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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금동비로자나·아미타여래좌상 연구

Title
불국사 금동비로자나·아미타여래좌상 연구
Other Titles
A study on The seated Gilt-Bronze Vairocana & Amitabha Buddha Statues of Bulguksa temple
Authors
정진영
Issue Date
2015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홍선표
Abstract
불국사 금동비로자나·아미타여래좌상은 ‘불국사’라는 특수한 장소성과 ‘통일신라’, 그리고 ‘비로자나불상’이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일찍이 한국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사례로 여겨져 왔다. 특히 두 불상은 완벽히 다른 두 尊格, 비로자나와 아미타가 한 쌍으로 조성되어 전례가 없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수인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지권인’, ‘아미타인’의 형식과 반대로 양손을 결하고 있다. 때문에 비슷한 시기 조성된 다른 불상들과 차별성을 보이며, 동시에 한국 불교미술의 독자적인 특수성을 대변한다. 지금까지 두 불상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상이 언제 조성되었는가를 밝히는 데에 집중되어 왔으며, 기타 문제들을 다룬다 하더라도 불상이 봉안된 사찰 ‘불국사’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두 불상과 관련된 제반의 문제들을 푸는 데에 있어 불국사와 관련된 사건, 인물, 그리고 사찰 內 특수한 조건들이 항상 핵심 단서로 언급되어왔다. 반면, 이 글은 종교미술이 신앙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일반적인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즉 신라 불교의 보편적 흐름 속에서 왜 이와 같은 특수성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 단서를 상이 조성되었을 당시 불교계의 상황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 결과 두 상과 관련된 다음의 세 가지 의문점―①두 상의 조성시기 ②비로자나·아미타 조합의 연유 ③原 봉안처―에 관하여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게 되었다. 조성 시기는 9세기 100년의 시간 중 9세기 중반으로 결론하였다. 형식 및 양식―긴 이등변삼각형의 신체비례, 얼굴의 양감 및 耳目口鼻의 과장, 거꾸로 된 수인(좌권인, 逆아미타인)―이 9세기의 상과 유사하다는 점이 주요 논거로 제시될 수 있겠지만, 더욱 무게를 두어야 할 점은 불국사의 상이 단순히 ‘비로자나불상의 출현’이 아닌 ‘왕실발원으로 조성된 비로자나불상의 출현’이라는 데에 있다. 신라 불교의 성격은 8세기 중반 경덕왕대를 기점으로 법상 중심의 중대 불교에서 화엄 중심의 하대 불교로 세력이 교체되지만, 화엄의 주존 비로자나불이 하나의 시각매체로 유행하는 시기는 훨씬 늦다. 심지어 왕실 발원으로 조성된 비로자나불상의 경우는 약 100여년의 공백을 만들며 847년 성주사 철불에서 처음 확인된다. 당시 화엄의 주류였던 의상계 화엄학의 독보적 위치 및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 등을 고려해보면 당연한 결과인 셈이다. 왜냐하면 의상은 화엄학승이면서도 화엄의 원찰 부석사에 비로자나불상을 모시기보다는 아미타여래상을 봉안하는 실천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영향력이 유효한 시기, 적어도 9세기 중반까지는 의상의 특이성이 그대로 답습되어 화엄사찰에 비로자나불상이 아닌 아미타여래상이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불국사의 두 상은 재료, 크기, 조형적 완성도에서 있어서 누구나 감탄할만한 완벽함을 보여준다. 분명 상이 조성되는 과정 동안 시간과 노력이 아낌없이 투자되었을 것이며, 발원자 ‘신라 왕실’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결과물을 완성할 수 있었던 시기는 9세기의 유일한 안정기, 경문왕의 재위기간뿐이다. 그렇다면 비로자나는 왜 아미타와 함께 등장한 것인가? 과연 이 이례적인 도상의 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두 문제의 답은 두 상이 조성된 9세기 화엄의 변화, 바로 ‘실천성’의 포용에 있다. 9세기 중반이 되면 신라의 화엄은 선사상의 흥기, 羅末의 혼란, 그리고 종파 내부의 매너리즘이 더해져 교학적인 면에서 일대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특히 대중과의 거리는 화엄학승들로 하여금 누구나 쉽게 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도를 제시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필자는 이 변화의 구심점으로 9세기 말 화엄의 중심 도량으로 성장하는 ‘해인사’의 성격에 주목하였고, 해인사를 중심으로 유포·확장된 다음의 두 서적이 그 변화의 典據로써 역할 하였다고 보았다. 799년 唐 유학승 梵修에 의해 국내로 유입된 『40華嚴經』, 그리고 澄觀의 『華嚴經疏』는 분명 화엄관계 저술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 내용 중 일부는 주존인 비로자나를 찬탄하기 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미타의 구현을 외치며, 심지어 비로자나와 아미타, 연화장세계와 극락세계를 완전히 동일시한다. 결국 9세기 화엄이 제시한 구체적 실천도는 ‘稱名念佛’함으로써 ‘極樂往生’할 수 있다는 ‘미타신앙’인 셈이며, 불국사의 두 상은 이를 형상으로 구체화시킨 현전하는 실체라 볼 수 있다. 한편, 두 상은 ‘舍那彌陀一切, 華藏極樂一切’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쌍’, 즉 ‘set’를 의도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의 봉안공간은 사찰의 전면 ‘극락전’, 그리고 사찰의 후면 ‘비로전’으로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또한 20세기에는 약 3차례―대웅전(1903), 극락전(1925), 대웅전(1973)―에 걸친 비로자나불상의 이동이 확인 된다. 이에 필자는 지금의 봉안처가 불상이 조성되었을 당시의 原 봉안처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다는 가정 하에 9세기 불국사의 공간을 재구성해 보았다. 아미타여래상이 봉안된 지금의 극락전은 과거에도 극락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 공간은 寺地의 서쪽에 구획되어 있으며, 경내 3列16段의 석계, 사찰의 전면에 흐른 蓮池 등은 모두 아미타여래가 주재하는 ‘西方極樂淨土’를 의도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반면, 비로자나불상의 봉안 공간은 지금과 다르다고 보며, 現 대웅전 영역을 과거 비로자나불의 영역이라 결론하였다. 그 근거는 두 상이 ‘한 쌍’으로 조성됨에 있다. ‘한 쌍’, 즉 ‘set’라는 특수성은 두 상이 같은 전각에 함께 봉안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전각에 봉안되었더라도 전각의 위치 및 관계에 있어서 마치 하나처럼 보이도록 연출했을 기대를 만든다. 최치원이 남긴 「阿彌陀佛像讚幷序」에는 ‘화엄에 눈을 부쳐 연화장세계를 바라보며 불국에 마음을 달리니 아미타정토가 연결되었네’라며 두 영역의 연관성을 확실히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9세기의 불국사는 ‘華嚴佛國’이라 불릴 정도로 화엄 사찰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경우 사찰의 主尊은 비로자나불이며, 금당은 자연히 비로자나불의 영역이 된다. 즉, ‘금당=대적·대명광전=비로자나불의 영역’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당시 유행한 雙塔1金堂의 가람배치 및 현전하는 전각의 위치와 크기를 바탕으로 비교해 볼 때 지금의 대웅전이 과거에도 금당의 역할을 했을 것이며, 결국 9세기에는 이곳이 비로자나불의 영역, 즉 ‘연화장세계’가 되는 것이다. 물론 대웅전에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하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찰이라는 것은 창건기의 교리를 그대로 간직한 채 변화 없이 유지되기도 하지만, 각 시대에 번영했던 특정 종파에 순응하며 변천되기도 한다. 필자는 불국사가 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고 보며―종합(창건기), 화엄(9c), 법상(고려), 법화(조선)―각 전각의 역할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고정되어 있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따라서 지금은 ‘대웅전’의 편액을 걸고, ‘대웅전’의 역할을 하고 있을지라도, 과거 두 상이 조성되었을 9세기에도 이와 같은 전각으로 기능했을지는 단언할 수 없으며, 당시 불국사에 확장된 화엄사상을 고려해 보면 오히려 ‘대적광전’, 또는 ‘대명광전’에 무게가 실리게 되는 것이다. 불국사 금동비로자나·아미타여래좌상이 아무리 ‘특수하다’, ‘이례적이다’는 수식어로 함축될지라도 전·후의 상관관계 없이, 아무런 자극 없이 갑자기 출현된 것은 아니다. 또한 ‘불국사’라는 특수한 장소가 홀로 만들어낸 이례적인 결과 또한 아니다. 결국 모든 종교 미술이 그러하듯 당시 신앙의 성격이 반영된 결과물인 셈이다. 특히 두 상은 9세기 화엄의 변화, 즉 ‘실천성의 강조’ 및 ‘미타신앙 포용’의 한 측면을 보여주며, 또한 9세기 부족한 화엄 관계 자료를 보충해주는 시각자료가 된다는 의의가 있다. 어찌되었든 이 글이 불국사 두 불상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ven from the early days, The seated Gilt-Bronze Vairocana & Amitabha Buddha statues of Bulguksa temple(佛國寺) represent Korean Buddha sculpture with the keyword of ‘Bulguksa Temple’, and of ‘Vairocana’. Especially, these two statues are based as one set, with completely two different characters, Vairocana, and Amitbha, which is unprecedented combination. Moreover, matter of Mudra(手印) shares the differences, placing hands oppositely, differentiated from the style of Jiguanin(智拳印) and Amitabhain(阿彌陀印). Therefore, these statues of the Buddha contain the differentiation from other statues built in similar era, which can lead to the outstanding particularity to represent the field of Korean Buddhism Art. So far, the most studies of two statues mainly focused on academic deduction about time of construction; even few studies deal with different matters, but it could not get out the boundary of Bulguksa temple. On the other hand, this article is based on the general fact that religious art represents the characteristic of faith. Ergo, it will discuss the reason of their particularity and find the clues in the circumstances in those days in the omnipresent flow of Silla Buddhism. As the result, three doubts (1) the time the statues were actually built (2) the reason why the statues were in set and (3) location of enshrine will be discussed in this paper, which has not been mentioned in others. The time that statues were actually built is assumed around the mid-9th century. The most of the statues built in 9th century has the physical ratio of long isosceles triangle, exaggeration of facial features, and ZhuagwanIn(左拳印, reverse hand displaying of Jiguanin). However, the focus of this paper lies in the fact that advent of Vairocana, commissioned by the royal family, not merely in the advent of Vairocana image. The characteristic of Shilla(新羅) Buddhism changed in the mid-8th century, in starting point of KyungDuck reign(景德王, 在位 742-765); Huayan thought(華嚴學) moved to the capital and became one of the influential streams of Shilla Buddhism. Despite of this fact, it’s so much later that the Vairocana image, main signature of Huayan, became the visual trends. Even more we can monitor the fact the very first Vairocana statue, commissioned by royal family had been built in hundred years later, a year of 847, at SungJusa Temple(聖住寺). It could be natural consequences, considering the fact that Uisang(義湘), main stream of Huayan thought had certain social position and intimate relationship with the royal family. Because Uisang was the one of Huayan monks, acted as practical believer, who respected and enshrined Amitabha statue, rather than Vairocana statue. Thus, the potential of Amitabha statue enshrined in Huayan Temple was higher till mid-9th century, when his influence was still valid. Not only that, but also the statues of Bulguksa Temple has admirable perfection in material, size, and aesthetic features wise. It is absolutely plausible deduction that sponsor of the statues did invest great amount of time and effort endlessly. From this point we can come up with reasonable guess about the period that statues were complete would be during the reign of KyungMoon(景文王, 在位 861-875), the abundant era. Then next question is why Vairocana were built with Amitabha, together? What does this unique and unusual icon mean? The answer of these two questions lies in the changes of 9th century Huayan, when the two statues were built. At mid-9th century, Huayan of Silla faced the inescapable change, due to the rise of Zen thought(禪思想), the chaos at the end of Silla, and mannerism within religious sect. Especially, the distance between the public made the Huayan monks to come up with more practice manners that the people can perform in daily lives. As the main role of this dynamic change, the two books, 40 Huayan Sutra(『40華嚴經』) and ChengKuan(澄觀, 738-839)'s The Commentary on Huayan Sutra(『華嚴經疏』) were introduced by BumSoo(梵修, ?-?) in 799 and started to extended from Haeinsa Temlpe(海印寺). These two writings are absolutely Huayan related essays, but Interestingly a few passages are totally focused on the advent of Amitabha rather than the praising on the Vairocana. Moreover in The Commentary on Huayan Sutra, ChengKuan perfectly equated the ‘World of the Lotus Sanctuary(蓮華藏世界)’ with ‘Pure Land(極樂世界)', and ‘Vairocana' with ‘Amitabha'. Thereby, these two writings represented the specific practice, suggested by Huayan in 9th century based on the ‘Amitabha Faith(彌陀信仰)', suggesting that ‘you may live in the concern-free and comfortable world without the ounce of agony, through the practice of ‘稱名念佛’’, which can conclude the statues of Bulguksa Temple are the visualized existence of 9th Huayan theory. By the way, the two statues are intended as one set in base of theory, ‘舍那彌陀一切' and ‘華藏極樂一切’. But the current location of enshrine of two statues are remote in Bulguksa Temple. One locates at the main part of temple, ‘Geuknakjeon’(極樂殿) and other one is put in ‘Birojeon’(毘盧殿). Plus, the Vairocana Buddha statue had been moved three times in 20th century. Under the theory of original location of enshrine when the Buddha statue was constructed and current location of enshrine won’t be identical, the writer reconstituted the space of Bulguksa Temple in 9th century. Amitabha Buddha statue has high potential to stay at the Geuknakjeon, even in previous days because this space is located at inside of temple in western direction. Not only that, but also three rows of sixteen layers of stone steps and the pond, flowing across the front part of whole temple intends to represent the Amitabha’s land, the Land of paradise in distant western side. However the writer concludes that location of Vairocana’s enshrinement had been changed; it would be located at the current main sanctuary of the temple, the present Daewongjun. The reason of this deduction lies in the concept of a pair of two statues. The special features of statues, ‘A set’ creates certain expectation to enshrine at same area of temple together, or even they are separated, the monks would consider the area and relationship of the building and choose the area to look like a set with special intention. 「阿彌陀佛像讚幷序」, written by Choi ChiWon(崔致遠, 857-?), mentioned that ‘put the eyes on Huayan to seek for The World of the Lotus Sanctuary with the heart towards the world of Buddha, it will lead to the connection of Paradise of Amitabha’, which definitely indicate the connection of two areas. Furthermore, the temple of Bulguksa in 9th century has strong personality of Huayan temple, even called as the empire of Huayan, ‘HuayanBulguk(華嚴佛國)’. In this case, the main statue is the Variocana Buddha, which naturally lead the main area of the temple for enshrinement of the Variocana statue. We can say ‘main area of the temple=Daejuk·Daemyunggyuangjun(大寂·大明光殿)=the area of the Vairocana Buddha State’. Based on the comparison of location arrangement of double top fashioned first main building(雙塔1金堂), which was the trend in those days, and current temple’s location and size, we can assume that the main sanctuary of the temple would play a role of main temple in past as well; from this deduction, we may guess that the area could be Vairocana's land, The World of the Lotus Sanctuary. Of course, it is not a common sense to enshrine the Vairocana Buddha statue in Daewongjun(大雄殿). Certainly, the Buddhist temple can be maintained based on religious dogma, however, time-to-time it can also embrace the changes based on the prosperous sect for each era. The writer believe that Bulguksa is the case with embracing the changes―Combination(era of foundation), Huayan(9th century), Yogacara(Goryeo Dynasty), Lotus Sutra(Joseon Dynasty); moreover, the role of each building was not set on the stone for ages. So, even the ‘Daewongjun’, the place that has a role and plaque of main sanctuary temple does not necessarily means it would play the same role in 9th century, when the two statues were made. To consider the dynamically extended theory of Huayan in that era, ‘Daejukgwangjun(大寂光殿)’ or ‘Daemyunggwanjun(大明光殿)’ had more value to role as main sanctuary temple. Despite The seated Gilt-Bronze Vairocana & Amitabha Buddha Statues set in Bulguksa Temple has modifiers like ‘singular’, ‘atypical’, this could not be create in this fashion without any reason or religious stimulus. Moreover, it is not the unique result of special location, Bulguksa Temple. Just like other sorts of religious art, it is the result that contains the religious characteristic in that era. Especially, the change of Huayan in 9th century, ‘highlight of activism in Buddhism’ and ‘embracement of Amitabha Faith’ can be noticed in these Buddha statues. This set of statues has great meaning as the visual aids for relationship of Huayan in 9th century, which is not enough remaining in current time. To hope, this article can be the remarkable opportunity to recognize the significant value of two Buddha statues in Bulguksa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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