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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黃玹, 1855-1910)의 동학에 대한 인식과 비판

Title
황현(黃玹, 1855-1910)의 동학에 대한 인식과 비판
Authors
유지연
Issue Date
2004
Department/Major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
Abstract
이 논문은 황현(黃玹, 1855-1910)의 『오하기문(梧下記文)』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전통 유학자의 동학에 대한 인식과 비판을 살펴본 것이다. 황현의 기록을 중심으로 기존 유교 질서와 동학이 어떤 점에서 대립했으며, 황현이 동학을 어떻게 인식하고, 또 어떠한 근거에서 비판했는지 분석해보았다. 그리고 동학에 대한 황현의 대응방안의 내용을 검토해 보고, 19세기 조선의 정치사회적 상황 속에서 동학의 창도와 확산이 가지는 의미와 관련하여 평가해보았다. 19세기의 조선사회는 서양의 침략 위협, 극심한 자연재해, 전염병의 창궐, 각종 폭동의 빈발 등과 정치권력 자체의 부패가 맞물리면서 정치체제가 그 기능성을 상실했다. 이로 인하여 조선조의 지배 질서와 이념이 붕괴되고 있었으나 이에 대체할 만한 새로운 이념이나 신념체계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듯 내외적 위기로 혼란했던 조선사회를 배경으로 1860년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동학을 창도했다. 몰락양반이었던 최제우는 천주교의 천주 개념을 수용하여 유일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동학을 통해 현실의 고통과 서양의 위협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최제우는 동학을 창도하고, 포교를 시작한지 3년 만에 체포되어 그 이듬해(1864) 처형되었다. 그리고 동학은 이후에도 계속 조선 정부에 의해 철저히 금지되었다. 동학교도들은 동학을 믿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고문을 받았으며, 심지어 처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사회에서 모든 이단 종교들이 동학처럼 심한 탄압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무교, 불교, 도교 등은 이단으로 비난받았지만 조정은 이 종교들에 대한 믿음과 의식을 포기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개인이 마음속으로 무엇을 믿는지에 관해서 조선 정부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 정부는 국가의 정치적 권위나 유교 질서의 핵심적인 의식과 윤리가 도전받을 경우에만 이단 종교들의 믿음에 간섭하였다. 따라서 동학에 대한 조정의 가혹한 탄압과 조선 유학자들의 격렬한 비판은 동학이 기존 질서와 가치관에 도전하고, 국가 지배에서의 일탈을 주장하거나 혹은 주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동학이 용인될 수 없는 이단이었던 이유를 전통적 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황현의 동학에 대한 인식과 비판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황현이 동학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째, 동학이 유교의 덕목을 실천하는데 필요 없는 신을 믿고 국가에서 허락하지 않은 종교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황현은 동학도들이 부모처럼 공경하고 충성을 다해야 할 대상에 군주와 함께 한울님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동학이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집단이라는 명확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동학은 기존 사회와 구별되는 대안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절대적 복종심을 약화시켰다. 더구나 이 공동체 안에서 동학교도들이 유교의 신분질서를 무시하고, 남녀의 구별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 황현은 공분을 표시했다. 둘째, 황현이 비판하였던 점은 동학이 부적이나 주문, 그리고 먹을 것을 이용해서 어리석고 빈곤한 농민들을 동학에 입교하게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황현은 비판할 가치도 없는 이단 종교, 동학이 널리 확산되는 이유가 당장의 이익을 얻게 해준다는 말로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황현이 당장의 이익을 좇아 동학에 들어간다고 한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입교하는 이유를 잘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동학에 입교한 하층민들이 동학을 통해 새로운 사회에 향한 눈앞의 희망을 얻고 기존의 가치관, 질서와 단절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동학이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정치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원천이었다. 황현이 세 번째로 비판한 것은 동학이 반란을 도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내외적 요인으로 정치체제가 그 기능성을 상실한 상황에서 최제우는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유교 윤리를 통해서는 다시 조화로운 질서로 되돌아 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빈곤한 농민들에게 바로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새 세상을 약속했다. 오직 동학에 입교하여 신을 정성스럽게 믿음으로써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도래하는 새 세상의 모든 행복을 향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던 것이다. 황현이 기록했듯이 많은 농민들은 왜 난리가 일어나지 않느냐며 탄식하고 있었다. 또 장래 동학의 세상이 되는데 그 세상에서는 동학교도만이 태평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황현은 새 세상에 대한 동학의 주장을 헛된 예언이라고 일축하고 자신은 유학자로서 그러한 예언을 결코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피지배층이 그러한 예언을 믿고 동학에 죽음을 무릅쓰고 입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황현은 동학이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킬 집단이라고 비난했고, 동학도들을 철저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처벌 이외에 황현이 동학에 대한 대응책으로 주장했던 것은 향약과 정표정책(旌表政策)의 시행, 탐관오리의 처벌과 부세제도 개선, 위정자들의 수신 등이었다. 황현은 유교 윤리를 통해 피지배층을 통제하고 폐단을 시정한다면 전통적인 유교 질서는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듯 황현이 동학에 대응하여 여전히 유교를 유효한 대안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당면한 조선의 정치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동학이 유교보다 나은 대안이라는 증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학의 창도 및 확산을 기존의 전통이 이미 조락하고 있다는 표식이었다. 요컨대 동학의 광범위한 확산은 기존 신념체계와 정치가 유효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고, 동학에는 조선 사회의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집단적 열망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황현은 동학의 창도와 확산을 통해 드러났던 그러한 변화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는 유연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외부의 압력과 내부적 동요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전통적인 유교 질서에 입각한 정치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황현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황현은 조선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조적이고 실질적인 노력도, 대안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에 대한 모색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의 지배층이었던 대부분의 전통 유학자들에게서 19세기 조선의 위기를 극복할 만한 대안이 제시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The study is designed to review the perspectives of the traditional Confucian scholar to Donghak, focusing on Oh-Ha-Ki-Mun(梧下記文) written by Hwang Hyun, and to explore the grounds on which he criticized Donghak based. In this study, the characteristics of Donghak are analyzed based upon the documentary records made by Hwang Hyun, and it is reviewed that how its The study is designed to review the perspectives of the traditional Confucian scholar to Donghak, focusing on Oh-Ha-Ki-Mun(梧下記文) written by Hwang Hyun, and to explore the grounds on which he criticized Donghak based. In this study, the characteristics of Donghak are analyzed based upon the documentary records made by Hwang Hyun, and it is reviewed that how its fundamentals are opposed to the existing Confucian discipline and viewpoint in what aspects. And how Hwang Hyun responded to Donghak was reassessed and his reactions were evaluated in relation to the implication of the establishment and expansion of Donghak under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in the Chosun Dynasty of the 19th century. The paper addresses that the reason why Hwang Hyun regarded Donghak as the unpardonable heterodoxy is observed from three points of view. First, he pointed out that Donghak believed in a god, who was unnecessary for putting the Confucian virtues into practice, and formed the religious community that was not authorized by the nation. Hwang Hyun thought that the fact that the members of Donghak venerated and showed loyalty to the god, Haneullim (Lord of Heaven), along with the King is a clear evidence to show Donghak does not have allegiance to the King. Besides, it made absolute obedience to the Dynasty weak by forming an alternative community differentiated from the existing society. Furthermore, with this community the Donghak believers ignored the Confucian social status and the discrimination between man and woman. These raise his public indignation over Donghak. The second criticism Hwang Hyun made is that Donghak got the poor and ignorant farmers decoyed to enter Donghak using a charm, spell and food. Hwang Hyun believed that the reason Donghak, heterogeneous religion, beneath criticism is widely spread is because they deceived people saying that Donghak would bring them an immediate fortune. Yet, what is important is that the unwashed entering Donghak due to such an immediate benefit came to have a vision for a new society and escape from the existing viewpoint and social hierarchy through Donghak. Third, Hwang Hyun criticized about its possibility to give rise to political riots. In a situation where the national political system was deprived of its governing function in the midst of domestic and overseas agitations, Choe Je-U (1824-1864) criticized such reality through his own new ideology, and asserted that our nation would fail to go back to the normal track with a harmonious state through the Confucian ethics. And he promised the poor farmers a new world, which can be created here at this moment. He gave the belief that people can escape from the current crisis and enjoy all the happiness of the new world upcoming by entering Donghak and sincerely venerating their god. As what Hwang Hyun recorded, numerous farmers were grumbling about why an uprising broke out yet. And there was a widely spread belief that the new world of Donghak would be coming in the corner, where only the Donghak believers would lead a peaceful and happy life. Hwang Hyun spurned such Donghak's advocate for a new world as a futile prediction, saying that he, as a Confucian never believes in such a prediction. However, the problem lied in the fact that the numerous people of the lower classes came to believe that prophecy and dared to die to enter Donghak. Hence, Hwang Hyun criticized Donghak by commenting that Donghak is a group of people instigating people being dissatisfied to violence, and insisted that such Donghak believers should be sternly prosecuted. The countermeasures Hwang Hyun proposed other than punishment were Hyang-yak (local community autonomous covenant), Jung-pyo policy (policy revealing virtue to the world), punishment of corrupt officials and reform ofthe taxation system, and moral practice of the politicians. He believed that the traditional Confucian system can be preserved if the Confucian ethics exercises control over the lower classes and puts down abuses. The reason Hwang Hyun adhered to Confucianism as an effective alternative over Donghak is because he couldn't find any evidence that Donghak is superior to Confucianism to take effect in the impending political, social crisis of the Chosun Dynasty. However, the creation and expansion of Donghak indicate that the existing tradition was already withered. So to speak, the widely spread Donghak philosophy surely shows that the traditional belief and political system were no longer efficacious, and it reflects the collective desire of the unwashed who were the absolute majority of the Chosun society in numbers. However, Hwang Hyun does not show the flexibility properly responding to such a desire for social changes revealed by the development and expansion of Donghak. He did not show his affliction whether politics based on the traditional Confucian discipline could be possible in the 19th century reaching to the peak of external pressure and internal disturbance. Even, Hwang Hyun did not try to find a new ideology becoming a resolution to problems the Chosun society encountered. And, this shows that the most of Confucian scholars, the ruling class of the Chosun Dynasty, could not be proposed with an alternative to overcome the crisis the Dynasty of the 19th century fac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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