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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세기 중국과 고려의 金釦瓷器 연구

Title
10~13세기 중국과 고려의 金釦瓷器 연구
Other Titles
A Study on GeumguJagi(金釦瓷器, The Gilt-silver overlay porcelain) in the 10~13th century China and Goryeo
Authors
윤도영
Issue Date
2015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장남원
Abstract
金釦瓷器는 고려와 중국에서 유행한 고급 도자 기물로, 여기서 金釦는 기물의 가장자리나 동체 전체를 금속으로 보강 또는 장식한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본 논문에서는 금구자기의 제작 배경 및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관련유물을 분석해봄으로써 금구자기가 當代에 지녔던 문화적 가치와 경향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금구는 중국 전국시대에 출토된 칠기 유물에서 처음 확인된 이후로, 漢代에는 ‘釦器’라는 명칭으로 칠기에 등장한다. 한대 이 유물은 木胎로 되어 있는 칠기의 구연부와 모서리에 금구가 부착되어 있는데, 이는 해당부분의 결실을 보완하는 목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한대의 명문유물들의 분석을 통해 이 시기 釦器의 사용층이 제한적이었고, 금구 제작을 위한 관청과 工人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 되었는데, 이는 금구가 상류층의 향유와 제례를 위한 문화적 기능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라 할 수 있다. 국내에서의 釦器의 발견은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에서 시작되었다. 낙랑에서 釦器가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기술과 제작기법이 낙랑을 통해 한반도로 유입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후엔 비록 금속이 기물의 가장자리에 위치하는 금구와는 다르지만, 신라시대의 로마로부터 수입된 유리병의 손잡이가 금줄로 수리한 예, 그리고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금·은·동·수정·유리 등의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여러 겹으로 중첩시켜 봉안하는 방식을 채용한 사리기를 관련 유물로 분류할 수 있다. 따라서 금속과 다른 재질이 결합된 공예품의 문화는 한대부터 시작하여, 기술력이 점진적으로 축적되어가며 발전이 이루어졌고 한반도에는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을 통해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칠기 기물의 가장자리에 부착되는 금속장식은 唐, 五代에 이르면 자기에도 이식되기 시작한다. 금구자기가 唐代 법문사 출토 <漆平脫銀釦秘色瓷碗>에서 유물로 처음 등장한 이후 오대 월요에서 제작된 청자완과 901년의 기년이 있는 水邱氏墓에서 출토된 상당량의 백자에서도 금구장식이 확인되었다. 금은식기가 가진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기복적 의미로 인해 한대부터 이어져온 금은기의 유행은 이후 전연의 맹약과 정강의 변과 같은 시대적 정황과 맞물려 금속원료의 부족을 가져왔고, 금구자기가 대체품이 제작되는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금구자기는 상류층 사이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 애호품 혹은 하사품이되었고, 국가 간 조공품으로도 역할을 하였다. 五代와 北宋 시기 귀족묘의 묘장과 교장에서 주로 출토된 점으로 보아 상류층 사이에서 고급기물로서의 애호품 또는 하사품으로 이용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고, 더불어 10세기 오월국에서 생산된 청자 중 금구자기가 주변국으로 보내졌음이 확인되어 오월국만의 특산품 및 조공품으로서의 기능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북송 중후기에는 복소법의 도입에 기반하여 정요와 경덕진요를 기점으로 대량 생산화가 이루어져 이전 시기에 비해 금구자기의 보급화가 촉진되었지만, 구연부가 시유되지 않는 결함도 야기해 금속 테두리를 통해 보완하고자 하였다. 중국 송대 금구자기는 당시 고려와 중국 간의 인적 ·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였기 때문에, 이를 통해 고려로의 금구자기 유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고려로 들어온 거란계 귀화인과의 직접적인 문물교류는 고려인들로 하여금 금구자기에 대한 인식과 타출 및 어자문 공예품과 같은 제작 기법의 다양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고려도경』을 포함한 문헌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금속에 대한 인식과 이용 상황을 파악하여 금구자기의 제작 가능성을 추론할수 있었다. 고려 금구자기는 파주 혜음원지를 비롯하여 자강도 희천시 서문동 유적, 강화석릉과 같은 왕실 관련 및 상층 계층의 유적에서 출토된 점으로 보아, 중국에서와 유사하게 고려에서도 주로 상류층에서 소비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더 나아가, 고급 시문 기법인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시문하고 구연부에 금속 테두리를 장식했다는 점은 기물을 좀 더 고급화 하고자 한 고려인들의 노력을 보여준다. 고려 금구자기의 제작에 대해서는 중국에 비해 희소하고 요지에서 출토되는 정황이 파악되지 않아 성분 분석 자료를 통해서도 접근해보았는데, 금속장식에 인체에 무해한 성분인 주석(Sn)이 함유되어 있어 생활용기로서도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유약 위에 금속이 덧씌워졌는데, 이는 주석의 연성을 이용하여 원형으로 재단한 후 금구를 자기에 끼우는 방식으로 제작한 근거라 할 수 있으며, 이 때 금구의 접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저온소성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와 중국에서 사용된 금속은 한정된 재화로서 모든 계층에 통용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禁制도 있어 금구자기 역시 제작과 사용에 제한이 있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재질을 이용하여 번안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고려를 비롯하여 遼, 金代의 유물에서 구연부에 색을 다르게 해 장식효과를 준 사례가 적지 않게 확인되고 있고, 대표적인 예로 구연부를 금속 대신 철화를 칠해 금속테의 분위기를 낸 고려의 <철화화형접시>가 있다. 또한 기물 전체가 금속으로 장식된 완은 금속에 넝쿨문을 투조하여 청자에 씌워 문양을 두드러지게 표현했는데, 이러한 기법은 역상감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상감기법 위에 금채를 한 고려 후기 화금청자도 금구자기와 기법은 다르지만, 금속재료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관련 유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고려와 중국에서 10~13세기에 걸쳐 동시대에 나타났던 금구자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먼저, 금구는 그것이 가진 특징과 재료의 성격으로 인해 사용층이 상류층에 한정적이고 고급기물로써의 용도 역시 제한적이었지만 꾸준히 애호되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재료가 부족한 시기에도 모방을 통해서 금구자기를 향유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엿보이는데, 이는 양 국가 내에서의 금구자기에 대한 높은 가치를 보여주는 점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금구자기는 자기의 결실 부분 보완이라는 실용적 기능과 동시에 장식적인 기능 또한 가지고 있어 다양한 면을 충족시키는 공예품의 면모를 가지고 이용되어 왔다는 특징을 지닌다.;The GeumguJagi(The Gilt-silver overlay porcelain, 金釦瓷器) was the style of fine antiquity that was trendy around era of Goryeo and China; here, the Chinese character ‘Gugi(釦器)’literally means the part that frames the porcelain (whole or just around the edge) with metal in purpose of ornamentation or reinforcement. This article is mainly taking the academic research about the golden framed porcelain’s background, manufacturing, and the process of development over the history; moreover through profound assay of related lacquerwares, the writer aims to discuss about the golden framed ceramic’s cultural value and inclination. After firstly found from the piles of excavated the Warring State Period’s wooden lacquerware antiquity of China, Geumgu appeared again in Han Dynasty (漢代), with the label of “Gugi”. This style of antiquity in Han Dynasty was classified with the wooden lacquerwares that golden layers were framed around the edges and lips of porcelain; those frames mainly were for the sake of stronger usage in longer times. Not only that, but it also had been confirmed through the trustworthy assay of Han Dynasty that the usage of Geumgu were limited, and in order to product the porcelain, the prerequisites were the allowance from civic office and well-trained artisan. From this fact, it is very possible to deduce that Geumgu had not only the value of high class’s delight, but also cultural usage for ancestral ritual. Domestic excavation of the framed ceramic started from Nakrang(樂浪), the one part from Hansagun(漢四郡). Base on the fact that many Geumgu were excavated near Nakrang, we can come up with clear inference that Gugi came to Korea through Nakrang, where accepted the craftsmanship from China. Despite of different spacing where they Geumgu, many other porcelains can be classified as the framed ceramics; for instance, imported Roman glass vial in Silla era was also framed in golden line. Plus, there are Sarira reliquaries framed in many layers with not only gold, but also with silver, cooper, glass, and even crystal in times of United Silla and Goryeo Era. Thus, we can notice that culture of handicraft that combine metal with other material started from the Han Dynasty and influx Korean through Nakrang, one part of Hansagun; furthermore, it gradually accumulated and developed its technology. The metal ornament framed around the edge of wooden lacquerware antiquity started to implant in the porcelain as well around Liao and Jin Dynasty(遼·金代). Since the first advert from excavated from Famensi(法門寺) of Tang Dynasty(唐代), it had been confirmed that GeumguJagi can be found among those celadon bowls from Yue-yao(越窯) of Five Dynasty(五代), in year of 901, and considerable amounts of white porcelains, unearthed from tombs of Sugu. Dreaming of eternal youth, the upper class in those days owned diverse pairs of golden/silverware, which became the trend from Han Dynasty. As the style of GeumguJagi was prevalent, the lack of metal material occurred after historical events, such as the tragic battle of Jungang. This naturally accelerated the usage of the GeumguJagi as the substitute of producing new metal lacquerware. In early days of the GeumguJagi, it was usually considered as the high valued royal gift or penchant for lacquerware, time-to-time it was also tribute between countries. Considering the fact that these types of porcelain were excavated from the tombs of royal family around Five Dynasty, the writer is assuming that they were the belongings of high classes as the gift or collectives. Moreover, around 10th century the GeumguJagi from Wuyue(吳越國) had been sent to other countries, which can naturally conclude the usage of these porcelain were high-valued gifts to other nations. Around the middle and later Northen Song Dynasty(北宋), there was a phenomenon of massive production to expedite the supplies based on arrival of Bokso method, which was started from the birth of Ding-yao(定窯) and Jingdeshen-yao(景德鎭窯). The downfall of the massive production was the weakness around lip area of porcelain that golden framing methods were highlighted as complementary measure. During Song Dynasty, there was active personal/cultural interchange between Goryeo and China. Base on this fact, it is very possible to deduce that the style of golden framed ceramic got into Korea through China during Goryeo. Especially, direct civilization interchange with Khitan naturalized citizen in Goryeo could largely influence the variation of producing method and growth of framing method’s cognition, such as usage of Ring-matted patterns(魚子文) and repoussé(打出). Including the quotation of『Xuānhwafengshi Gaolitujing(宣和奉使高麗圖經)』, many literature records can site the possibilities of process and production of GeumguJagi, such as general public cognition of metal during those days and overall circumstance for using the Geumgu. The royal or upper classes’ tombs like Haumwonji of Paju, Semoon relics of HuiChen City, Sukrueng of KangHwa are the main excavated location of the Geumgu porcelain in Goryeo. Considering this fact, we can make academic guess that it were belongs of noble classes, just like in China. Furthermore, we can peek into the effort of Goryeo people to upgrade framing style by carving the pattern by method of marquetry, and framed the metal edge around the lips of porcelains. About the producing processing of the GeumguJagi in Goryeo, there are quite rare literature records and not many pieces were excavated. Therefore it was based on componential analysis; the writer figured out that artisan used the stannum(Sn), in order to avoid the physical harm and to promote the daily usage. Moreover, overlapping the glaze over the metal is based on the style of inserting Geumgu in porcelains after cutting out the patterns. The writer is assuming that they would choose the low temperature fired method to ease the process of gluing the golden frame. On the other hand, the metal used during time of Goryeo and China was limited material with embargo, which naturally bright the limited boundaries of production and usage. In order to overcome such realistic hampering conditions, there were the tries by utilizing the different material. Including Goryeo, the antiquity from Liao and Jin Dynasty colored the lips of porcelains differently for purpose of decoration; the most famous example can be from Goryeo. Instead of metal, it colored with steel, but still could look alike like the metal frame. Moreover the bowl that whole body decorated metal added up the moon vine pattern for celadon porcelain, which is related to reverse inlaid work. In this content, despite of different technique of Overglazed gilt celadon(畵金靑瓷) from end of Goryeo, framed with gold by marquetry method, it is related antiquary for sharing common ground of using the metal material. The common characteristics of GeumguJagi during 10~13 century in China and Goryeo can be first point out as their luxuriousness; due to lack of metal and effort to create them, usage of porcelains were limited to the royal and noble classes. Moreover, even in the days they could not afford the abundant material, throughout imitation, they tried to keep enjoying the beauty and value of GeumguJagi, which can point out the significant value of that ceramics in both countries. Lastly, the golden framed ceramics not only have practical function that complements its weakness, but also the value for ornament, which can lead to the various layers of satisfaction as handicra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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