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 106 Download: 0

朝鮮 17-18世紀 백자대호(白瓷大壺) 硏究

Title
朝鮮 17-18世紀 백자대호(白瓷大壺) 硏究
Other Titles
A Study on the Moon jars(白瓷大壺) in 17~18th Century of Joseon dynasty
Authors
김규림
Issue Date
2017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장남원
Abstract
‘Moon Jars(白瓷大壺, Baekjadaeho)’ means round white porcelain jars around 40cm in height produced in the 17th–18th century during Joseon. Differently from general white porcelain jars, the name ‘Moon jar’ by modern collectors, regarding milky-white and round shape as the full-moon, has become a proper noun that indicates this jar form. And settled down as the representative Korean white porcelains. However, nevertheless such high cultural status, lack of actual data of the 17th–18th century moon jar and fixation to recognition stopped at research mainly with discussion, as the result, comprehensive research output is insufficient. Here, this research investigated the recognition spread process currently fixed through the background where the term ‘white porcelain moon jar’ was created and spread, which decisively influenced image spread of this heritage, and searched the original name that had been utilized while production by analyzing the literature data of Joseon. Also, this research comprehended the formative characteristic and change aspect of moon jar by analyzing artefacts and widely considered the point of time of production and characteristic. Moon jar is called ‘Baekjadaeho(白瓷大壺)’ or ‘Baekjaho(白瓷壺)’ in Chinese. However, these Chinese words are the comprehensive terms that include not only globular jar(圓壺, Wonho) but also baluster jar(立壺, Ibho, its body displays a slim, long form), which did not classify the utensil form. Her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in progressed overall rearrangement of designation of naming of national nomination movable cultural asset in November, 2011 with unification of naming method, designating‘White porcelain Moon jar(白磁壺)’as the official name. However, Ho(壺) was the term that Japanese people called jar, as the result of investigating literature record, it was called Hang(缸) in Joseon Dynasty. Particularly, since the 17th century when this utensil form began to be produced, a term‘Baekdaehang(白大缸(Daebaekhang(大白缸)))’regarding white porcelain jar appeared, also, such terms that divide form were uses, such as ‘Wonhang(圓缸)’ or ‘Ibhang(立缸)’. Therefore, the researcher considers that Chinese characters that indicate this form should be Hang(缸), instead of Ho(壺). Also, to differentiate the form from baluster jar(立壺, Ibho, its body displays a slim, long form), this research suggests to use‘Baekdaewonhang(白大圓缸)’ or ‘Baekjadaewonhang(白瓷大圓缸)’as the round and large jar, the research object. However, this research continued its point with ‘Baekjadaeho(白瓷圓壺)’, which has been combined over 100 years. Due to its large size, moon jar was difficult to mold at a time due to production technique of Joseon. Accordingly, two bowls(鉢) in the same size were joined up and down to produce one piece. Therefore, the maximum diameter appears in the center of the body of the joint part, making about 1:1 proportion between the diameter and height. This production method was not confirmed in the record during Joseon Dynasty, but appeared in Song Eungseong’『Cheongonggaemul(天工開物 )』 during Chinese Ming, accordingly, the origin is determined to be from China. However, moon jar, produced by this technique of the same period, existed a lot below 40cm, furthermore, some were in 17cm size. Therefore, this technique was devised to produce a large jar, however it seemed to have been utilized habitually also in small jars. Accordingly, it is necessary to reconsider whether of determining the scope of this heritage merely focusing on size. As the result of analyzing artefacts produced with upper·lower joint technique, proportion between height with diameter mostly appeared 1 : 1, however in case when the diameter was bigger than height (diameter> height), beads form appeared in proportion below 1(d):0.78(h), in case when height is bigger than diameter(diameter높이) 그 비례가 1(동경):0.78(높이) 이하로 주판알 같은 형태였으며, 높이가 동경보다 클 경우(동경<높이) 1(동경):1.20(높이)이상에 달하는 長圓形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장원형 호는 17-18세기에 제작된 백자대호와 같은 공정으로 제작된 변형 기형으로 보이며, 19세기 말에 다수 제작되는 것으로 보아 점차 이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선술한 백자대호의 정의는 현대에 이르러 정립·확산된 것이기 때문에 동시기 제작된 원호 중 전체적인 기형이나 제작기법 등에서 매우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주판알 같은 형태와 19세기 이후 제작된 장원형 호를 범주에서 제외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장원형은 19세기 이후에 이르러 나타나는 형태이기 때문에 18세기까지로 연구시기를 설정한 본 논문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백자대호는 번조 시 간혹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거나 비대칭을 이루며, 굽 또한 공정의 차이가 나타날 뿐 모두 수직굽의 형태를 띠고 있다. 때문에 동체와 굽의 형태로는 유형을 분류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에 명확한 변화양상을 보이는 구연을 기준으로 유형을 분류해 본 결과, 내측선은 접합 후 따로 파내었기 때문에 45°정도 사선으로 외반하며,「╱」 외측선은 Ⅰ유형의 (A)-예리하게 각을 이루는 형태「<」, B-직선으로 떨어지지만 위아래를 여러 차례 깎아내어 다듬은 형태「ⵎ」, C-예각 형이지만 끝을 다듬어 각이 둔화된 형태「(」 및 Ⅱ유형의 직립한 형태「⎾」로 차이를 보였다. 문양은 철화와 청화기법을 사용했으며, 雲龍紋·竹紋·草紋·虎紋·葡萄紋이 나타난다. 그런데 문양이 시문된 전세품 중 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화기법을 사용하였으며, 90%에 운룡문이 시문된 것으로 나타나 주목된다. 한편 요지 출토품을 분석한 결과, 상·하 접합 기술을 사용한 백자대호는 대략 1630년대를 전후한 시점부터 용인 왕산리와 광주 상림리 가마에서부터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17세기 중반 운영된 선동리(1640~1649), 송정동(1649~1654), 유사리(1660~1664) 및 후기의 신대리(1665~1676)와 지월리(1677~1687)가마터 등에서 다수 생산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경기도 광주 관요 인근의 지방요인 용인 대대리, 가평 하판리 가마에서도 백자대호로 추정되는 구연 片이 확인된다. 이들은 비록 지방요지만 관요와 인접해 있거나, 서울의 인접지역이므로 어느 정도 영향관계 안에서 운영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백자대호에서 나타나는 형태의 차이는 제작시기보다는 제작지의 성격과 연관되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백자대호가 제작되기 이전의 대형 백자항아리는 대체로 입호의 형태였다. 백자입호는 왕실 행사뿐만 아니라 사신접대, 왕실 및 관청의 일상 저장 용기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대형 원호와 마찬가지로 위와 아래를 접합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백자대호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17세기 전반기는 잦은 전쟁으로 인해 파탄에 이른 재정을 복구하려고 노력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여전히 왕실 행사 및 사신 접대에서 사용할 물품의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위와 아래의 형태가 다른 입호는 상하 접합 시 빠른 생산이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왕실 행사 이외에 입호가 갖고 있는 일반 저장 용기로서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으면서 효율적인 제작이 가능한 항아리의 필요성으로 대두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 기종은 대체로 경기도 광주일대 관요 및 그와 영향 관계에 있는 인근 지방 가마에서 생산되었으며, 소비지의 경우 주로 종묘, 군기시터, 및 세종로 2지구, 종로 청진동 유적과 같은 조선시대 관청지에서 출토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수량은 적지만, 「웃밧쇼」, 「연령군 겻쥬방」과 같은 왕실 주방을 가리키는 명문이 나타난다. 즉, 제작 당시 이것을 민간 생활용기로 사용하였다고는 보기 어려우며, 왕실 및 관청의 일상 저장 용기였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근대기 이후 ‘달 항아리’라고 명명된 백자대호는 동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는 제작 양상을 찾기 힘든 형태이다. 때문에 한국의 독특한 미의식이 반영된 기형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 유물을 애호한 수집가들에 의해 형성된 미감은 당대 국립박물관이나 문화재청 등 공신력 있는 기관의 책임자들이나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수차례 언급되면서 빠른 확산과 높은 문화적 위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백자대호에 대한 명확한 사료의 부재와 편년유물 자료의 부족은 다각적인 연구가 진행되는데 어려움이 상존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그동안 심미적 측면에 집중되어 있어 규명되지 않았던 백자대호의 실체에 접근을 시도한 것을 연구의 의의로 삼고자 한다.
Fulltext
Show the fulltext
Appears in Collections:
일반대학원 > 미술사학과 > Theses_Master
Files in This Item:
There are no files associated with this item.
Export
RIS (EndNote)
XLS (Excel)
XML


qrcode

Items in D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