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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크락(Kraak) 양식 청화백자 연구

Title
조선 후기 크락(Kraak) 양식 청화백자 연구
Other Titles
Study on Kraak-style Blue and White Porcelain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Authors
김기혜
Issue Date
2015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장남원
Abstract
朝鮮時代における芙蓉手様式の染付は周囲を四つに分割し、器面を区画し各面の中には花窓と鉤括弧(「)を、各面の間には丁字形の線文や房文様の瓔珞文を施した磁器を指す。朝鮮時代の19世紀、突如登場したこのような複雑な装飾は、正確な起源が見当たらず、これまで花文、草花文、牡丹文、雲文などと分類してきた。本論文は、朝鮮時代における芙蓉手様式の染付が日本磁器における芙蓉手風の裏文様の影響を受けたことを明らかにし、朝鮮時代における芙蓉手様式の染付に施された銘文、また製作過程や認識などを考察することにより朝鮮時代末期における染付の一面を照明するものである。 芙蓉手様式は、明末清初にアジア及びヨーロッパ一帯に広く輸出された中国芙蓉手から始まったものである。芙蓉手は器の内外面を4~12個に分割し、多層の文様帯を使用し、多様な文様を区画内全体に描き入れる装飾構成を特徴としている。17世紀中期以来、中国における芙蓉手の生産が事実上途絶えた後も、芙蓉手の装飾と構図は輸出された地域で広く愛され、芙蓉手の装飾構成を模した陶磁器が生産された。 特に日本では磁器を生産し始めた17世紀以降、様式的に中国の影響が強く現れた.。18世紀、日本国内向けの生産が主流となった後も、芙蓉手のうち、大皿のような器形はそのまま踏襲され、芙蓉手様式における割文装飾は皿や鉢などに広く用いられた。特に18世紀末~19世紀初の樋口3号窯では清朝磁器を模した新しい様式を取り入れながらも、外面には芙蓉手風の割文を描き入れるなど、多様な様式の構成が流行した。 朝鮮時代後期における芙蓉手様式染付の生産の背景には、このような日本磁器の輸入が影響を与えたと思われる。17~18世紀の日本磁器は倭館や通信使などを通じて公貿易という形式で輸入された。この一部は朝鮮国内において贈答品として使用された記録も確認でき、また寺院の舎利器、また王室における副葬品として使用されており、金彩の磁器のような良質の日本磁器が輸入されて高級品として扱われたことが分かる。18世紀末頃には、日本磁器が私貿易の形式で輸入され、良質のものと共に質の落ちたものも輸入されたことが記録として残っている。 朝鮮時代後期の芙蓉手様式染付は、割文やその間を装飾した文様を基準とし、その遺物の特徴や大きさを分析した。まず芙蓉手様式染付の出土地域、そして伝世遺物のうち、銘文のある磁器を調べた結果、朝鮮王室の好む様式であることが確認できた。その理由として宮闕で多数出土し、「丁未嘉禮時順和宮庫間大中小三竹(뎡미가례시순화궁고간대듕소삼듁)」のような点刻銘や「雲峴」、「大」のような染付銘が記された磁器が伝わっていることを挙げられる。 器形を確認できる出土遺物と伝世遺物を対象として分類した結果、朝鮮時代における芙蓉手様式染付の器種は鉢、皿、盞を確認でき、このうち鉢が圧倒的に多かった。文様は装飾帯の有無によって大きく三つに分類することができ、各類型ごとに割文、装飾文様帯、見込み部分の文様の特徴が明瞭に表れている。。これをもとに、文様と構図を日本磁器と比較した結果、割文装飾と装飾文様帯を含め、見込みの十字花文などにその類似性を確認できた。このような様式上の共通点から、朝鮮時代後期の芙蓉手様式染付が日本磁器からどのような影響を受けたか具体的な検討を試みた。 一方、様式上の特徴を検討する過程において高級器物として扱われる朝鮮芙蓉手様式染付において文様の入れ方、筆致をめぐって良質のものと質の落ちるものが併存していることが分かった。これは当時朝鮮王室の財政状態や官営手工業の解体と関係があるものと思われる。19世紀王室における財政の悪化と制度の変化が重なり、官営手工業が解体されていくなかで、王室の磁器製作所である分院は最後まで官営体制として存続していたものの、その限界は明らかであった。経済的な問題から生き残りを模索するなかで、分院は次第に商業としての性質を強く帯びるようになった。これは分院が市場商人組合と連動しながら最終的に会社へと変わる状況を通じて確認できる。 商業的性格が強まるなか、分院の装飾に対する画青匠の質的完成度を追求する動きは事実上やや落ちたものと思われる。これは磁器の製作過程で一般の貢人まで磁器に絵付を施したという記録を通じて確認でき、これは必然的に絵付の粗質化と文様の解体を引き起きた。この過程において芙蓉手様式染付の割文のような文様要素は、他の磁器にも広く用いられたと思われる。芙蓉手様式の割文、装飾文様帯、見込み部の異なる染付にも確認でき、特に割文内の花窓と鉤括弧文(「)は四面水滴など面を区画した器で広く用いられた。 芙蓉手様式染付は朝鮮王室で好まれただけではなく、多様な器にその文様が施されることによって朝鮮時代染付における普遍的な文様として認識されるようになったと思われる。染付は東大門運動場出土品などから分かるように、植民地期にも使用されたことが確認でき、また朝鮮古蹟図譜にも収録され、朝鮮美術展覧会の絵画部や工芸部出品作の中にも登場している。これをもとに推測した結果、芙蓉手様式染付は朝鮮染付様式の一例として日本人や韓国人に認識されていたと思われる。つまり東アジアの中で一つの文様がどのように広まり、受容され、自国の様式として編入されていくのかを端的に見せる例と言えるであろう。;본고에서 지칭하는 조선 후기 크락양식 청화백자는 큰 패널과 작은 패널이 교차되어 기면을 구획하고 큰 패널 안에는 화창과 꺾쇠무늬를, 작은 패널 안에는 丁字形 線文 또는 술 모양의 瓔珞文을 장식한 것을 지칭한다. 이러한 복합적인 패널장식은 국내에서는 19세기 경 갑작스럽게 등장했는데, 정확한 연원을 밝히지 못해 기존에 화문·초화문·모란문·운문 등으로 분류되어왔다. 본 논문은 조선 크락양식 청화백자가 일본 크락양식 백자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 크락양식 청화백자에 장식된 명문 및 제작과정·인식 등을 고찰함으로써 조선 후기 청화백자의 일면을 밝히고자 한다. ‘크락양식(Kraak-style)’은 명말청초 아시아 및 유럽 일대에 광범위하게 수출된 중국 크락자기에서 기원한 것이다. 크락자기는 기물 안팎의 측사면을 여러개의 패널로 구획하고, 다층적인 문양대를 사용하며, 복합적인 문양을 빽빽하게 시문하는 장식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17세기 중엽 이후 중국에서 크락자기의 생산이 사실상 종료된 후에도, 크락자기의 장식과 구도는 이를 수입했던 지역에서 널리 애호되었으며 크락자기의 장식 구성을 모방한 자기가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다. 특히 일본은 경질 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한 17세기 이래 양식적으로 중국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18세기 내수시장시기로 전환된 후에도 크락자기 중 대형 반과 같은 기형은 그대로 방제되었으며,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크락양식의 패널장식이 접시 또는 발의 외면에 폭넓게 장식되었다. 특히 18세기 말~19세기 초 히구치 3호요 등의 가마에서는 동시기 청조 자기를 모방한 새로운 장식을 도입하는 한편, 외면에는 명말청초의 수출자기였던 크락자기와 같은 패널장식을 시문하는 등 다양한 양식 조합이 성행하였다. 조선 후기 크락양식 청화백자의 생산은 이와 같은 일본 자기의 유입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7~18세기 일본 자기는 왜관 및 통신사 등을 통해 공무역의 형식으로 유입되었다. 이 중 일부는 국내에서도 선물로 주고받은 정황이 확인되며 사찰의 사리기나 왕실의 부장품으로 사용되어, 금채자기와 같은 양질의 일본자기가 유입되었으며 고급 기명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말에는 일본자기가 공무역·사무역 외에도 밀무역의 형식으로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으며, 기록을 통해 양질자기 외에도 조질자기가 함께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조선 후기 크락양식 청화백자의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큰 패널과 작은 패널을 교대로 배치한 패널장식을 분류 기준으로 삼아 대상 유물의 특징 및 유형을 분석하였다. 먼저 크락양식 청화백자의 출토지역 및 전세유물 중 명문자기를 살펴본 결과 조선 왕실에서 애호된 양식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크락양식 청화백자는 궁궐지역 일대에서 다수 출토되었으며, ‘뎡미가례시순화궁고간대듕소삼듁’과 같은 점각명이나 ‘雲峴’ ·‘大’와 같은 청화명이 시문된 자기가 전세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형을 확인할 수 있는 출토유물과 전세유물을 대상으로 분류한 결과, 조선 크락양식 청화백자의 기종은 발, 접시, 잔으로 확인되었으며 이 중 발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문양은 장식문양대의 유무에 따라 크게 세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각 유형별로 패널장식·장식문양대·내저문양의 특징이 뚜렷하게 확인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 크락양식 청화백자의 문양과 구도를 일본 자기와 비교한 결과 패널장식과 장식문양대롤 포함, 내저면의 십자화문 등에서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양식적 공통점을 통해 조선 후기 크락양식 청화백자가 일본 자기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였다. 한편 점각명 크락양식 청화백자 등과 비교하면, ‘雲峴’ 등 청화명이 시문된 크락양식 청화백자조차 기형의 유려함이나 문양의 세밀함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조선 왕실의 재정상태 및 관영수공업의 해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9세기 왕실의 재정적 어려움과 제도적 변화와 맞물려 관영수공업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분원은 마지막까지 관영 체제로 존속하였으나 그 한계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분원은 점차 수공업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상업적인 특성이 강화되었다. 이는 분원이 시장상인조합과 함께 움직이며, 끝내 회사로 전환되는 상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상업성이 강화되면서 사실상 분원에서 화청의 문제와 같은 시문에 대한 질적 추구는 상대적으로 감소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자기 제작 과정에서 일반 공인까지 화청에 나서는 모습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결국 필연적으로 시문양상의 조질화와 문양의 해체를 야기시켰다. 이 과정에서 크락양식 청화백자의 패널장식과 같은 문양 요소가 다른 자기에도 공유된 것으로 생각된다. 크락양식의 패널장식·장식문양대·내저문양이 다른 청화백자에서도 확인되며, 특히 패널장식 內 화창과 꺾쇠무늬는 사각연적 등 기면이 구획된 기물에서 널리 애용되었다. 크락양식 청화백자는 조선 왕실에서 애호되었을 뿐 아니라, 문양의 해체·공유 현상을 통해 여러 기물에 시문됨으로써 조선 청화백자의 보편적인 문양으로 인식된 것으로 생각된다. 크락양식 청화백자는 동대문 운동장 출토품 등으로 미루어 일제강점기에도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며,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되었고 조선미전의 회화부 및 공예부 출품작에서도 그려졌다. 이를 바탕으로 추론한 결과, 크락양식 청화백자는 조선 후기 청화백자 양식의 한 예로서 일본인 및 자국민들에게 인식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동아시아 속에서 문양이 어떤 식으로 전파되고 수용되며 자국의 양식으로 편입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trace the significance of an influence from Japan that has effected the kraak-style blue and white porcelain during the Joseon dynasty, and with an explanation on the process of decoration made in this porcelain will allow to understand an aspect of the blue and white ware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Kraak-style is when two panels, big and small, cross and decorate with lines and pearl tassels. This motif has been introduced in Joseon during the 19th century, however it was classified as flowers like peony due to lack of information of its origin. Kraak-style originated from the export wares of China in Europe and other Asia during the late Ming and early Qing dynasty. It consists different panels with diverse yet multiple designs. Even though the style has been ceased in the mid 17th century in China, its mode were constantly consumed among those who have enamored the formation. Japan in particular since the 17th century was strongly influenced by China in style. Later in the 18th century when it switched to domestic, kraak-style wares were cropped and widely decorated on dishes and bowls. Especially during the late 18th century and early 19th century, kilns like Higuchi No.3, adopted Qing wares latest designs but at the same time drew kraak-style on the surface, combining the two together. It seems the background of the production in kraak-style blue and white wares of the late Joseon dynasty relate to a flow of Japanese ware in Korea. Japanese porcelain were introduced during 17~18th century through commercial bureau among public trade. Parts of them were verified as exchanged gifts between the two countries, where in Korea used as sarira reliquaries or burial wares. At the same time considered valuable like gold decorated porcelains. During the late 18th century, private trade played a key role among nations and records show trace of imported poor quality porcelains in Joseon. The kraak-style blue and white porcelain of the late Joseon dynasty are analysed in standard of small and big panels crossed. First after careful examination of the inscribed porcelains found in sites and relics, it showed a definite devotion from the royal family of Joseon to the kraak-style. They were found in different sites of palaces, or inscribed relics related to royal wares for example ‘Dyeong-mi-ga-rye-si Sun-hwa-gung Go-gan Dae-dyung-so Sam-dyuk(뎡미가례시순화궁고간대듕소삼듁)' in korean or ‘Unhyun(雲峴)’·‘Dae(大)’in chinese characters. Forms made in within are bowls, plates and cups and overwhelmingly bowls outnumber all. Patterns can be categorized into three and distinctive characteristic has been found. One in the panel, another in the deck and last in its inner circle. Based on the decoration, a comparison was made with Japanese wares and as a result, similarities in panels, deck and cross flower pattern were found. This allowed to concretely point out the influence from Japan. Meanwhile, in the process of understanding different features of style, a co-existence in quality happen in kraak-style blue and white porcelain of the Joseon dynasty. This may be a result of a break up in the governmental manual industry and a fall of the royal financial affairs. Of course the last royal kiln Bunwon maintained its status until the 19th century despite all the short comes, yet there still limitations were drawn in the process of production. In finding a breakthrough for the economic difficulties, Bunwon found its path through private industries where they go commercial. Soon they convert to becoming a company and move along with the market association. Since the commercial aspect intensified, apparently chase of quality or need for blue and white decorations decrease in demand. This can be found in forms of production leading to official approval, necessarily lowering quality and dissolving patterns. Kraak-style were used in other wares to decorate. Panels, deck and inner circle designs can be found in other blue and white porcelains. Kraak-style blue and white wares were not only cherished by the royal family but in the progress of dissolve in pattern and going public, it becomes universally used. These porcelains were also found in Dongdaemun stadium sites, where considered used during Japanese colonial era. As a result, kraak-style blue and white porcelain were recognized as a fashion in Joseon to people in the country and in Japan. This phenomenon clearly shows how a pattern can be propagated and accepted in 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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