징이다. 묘주와 시종과의 비례 차도 크게 나타남을 알 수 있는데 5 세기 전반으로 편년 되는 고분벽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5세기 초반 집안 지역에는 각저총벽화가 생활품속도의 선두로 나타나는데 묘주부부가 장방안에 등장하는 점은 평양의 것과 다르지 않으나 부인과 첩으로 여겨지는 인물이 측면 상을 하고 있는 점, 얼굴에 살이 없고, 고구려 특유의 복식인 점무늬라든지 무릎까지 오는 두루마기 형식, 좌임 그리고 肖像 형식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묘주를 등장시키는 점은 집안지역의 특성으로 볼 수 있다. 舞踊塚의 묘주상도 장방안에 묘사되며 손님을 맞이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복식과 묘주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은 각저총과 유사하면서 한층 발전된 형태이다. 通溝12호와 三室塚은 5세기 중반으로 편년 되는 고분인데 이때부터는 묘주를 장방안에 묘사하는 형태가 변형되어 가옥구조가 등장하고 그안에 묘주를 묘사하는 묘주생활을 중심으로 삼고 있고 장방생활도가 사라지는 과도기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이후에는 사실상 장방생활도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집안지역의 특성이 평양지역에서는 5세기 중반으로 편년 되는 고분벽화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약수리 벽화고분은 이와 같은 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묘주상 이외에서 묘주 부부상을 묘사하는 점과 시자와 시녀들의 복식에서 집안지역의 특성이 일부 보이기 시작하는데, 평양천도 이후 집안계열과 평양계열이 통합되어 가는 과도기적인 단계로 볼 수 있다. 5세기 후반으로 편년 되는 雙盈塚벽화의 묘주 부부상은 평양계열과 집안계열이 통합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安岳 2호분도 이와 같은 흐름에 놓여있다. 또 묘주와 시종과의 비례 차는 약수리 벽화고분에서 줄어들고 있으며 쌍영총에서도 묘주의 크기가 줄어들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차이가 크지 않게 나타나고 안악 2호분에서는 位階的 표현법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 형태는 고구려 사회의 변화와 관련이 있으며 평양천도와 이에 수반되는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의 정비, 왕권 강화와 지배 세력의 변화와 관련되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4세기 초반부터 국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위하여 약 1세기 정도 평양지역을 경영하고 있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토착 세력을 재편하였고 이때 일부 집안의 지배 세력과 주민의 이주로 평양지역의 구성원이 변화하였다. 따라서 평양지역의 묘주 부부상은 수 세기 동안 정체되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토착 문화와 중국의 정세에 따라 이주해 온 유망민이 지니고 온 문화 양식이 복합적으로 혼재되어 나타났으며 고구려화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 사회의 일련의 변화와 함께 묘주 부부상의 변화가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고구려는 평양지역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토착 세력을 재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정치·경제적인 지원을 하면서 지역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자치력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4세기 후반 평양지역의 묘주상을 통해서 볼 때 묘주가 지역사회에서 최고 지배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고구려 왕권이 일원적인 지배 체 제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세기 전반 감신총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묘주상의 간소화와 축소는 왕권의 절대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왕 휘하의 지배 세력이 위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집안 지역의 각저총과 무용총의 벽화에서 장방생활도가 등장하는 점과 약수리 벽화고분의 벽화에서 과도기적인 형태로 묘의 주상과 부부상이 함께 존재하고 있는 점은 절대적 왕권에 대한 인식이 유포되고 있지만 지배 세력인 묘주를 강조하고자 하는 인식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천도를 계기로 하여 집안지역에는 장방생활도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평양지역에는 묘주상이 축소되어 형식만을 갖추고 있다, 집안지역의 삼실총과 長川 1호분에서 묘주는 장방이 아니라 야외에 묘사되며, 평양지역은 약수리의 과도기적 형태와 쌍영총, 안악 2호분의 표현에서 볼 수 있는 묘주 크기의 축소와 장방생활도라는 형식만을 갖추고 있다. 양 지역 모두 대상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는 위계적 표현이 불식되고 있다. 이것은 지배 세력이 미약하게 되고 있다는 것과 상대적으로 중앙집권적인 지배 체제가 정착되고 왕권이 강화된 점을 시사하고 있다.;I studied the changing processes and characteristics of the tumulus murals of Koguryo(高句麗 古墳壁畵), especially the protagonist (buried couple) portraits(墓主 夫婦像). The subjects of the tumulus murals were various. They depicted not only the deceased people, his family and domestic life, but also the scenes of processions and sports. They also depicted architecture, for example, royal courts, fortress and stable. We find the origin of protagonist portraits in the Scene of worship(拜禮圖) on the stone-plate of Chinese Han(漢) and the Picture of Dwelling(家居圖) on the mural painting of Wei(魏) and Jin(晋). The similar pictures appeared in murals of Pyongyang(平壤) and Jiban(集安) area. The murals of both area had different features at that time. However. they all had been Koreanized as time went by. There are three patterns in protagonist portraits in Pyongyang; the 4th century pattern, the early 5th century pattern, and the late 5th century pattern. The buried couple on mural of Anak Tomb No.3(安岳 3號墳) were painted in separate walls. Their figures were very splendid. The mural of Tesungri No.l(台城里 1號墳) was basically the extension of that of Anak Tomb No.3. The mural of Tokhungri Tomb(德興里 壁畵古墳) was same style. However, the mural of Kamshin Tomb(龕神塚) was simplified. The Wrestling Tomb(角?塚) was one of the representative tombs in Jiban area dated the early 5th century, In this tomb, the buried couple painted in the mural were characterized by the direction of their face, their special dresses and ornaments. It is the character of this mural that the buried man appeared not in funeral but in daily life. The mural of Dance Tomb(舞踊塚) was same style as that of Wrestling Tomb but much more developed. The murals of Tongou Tomb No.12(通構 12號墳) and Three Chamber Tomb(三室塚) revealed that they were in transition. Ever since the painting of curtain room has disappeared in murals. At the middle of 5th century, the features of the murals in Jiban area were expressed in the murals of Pyongyang area as Yaksuri Mural Tomb (藥水里 壁畵古墳) showed. The protagonist portrait of Twin pillar Tomb(雙盈塚) in late 5th century revealed that ultimately the murals in both areas had become in same trend. Anak Tomb No.2(安岳 2號墳) showed this, too. These changes were related to Koguryo's moving its capital to Pyongyang, accompanied with the centralizing power system and the reinforcement of royal authority. In the 4th century, Koguryo Kingdom conquered Pyongyang area, so new residents moved to Pyongyang. They were native ruling class Therefore, the protagonist of other regions and refugees from China. portraits in Pyongyang area had affected from China and other regions. Since then they had been Koreanized as if they were the murals of Koguryo. In conclusion, the changes of protagonist portraits connected with political conditions. The late 4th century's protagonist portraits in Pyongyang area reveal the facts that the buried man was native ruling class and royal authority of Koguryo was not yet centralized and powerful. However, the style of protagonist portrait of Kamshin Tomb(龕神塚) in the early 5th century was simplified and shrunk. It was reflected in portrait that the power of native ruling class was weaken and the government of Koguryo had centralized power.
Fulltext
Show the fulltext
Appears in Collections:
일반대학원 > 사학과 > Theses_Master
Files in This Item:
There are no files associated with this item.
Export
RIS (EndNote)
XLS (Excel)
XML


qrcode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