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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드레스덴 풍경화에 나타난 낭만화된 세계

Title
19세기 드레스덴 풍경화에 나타난 낭만화된 세계
Other Titles
Romantisierung der Landschaft : Enthierarchisierung der Bildgattungen und Vereinigung der Künste in der Dresdner Romantik
Authors
이화진
Issue Date
2018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dvisors
전동호
Abstract
Unter dem Titel “Romantisierung der Landschaft” untersucht die vorliegende Abhandlung die Landschaftsmalerei der Dresdner Romantik und ordnet deren Charakteristika dabei in ihren zeitgenössischen Kontext ein. Auf ihrem langen Weg erreichte die deutsche Landschaftsmalerei im 19. Jahrhundert einen Höhepunkt, wobei sie zugleich die romantische Kunst an sich repräsentierte wie an den Namen Philipp Otto Runge, Caspar David Friedrich, Carl Gustav Carus, Johan Christian Clausen Dahl und Ludwig Richter abzulesen ist, die alle in Dresden wirkten. Diese Arbeit fragt daher vor allem danach, was die Gründe dafür waren, dass die Residenzstadt Sachsens die romantischen Landschaftsmaler anziehen konnte, und auf welche Weise die Dresdner Landschaftsmaler sich von den bis zu dieser Zeit dominierenden bildnerischen Ideen und Naturideen emanzipiert haben. Im Jahr 1803 hatte Johann Gottfried Herder Dresden als Deutsches Florenz bezeichnet, und dieses Elbflorenz war seit der Regierungszeit August des Starken eine Kunstmetropole geblieben. So riefen die von ihm begonnenen Sammlungen glänzender Kulturschätze, die schöne Natur der Gegend und die religiöse Freiheit in Sachsen die Landschaftsmaler am Anfang des 19. Jahrhunderts nach Dresden. Um die Eigentümlichkeit der romantischen Landschaftsmalerei aufzudecken, vergleicht diese Arbeit sie zunächst mit der traditionellen Landschaftskunst und den Ideen der deutschen Romantik. Runge erfand das Wort ‘Landschafterey’ und Carus schlug ‘Erdlebenbildkunst’ vor, auf diese Weise wurde die Natur nicht mehr als natura natura, sondern als natura naturans akzeptiert. Damit sprach die Landschaftsmalerei das Gemüt, die Stimmung oder den menschlichen Geist an. Friedrich ersetzte sogar Andachtsbilder durch Landschaftsbilder und Richter betrachtete die Natur als das weltliche Evangelium Gottes. Dadurch konnte die Landschaftsmalerei der Historienmalerei ihren Rang streitig machen und die konventionelle Gattungshierarchie nach der istoria von Leon Battista Albertis auflösen. In Dresden wurde ein neues Genre geboren, das das Bild des Menschen, der Natur und des Allmächtigen in sich vereinigte. Entsprechend ihrer romantischen Definition der Landschaft stellten Runge und Friedrich durch ihre Tages- und Jahreszyklen die Natur, die verschiedenen Lebensstufen und die Zivilisation als Einheit im Werden dar. In ihren Werken verband sich Malerei weiterhin mit Poesie und Musik. Zwar gingen Carus und Dahl zur Naturwissenschaft, z. B. zur Geologie und Meteorologie über, aber mit der Physiognomik der Gebirge erkannte Carus das den menschlichen Berechnungen unzugängliche Alter der Erde und sah in den Alpen Urgebirge, die von der Vorzeit an umgestaltet wurden und weiterhin umgestaltet werden. Das Erdleben offenbarte ihm seine Historizität. Dahls Wolkenbilder betonten ebenfalls die Metamorphose der Natur, obwohl sie meteorologische Betrachtungen reflektierten. Anders als bei John Constable in England fehlten bei Dahls Himmelsbildern genaue Angaben über die Wetterverhältnisse, denn für ihn verändert sich die Natur ständig und schreibt ihre Geschichte am blauen Himmelsgewölbe auf. Im Zuge der Restauration und der beginnenden Industrialisierung änderte sich die Dresdner Landschafsmalerei. Richters Locus Amoenus und die deutsche Idylle wurden zu einem ästhetischen Zufluchtsort, zu einem sich selbst betrügenden Arkadien, weit entfernt von der realen Welt. Die Landschaftskunst erfüllte sich in einem rückwärtsblickenden schönen Schein. Als Ergebnis der vorliegenden Untersuchungen ist nun Folgendes festzuhalten: Als die Historienmalerei ihre Kräfte und ihre Auftraggeber nach der französischen Revolution verloren hatte, stieg die als niedrige Bildgattung betrachtete Landschaftsmalerei hoch. Sie befreite sich dabei von allen Grenzen der Genres und versuchte Kunst und Wissenschaft zu vermählen. Erst mit diesen Dresdner Romantikern fand die bildliche Revolution gegen die Ästhetik des Ancien régime statt. ;본 논문은 1800-1848년경 필립 오토 룽에(Philipp Otto Runge),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카를 구스타프 카루스(Carl Gustav Carus), 요한 크리스티안 클라우센 달(Johan Christian Clausen Dahl), 루트비히 리히터(Ludwig Richter)를 중심으로 드레스덴에서 발생하고 소멸한 낭만주의 풍경화를 동시대 사상과 정치·사회·문화의 다양한 문맥에서 고찰하고, 미술사적 의의를 도출해 내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1871년 통일되기 전까지 독일은 수많은 군소 영주국으로 분할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드레스덴은 엘베 강변의 피렌체로 불리던 예술의 중심지였다. 본고는 작센의 풍요로운 문화유산과 신, 구교가 공존하는 종교적 개방성, 뛰어난 풍광이 낭만주의 풍경화가들을 드레스덴으로 이끈 동인이었음을 밝혀냈다. 또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를 살펴보면서, 소묘 중심의 교과 과정과 고대 미술을 모방하려는 국가 기관이 낭만주의 화가에게는 창조성을 억압하는 장소였음을 지적했다. 풍경화가들은 아카데미가 창작의 자유 대신 손의 기교, 천재성 대신 규칙을 강요한다고 비난함으로써 공적인 제도와 반목하였다. 본 논문은 낭만주의 풍경화 논의를 위한 일차적인 전제로 풍경의 어원과 개념을 기술했다. 미술에서 풍경이라는 단어는 16세기 초 남부 독일에서 처음 나타났으며 고대 이래로 공간 개념과 결부되어 발전해 왔다. 더욱이 풍경화는 회화 장르의 위계질서에 따라 고상한 역사화에 비해 언제나 낮은 위치에 머물렀고, 오직 고대사의 영웅 혹은 성경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상적 풍경화만이 미술 아카데미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산 속의 십자가: 테첸 제단화>(1807-1808년)와 함께 풍경 묘사가 성스러운 사건만큼 신앙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함으로써 풍경화를 종교화로 상승시켰다. 풍경화가 종교 도상에 구속받지 않고 새로운 성화가 된 까닭은 자연이 신의 언어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풍경화에 대한 관습적인 이해를 거부한 낭만주의 화가들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풍경 정의를 추구했다. 룽에는 풍경 만들기라는 신조어로 자신의 풍경화를 지칭했으며 아라베스크와 상형 문자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시각화했다. 카루스 역시 지구생명의 그림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자연을 살아 있는 유기체이자 인간 정신과 동일한 것으로 수용했다. 말하자면 드레스덴에서는 자연을 인간의 소유물이자 지배 대상, 경제 활동을 위한 소비재로 인식한 근대적 시각이 비판받은 것이다. 달 또한 자연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생명체로 이해했고, 리히터도 자연에서 신을 찾으며 풍경화를 구속하던 기존의 장르 체계에 반발하였다. 이로써 본고는 드레스덴의 풍경화가들이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공유하고, 풍경화의 역할을 이전과 다르게 쓴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드레스덴의 낭만주의 풍경화가들은 직간접으로 교류하며 정신적 동질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코 하나의 예술 공동체를 형성하지는 않았다. 특히 화가마다 각기 다른 표현 방식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양식 다원성은 독일 낭만주의 사상과의 교차 지점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낭만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주체를 예술의 척도로 삼았고, 이에 따라 그들이 창조해 낸 모든 도상과 형식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 관찰이 자아 인식과 다르지 않으며, 자연과 인간 내면이 서로 투영한다는 풍경화가들의 이론은 당대 동일 철학과 맞닿아 있었다. 자연과 인간,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제거하려는 드레스덴의 풍경화는 모든 이질적인 것을 합일하려는 세계의 낭만화에 대한 시각적 동의어였던 것이다. 나아가 나폴레옹의 독일 침략으로 인해 중세를 이상화하는 낭만주의 정신은 고딕 양식을 재평가함으로써 고대 미술을 현재의 범례로 삼는 고전주의의 미적 보편주의에 반발하였다. 무엇보다 본고는 낭만주의 풍경화를 종합적으로 비교, 분석하여 드레스덴 미술계가 보여 준 새로운 시도와 그 전개 양상을 도출해 내었다. 룽에와 프리드리히가 선호한 시간의 연작은 하루나 사계절의 흐름을 넘어 인생의 여정, 문명의 발전 단계까지도 포함하였고 지상에서 반복되는 자연의 순환을 신의 왕국으로 가는 준비 기간으로 설정했다. 연작 외에 이들이 즐겨 다룬 쌍을 이룬 그림, 팡당은 상반된 가치를 대립시키는 동시에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을 함축했고, 자연과 인간은 언제나 변화하며 미래를 향해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제시했다. 이뿐만 아니라, 미술과 음악, 시를 종합하려는 룽에와 프리드리히의 낭만적 도전은 매체의 차이를 강조하며 장르 간의 엄격한 분리를 지지한 고전주의 미학과의 대치를 보여 주었다. 이와 더불어 본 연구는 드레스덴 풍경화에 도입된 자연 과학을 짚어 보고, 미술과 과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카루스와 달을 중심으로 조명했다. 카루스는 지구의 역사를 다룬 지질학과 함께 아득한 옛날부터 자연이 달라져 왔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라는 의식을 표출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풍경화를 제안했다. 더욱이 지구생명의 그림이 신의 형성 원칙을 일깨울 때 절정에 달한다는 카루스의 주장은 자연 뒤에 숨겨진 신의 말씀을 룽에나 프리드리히처럼 암호화된 기호가 아니라 객관적인 증거물로 제시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드레스덴에서 논의된 또 다른 과학적 인식은 기상학으로, 구름을 반복적으로 다룬 달의 작업에서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형태 없는 형상에 법칙을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변형을 일으키는 자연의 생명력을 인식하는 데 있었다. 특히 흘러가는 구름을 포착하려는 달의 의지는 측면으로 열린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3차원의 공간과 결부된 풍경 규정을 부정하였고, 완성작과 습작의 경계까지도 모호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거친 붓질과 유동적인 색채로 그려진 구름은 낭만주의 문학의 글쓰기 형식인 단문처럼 상실된 과거와 미래의 완성을 상기시키며 파편화된 현재를 통해 하늘의 역사화가 되고 있었다. 왕정복고의 엄격한 정치 체제 아래 리히터의 풍경화에 나타난 동경과 향수는 지금, 여기의 삶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낭만적 속성을 이야기한다. 또한 원경을 향한 시선을 제한하고 전경을 강조하는 화면은 외부와 단절된 로쿠스 아모이누스로 꾸며져 산업 사회로부터 도주한 미적 은신처를 만들어 내었다. 결국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노래한 리히터의 목가는 현재의 모순을 회피하려는 자기기만적인 아르카디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드레스덴의 낭만주의 풍경화는 진보, 발전 등 미래를 향한 시선을 상실한 채 지나간 세계의 아름다운 가상 속에서 위안을 찾고 있었다. 본고는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며 국가와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고 전통적인 역사화가 의미를 잃어가던 19세기 초, 낭만주의 화가들이 저급한 회화 장르로 평가받았던 풍경화와 함께 전승된 회화 질서에 도전한 사실을 규명했다. 이들에게 풍경화는 자연에 쓰인 신의 언어를 담아낸 종교화이자 자연에 투영된 인간 정신의 초상화였다. 또한 지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상기시키는 풍경화는 자연의 역사를 전달하는 그림이 되었다. 나아가 신과 인간, 자연의 잃어버린 연관관계를 되살리고 이 세계를 둘러싼 모든 대립과 화해하려는 낭만적 노력이 풍경화를 통해 가시화되었다. 드레스덴의 풍경화가들은 자연에 대한 강화된 인식을 바탕으로 삶과 예술, 학문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낭만화된 세계를 그려 내면서 시각 예술의 구체제에 반발한 미적 혁명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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