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 206 Download: 0

Full metadata record

DC FieldValueLanguage
dc.contributor.advisor정병준-
dc.contributor.author김서연-
dc.creator김서연-
dc.date.accessioned2017-09-01T23:03:19Z-
dc.date.available2017-09-01T23:03:19Z-
dc.date.issued2016-
dc.identifier.urihttp://dspace.ewha.ac.kr/handle/2015.oak/214366-
dc.identifier.urihttp://dcollection.ewha.ac.kr/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122164-
dc.description.abstract본 논문은 조지 맥큔의 생애 및 그의 한국 연구를 다뤘다. 맥큔은 ‘선교사 2세’로 태어나 최초로 한국을 학문적으로 연구했으며, 태평양전쟁기 미국 내 걸출한 한국문제 전문가로 불렸다. 또한 그는 전후 미국의 대학에서 한국학을 처음으로 육성한 인물이었다. 선행연구들은 맥큔에 대한 기본 정보와 그가 학자로서 가졌던 실증적 연구 태도, 그리고 맥큔의 태평양전쟁기에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대략적으로 밝혀냈다. 하지만 인물 연구에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맥큔의 생애를 완전하게 밝히지 못했고, 맥큔이라는 인물 자체를 주제로 한 연구는 소략한 실정이다. 기존 연구의 한계점은 근본적으로 맥큔과 관련한 1차 사료를 열람 및 접촉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맥큔 문서가 한 곳에 모이고 열람이 가능한 상태가 된 건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였음. 본 논문은 지금까지 다른 연구에서 접근한 바 없는 맥큔에 대한 1차 자료, 즉 ‘조지 맥큔 페이퍼(George M. McCune Papers)’ 를 소장하고 있는 하와이대학 한국학연구소 소장자료를 중심으로 맥큔의 생애와 그의 한국 연구를 다뤘다. 본 논문은 맥큔의 생애를 면밀히 추적하여 그의 한국관이 형성된 과정 및 원인을 고찰하고, 태평양전쟁기 맥큔의 활동을 분석하여 미국의 대한정책이 수립되는 과정을 다면적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또한 맥큔이 전후 미국 대학에서 개설한 한국학 강좌의 내용 및 그의 저술 분석을 통해, 미국 대학에서의 한국학 동향과 전후 미국의 한국문제 인식의 단면을 드러내고자 했다. 맥큔은 1908년 미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조지 섀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 한국명 윤산온)의 아들로 태어났다. 맥큔의 부모님은 한국·한국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고, 맥큔을 비롯한 자녀들에게 그 애정을 고스란히 물려주었다. 특히 아버지 윤산온은 한국민족운동사의 큰 사건들과 연관되어, 1911년의 105인 사건 및 1919년의 3.1운동 당시 한국인들을 사려 깊게 도왔다. 맥큔은 3.1운동이 일어날 때 12세였는데, 일본의 총칼에 찔려 고통 받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일본 군국주의에 큰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이 기억은 평생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되어 맥큔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맥큔은 또한 한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했기 때문에, 선입견 없이 한국과 한국인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한국경험은 이후 맥큔으로 하여금 한국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맥큔은 미국에서 한국을 처음으로 학문적으로 연구한 인물이기도 했다. 유년기의 경험이 바탕이 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혐오감은 맥큔으로 하여금 일본군국주의의 본질을 통찰하고 그를 비판하는 석사논문을 쓰게 했다. 맥큔은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 지금까지도 한글의 공식 표기법으로 쓰이는 맥큔-라이샤워 로마자 표기법(McCune-Reischauer Romanization System)을 만들었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기존에 알려졌던 조선의 대중·대일관계에 관한 일부 견고한 역사적 편견들을 학문적 근거를 기반으로 타파하였다. 이는 그의 개인적 삶에 있어서도 큰 도약이었는데, 한 명의 학자로서 전문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맥큔은 태평양전쟁기 미 정보기관과 국무부에서 근무하며 재미한인사회와 교류했다. 맥큔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혼란시키고 그들을 분열하게 만드는 것은 미국의 소극적인 대한정책이라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또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구상에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신탁통치의 전제를 한국인들의 ‘자치능력 부재’가 아닌 ‘경험의 미숙’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국인들이 자치능력을 인정하고 미국의 비협조적 대한정책을 지적한 맥큔의 견해는 매우 친한국적이자 당시 미 정부 주요 관리들이 갖고 있던 인식과는 상당히 다른 맥락에 위치했으나, 정책 결정 권한이 없는 실무자였던 맥큔이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는 매우 좁았다. 맥큔은 종전 뒤 학계로 돌아와 그의 뒤를 이을 한국 전문가를 양성하려 했고, 이를 위해 대학에서 강의를 개설하여 전후 미국 내 한국학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맥큔은 한국 연구자로서 쌓은 전문성 및 전시 미 정보기관에서 근무한 경력을 바탕으로 학계에서 입지를 다지려 했다. 맥큔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과 관련한 많은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해방 후 한국의 분단과 좌우세력 분열, 단독정부 수립 등 당시 한국의 상황을 미국에 알리고 그 심각성을 경고하는 글들이었다. 맥큔은 이를 통해 한국문제에 관한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자신의 논조를 유지하며 이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자 했다. 그러나 맥큔의 강의 및 연구는 그가 학계로 돌아온 지 채 3년이 지나지 않아, 그가 지병이었던 심장질환으로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중단되었다. 맥큔은 미국이 최초로 낳은 체계적인 한국학 연구자였다. 그는 이론적·실무적 경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후 학계에서 한국학이라는 분야를 설계해 나가려 했다. 이는 전후 미국 내에서 미개척분야였던 한국학이 실로 수요가 꽤 있었던 일본학·중국학에 비해 비견되는 역량과 수준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짧은 생애는 학계와 해방 후 한국 사회에 엄청난 손실이었다.;The purpose of the study This study addresses the life of George McCune and his tribute on Korean studies. As a son of a missionary, he was the first person who studied Korean Studies and fostered Korean studies in US universities. He was renown as an expert for problems in Korea during the war period. In the past, information of his life was only limited to his studies and his activities during the Pacific War. It was only since early 1990s that McCune's documents were thoroughly available. In reference to the document called George M. McCune Papers from Center for Korean Studies, University of Hawaii, the life of George McCune and his Korean studies were examined. The study closely investigated his activities during the Pacific War regarding establishment of policies for Korea. It was possible to observe the trend and awareness of Korea's situation in America through his lectures and writings. McCune was born in 1908 as the son of Presbyterian missionary, George Shannon McCune (Korean name as Yun Sanon), McCune's parents had deep affections for Korea and the people, which influenced McCune's life greatly. His father Yun Sanon actively assisted other Koreans in the 105-men incident in 1911 as well as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McCune was only twelve when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ccurred, Witnessing Koreans being tortured by Japanese army, he has developed a strong aversion at Japanese imperialism since young. Being born and lived in Korea, McCune did not have any prejudice against Korean culture, but rather made decision in the position of Korean citizens. He was also the first person in America to study Korea in an academic way. His antagonism towards Japanese imperialism made him criticize about Japan's invasion for his master's thesis. For his doctorate thesis, he created McCune-Reischauer Romanization System, which is being used worldwide until now. With ample amounts of academic proof, his thesis broke down the historical prejudice regarding Joseon's relationship with China and Japan. While working in US Department of State during the Pacific War, McCune actively interacted with Koreans in America, claiming that the confusion persisting in Korea was due to America's passive reaction. He claimed that Korea's lack of experience, rather than their lack of autonomous capacity, was the reason for their division. McCune's insight was far different from the opinions of US government officials, leaving him only limited right to decision making. After the war, McCune returned to academia to nurture the experts in Korean studies by opening a lecture in American universities. With his experience in information agency and expertise as a scholar, he tried to consolidate his position in the field. McCune published many articles about the division of territory, the internal conflicts and establishment of a single government in Korea to increase the awareness in America. McCune tried to grab attention from people by claiming that America was responsible for the problems in Korea. However, not more than 3 years of his return to academia, he died of a heart attack at the age of 40. McCune was the first researcher in Korean Studies in America. With his theoretical knowledge and practical experiences, he desired to promote Korean studies in academia after the war. The study reveals that he possessed the ability to foster Korean Studies at the period where Japanese Studies and Chinese Studies were far more popular in American society. His death was a great loss both in academia and in Korean society in postwar period.-
dc.description.tableofcontentsⅠ. 서론 1 Ⅱ. 한국에서의 출생과 유년기 (1908~1919) 5 1. 가계와 한국에서의 성장 5 2. 부친 윤산온과 가족의 한국 연구 9 Ⅲ. 미국에서의 수학(修學)과 한국 연구 (1921~1941) 16 1. 고등학교대학 졸업과 동양사 석사 (1921~1935) 16 2. 버클리 대학 박사과정과 한국 연구 (1935~1941) 21 Ⅳ. 태평양전쟁기 미 정보기관국무부 근무와 대한정책 관여 (1941~1945) 30 1. COI·OSS 참여와 재미한인사회에 대한 평가 (1941~1944) 30 2. 국무부 한국과 근무와 대한정책 관여 (1944~1945) 38 Ⅴ. 버클리 대학 한국사 강의와 한국학 저술 (1945~1948) 42 1. 미국 대학 내 최초의 한국사 강의 개설 42 2. 한국학 관련 저술과 그 특징 46 Ⅵ. 결론 53 참고문헌 55 부록1. 조지 맥큔 연보 61 부록2. 조지 맥큔 저술 목록 63 ABSTRACT 65-
dc.formatapplication/pdf-
dc.format.extent1123027 bytes-
dc.languagekor-
dc.publisher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c.subject.ddc900-
dc.title조지 맥큔(George M. McCune)의 생애와 한국 연구-
dc.typeMaster's Thesis-
dc.title.translatedThe life of George M. McCune and His Tribute on Korean Studies-
dc.creator.othernameKim, Seo Yeon-
dc.format.pageiv, 66 p.-
dc.description.localremark석0044-
dc.contributor.examiner백옥경-
dc.contributor.examiner김영미-
dc.contributor.examiner정병준-
dc.identifier.thesisdegreeMaster-
dc.identifier.major대학원 사학과-
dc.date.awarded2016. 2-
Appears in Collections:
일반대학원 > 사학과 > Theses_Master
Files in This Item:
There are no files associated with this item.
Export
RIS (EndNote)
XLS (Excel)
XML


qrcode

Items in D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