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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몬테 디 피에타 (Monte di Pietà)의 설립과정과 이자 문제

Title
피렌체 몬테 디 피에타 (Monte di Pietà)의 설립과정과 이자 문제
Other Titles
The Process of Establishment of Monte di Pietà in Florence and Usury Question
Authors
김현지
Issue Date
2017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남종국
Abstract
죄악시되던 이자대부업이 점차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15세기 이탈리아에 몬테 디 피에타(Monte di Pietà)가 처음으로 세워졌다. 몬테 디 피에타는 정부나 개인으로부터 돈을 기탁 받아 돈이 필요한 빈자들에게 5퍼센트 내외의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전당포 형식의 대부 기관이다. 1462년 페루자에 처음으로 세워진 이후 몬테 디 피에타는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이후 프랑스, 스페인, 멕시코 등으로 보급되어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몬테 디 피에타는 당대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기관이다. 몬테 디 피에타는 가난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자선 기관이며, 돈과 이자를 받는 금융 기관이었다. 또한 프란체스코회라는 종교 단체가 주도적으로 설립을 이끌었고, 이후 교황청의 승인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 종교 기관이었다. 무엇보다도 이자를 받는 몬테 디 피에타가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운영되었다는 점에서는 몬테 디 피에타를 통해 당시 사람들, 교회, 수도회의 이자 인식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지역 중에서도 피렌체는 몬테 디 피에타 설립에 난항을 겪었던 예외적인 사례이며 특히 몬테 디 피에타의 설립과정에 이자 인식의 변화가 드러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피렌체에서는 몬테 디 피에타 설립 시도가 두 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고, 마침내 1495년에 몬테 디 피에타가 설립되었다. 1473년에는 몬테 디 피에타의 이자를 두고 수도회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 설립이 실패했고, 1488년에는 프란체스코회 수사의 설교 이후 도시에 폭동이 발생하며 설립이 진행되지 못했다. 이후 1495년 몬테 디 피에타의 설립을 앞장서서 반대하던 도미니코회의 이자 인식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그간의 실패 요인들이 모두 해결된 결과 몬테 디 피에타가 세워질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는 이자에 대한 망탈리테(Mentalités)의 변화를 추적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서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이자는 주고받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자대부는 하느님만 가질 수 있는 시간을 사고파는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고,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줘서는 안 된다는 성서의 가르침에 근거했을 때도 옳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11-12세기 상업혁명으로 이자를 주고받는 일이 많아지자 교회는 이자대부업을 단죄하려고 했다. 그러나 13세기부터는 이자를 세분화해서 이해하고, 일부 이자의 필요성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후 1515년에는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몬테 디 피에타를 승인했고, 몬테 디 피에타가 받는 이자는 합법적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즉, 몬테 디 피에타에 대한 연구는 모든 형태의 이자를 죄악시하던 교회가 이자를 구체화하고, 이자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역사에서 구조나 지리와 마찬가지로 망탈리테가 천천히 바뀐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몬테 디 피에타로 인해 이자에 대한 인식이 한순간에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자 인식의 변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고, 피렌체 몬테 디 피에타의 설립과정은 이와 같은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인 것이다.;The first Monte di Pietà was built in the 15th century when the usury grew in popularity which had long been regarded as a mortal sin. The Monte di Pietà is an institutional pawnbroker which accepts deposits from government or individuals and lends money at a low interest rate of approximately 5 percent to the poor who need money. Since the first establishment of Monte di Pietà in Perugia in 1462, the Monte di Pietà had spread out throughout Italy, then it had been distributed to France, Spain, and Mexico, etc., and some are still in operation today. The Monte di Pietà is an important institution that reflects the contemporary society. The Monte di Pietà was a charitable institution trying to solve the problem of poverty, and a financial institution that received money and usury. In addition, it was a religious institution in the way that Franciscan Order took the lead in its establishment, and it was approved by the Council. Above all, in terms that the Monte di Pietà, which received usury, had spread out throughout Italy and operated, the Monte di Pietà shows how people perceived usury. Florence, among many regions, was an exceptional case that experienced the difficulty of establishing the Monte di Pietà. In particular, it is noteworthy that changes of perception about usury appeared in the process of establishment. There were two attempts at establishing the Monte di Pietà in Florence in 1473 and 1488. All attempts, however, failed because of the usury of Monte di Pietà. Since the perception about usury of the Dominican order gradually changed, and all of the failure factors were resolved, Monte di Pietà in Florence could be finally built in 1495. The goal of this research is to trace the changes of mentality(Mentalités) about usury. In the western European society of the Middle Ages, usury should not be exchanged. The usury was illegal because it meant buying and selling time that only God can have. Also, the usury should not be granted to the same people based on the Bible. However, as usury transaction increased due to the commercial revolution of the 11th and 12th centuries, the church tried to convict the usury. From the 13th century, the church gradually started to compromise with the reality, subdivided the usury and partially justified it. In 1515, the Council officially approved the Monte di Pietà and the usury received by the Monte di Pietà was recognized as legitimate. In other words, the church, which regarded all types of usury as a mortal sin, gradually gave shape to the usury and recognized the necessity of it. This research investigates the change of mentality about usury through Monte di Pietà. However, considering the mentality changes slowly as structure or geography does in history, it is hard to see that the perception about usury had changed at once because of the Monte di Pietà. The change of mentality about usury has come gradually, and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 Monte di Pietà in Florence is an important case that shows such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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