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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古墳出土 金屬工藝品에 관한 硏究

Title
樂浪古墳出土 金屬工藝品에 관한 硏究
Authors
최국희
Issue Date
2003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김홍남
Abstract
樂浪은 기원전 108년에 前漢의 武帝가 古朝鮮을 멸하고, 한반도 서북부에 설치한 한의 군현으로서, 313년에 高句麗에 병합될 때까지 약 420 년간 존속하였다. 낙랑 관련유적은 현재 平壤일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인 1909년에 최초로 발굴조사된 이래로 樂浪土城을 포함한 6개의 城址와 그 주변으로 散在되어 있는 약 2000여 기의 고분들이 조사 연구되었다. 이들 고분군에서는 화려한 金屬工藝品뿐만 아니라 漆器, 土器, 구슬류 등의 다양한 부장유물이 출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널리 알려지거나 활발하게 논의된 적이 별로 없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石巖里9호분출토 裝身具, 馬具, 金屬器皿 및 銅鏡 등을 중심으로 한 낙랑의 金屬工藝品의 성격에 관하여 논하고자 하였다. 이들을 문헌기록과 동시기 中國의 한대 고분과 낙랑고분 출토유물과의 비교검토를 통하여, 용도와 기원, 특징, 제작 및 유입과정 등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또한 이들을 토대로 석암리9호분의 묘주의 성격과 조성시기를 고찰하고, 동시기 한반도 중남부에 공존한 三韓고분 출토품과의 영향관계도 살펴보았다. 우선, 석암리9호분의 장신구로는 낙랑의 금속공예품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金製鏤金細工龍紋帶鉤를 비롯하여 은반지, 금동제곡봉형대구, 구슬제 패옥 등이 출토되었다. 금제대구는 본래 중국의 북쪽지방에 거주한 이민족으로부터 연원한 것이나 중국내지에서도 제작하게 되었고, 漢代에 이르러 匈奴와의 관계개선을 위한 일종의 유화정책으로서, 그들에게 사여한 품목 중에 하나였다. 게다가 석암리9호분과 동일한 예가 한대 변방지역인 新疆省 焉耆 등지에서 발견된 바 있어, 석암리9호분의 대구는 한대 中原지역에서 제작되어, 낙랑의 고관에게 특별히 사여한 하사품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석암리9호분에서는 재갈(비), 馬面, 杏葉, 銅鐸 등의 적지 않은 마구가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 마면은 동일한 예를 중국의 한대 고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나, 한대 중원지역에서 前漢中期 이후부터 성행한 銅器의 無紋樣의 영향하에 다소 변형되었지만, 그 원형을 이전에 유행한 圭形 마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석암리9호분의 행엽은 새와 天馬(神馬)의 형상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前代 낙랑과 동일한 시기에 漢郡縣이 설치되면서, 한의 영토 일부로 편입되었던 雲南省이나 廣西省 등지의 고위층 무덤에서 출토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석암리9호분의 행엽도 금제대구와 같이 하사품의 일종으로서 중원의 왕실에서 사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석암리9호분에서는 銅製博山香, 銅釜, 銅樽, 銅형, 銅鼎, 銅壺, 銅鍾, 銅洗 등의 다양한 漢式 청동용기가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 좌대가 거북이와 봉황이 어우러져 있는 형상으로 장식된 博山香爐는 유사유물이 陝西省 西安과 山西省 및 內蒙古 등지에서 발견된 바 있다. 특히, 이들 박산향로는 캐나다 로얄온타리오 박물관 소장의 기원전 28년명 봉황등잔과 형태상으로 유사하여, 등잔에 새겨져 있는 명문을 통해 석암리9호분의 박산향로도 한대 중원에서 제작된 후에 전해졌던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석암리9호분의 銅樽과 鎭子는 유사유물의 출토지와 기형과 문양 및 제작기법상의 특징으로 보았을 때, 廣東ㆍ廣西省 등지의 華南지방과의 강한 친연성이 간취된다. 이밖에, 석암리9호분에서 파손된 채 발견된 2점의 8년명(居攝3年) 칠제금동구과반은 기명에 새겨져 있는 명문을 통해, 한대 왕실전용 공방이었던 四川省 成都의 蜀郡西工官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별히, 동일한 공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北京故宮博物院 소장의 45년명 金銅樽에 부속된 승선하단에 달린 熊形足과 석암리9호분의 칠기 床에 부착된 것으로 보이는 웅형족이 재질, 형태, 제작기법상 서로 유사하여, 이것도 역시 촉군서공관에서 만들어졌다고 유추해볼 수 있었다. 이렇듯 석암리9호분출토 금속공예품은 동일한 예를 낙랑고분군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대부분 중국내지의 한묘 출토품과 유사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한에서 제작된 이후에 낙랑으로 전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금속공예품은 한대 중원의 왕실에서 사여한 하사품 또는 한과 낙랑간에 빈번하게 이루어진 왕래와 교역을 통해 유입된 수입품이었을 것으로, 遼東지방을 경유하는 육로와 중국의 山東반도 연안과 한반도의 서남해 연안을 잇는 해로의 두 가지 루트를 통해서 유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석암리9호분 금속공예품은 제작시기에 있어서 박산향로와 기년명 칠기와 같이 前漢末에서 新代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하는 것과 後漢初期부터 중기이후까지 크게 유행한 連弧紋鏡과 후한대 양식을 보이는 동준 등도 함께 공반되고 있다. 따라서 석암리9호분의 조성시기는 1세기 초반의 후한초기로 상정할 수 있었다. 또한, 고분의 규모뿐만 아니라 고급의 한식유물이 주로 부장된 정황으로 보았을 때, 석암리9호분의 묘주는 낙랑사회에서 고급관료에 속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석암리9호분의 금속공예품과 삼한고분군 출토품과의 비교에 있어서, 석암리9호분 출토품과 유사한 예들이 삼한에서도 발견되기는 한다. 하지만 재질과 형태에 있어서는 거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1세기대에 조성된 석암리9호분과 2세기 중후반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한식문물이 유입되었던 삼한과의 문화적인 시차가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낙랑에서부터 삼한으로 유입된 한식문물의 성격이 석암리9호분과 같은 낙랑의 고위계층이 향유했던 것이 아니라 낙랑의 하위계층에서 변용되어 전래되었던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In 108 B.C., after the fall of the Old Joseon(古朝鮮) dynasty, Emperor Wudi(武帝) of the Han Dynasty(漢, 206 B.C. - A.D. 220) established the Nangnang(樂浪) Commandery in the northwest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The Nangnang Commandery survived for more than 420 years until it was absorbed into the Goguryeo(高句麗) dynasty in 313 A.D. To date, there have been six forts including the Nangnang Castle(樂浪土城)and 2,000 tombs found in the North Korean capital of Pyeongyang(平壤). Various artifacts - metal works, jade ornaments, lacquer, earthenware originating from the Nangnang region have been excavated from the tombs. However, only a handful of these artifacts have been researched and discussed until now. In this thesis, I have extensively researched the metal works of Nangnang: Seogam-ri tomb No.9 ornaments, horse harnesses, bronze vessels and bronze mirrors. The belt buckle with dragons and the harness ornament with bird and winged horse excavated from Seogam-ri tomb No.9: The belt buckle and harness ornament were originally worn by nomads roaming the Northern frontier of the Han Dynasty. As cultural exchanges and trade between China and the northern tribes like Xiongnu(匈奴) increased, the Han absorbed some of the northern tribes' dress and culture. Although the belt buckles were originally worn by the nomads, Han artisans soon began making the buckles and harnesses as gifts. According to ancient Chinese texts, a belt buckle is one of the presents given to appease the Xiongnu, who often invaded northern China. Furthermore, the Xiongnu ordered talented Chinese artisans to make belt buckles during Spring and Autumn and Warring States period(春秋戰國). Belt buckles and harness ornaments similar to those from Nangnang have been found in Yunnan province(雲南省) and Guangxi province(廣西省) which were subjugated by the Han dynasty at the same time. The belt buckles and harness ornaments were probably given as Imperial gifts to people living in Nangnang, Yunnan province and Guangxi province when the Han dynasty established commanderies there. Therefore, the belt buckle with dragons and the harness ornament with bird and winged horse excavated from Seogam-ri tomb No.9 were likely made by Royal Emperor's workshop during the Han dynasty and given as Imperial gifts to high-ranking officials who lived in Nangnang. Moreover, belt buckles similar to those found in Seogam-ri tomb No.9 have been found in the western Chinese province of Xinjiang (新疆省), which was conquered by the Han. Boshanlu(博山香爐) with bird and turtle: One of the Seogam-ri tomb No.9 bronze vessels, is shaped like a phoenix lamp made by the Royal Emperor's workshop for the bureaucracy in B.C. 28. The phoenix lamp is currently housed in the Canada Royal Ontario museum. Also, we can deduce through the two lacquer fruit platter from the same tomb and bronze container with pedestal made in B.C. 45 and currently located in the Palace Museum of Beijing(北京故宮博物院), the lacquer table with gilt bronze bear-shaped legs of Seogam-ri tomb No.9 was produced by the Western workshop of Shu commander(蜀郡西工官) of Sichuan province(四川省). The bronze wine container and gilt bronze beast-shaped weights of Seogam-ri tomb No.9 is very similar to works found in Guangxi province. We could tell from its shape, patterns and techniques that it is closely related to artifacts found in the region south of the Yangzi River(楊子江) We could not find same metal works excavated from Seogam-ri tomb No.9 in all the tombs in Nangnang. However, the Seogam-ri tomb No.9 metal works are similar to those found in tombs from the Han dynasty. Therefore, the metal works were produced by the Han dynasty and delivered to Nangnang, not produced in Nangnang itself. The metal works from Seogam-ri tomb No.9 arrived in Nangnang by two ways. One is they were made by the Royal Emperor's workshop of the Han dynasty and presented as a kind of Imperial gift for the main Seogam-ri tomb No.9. The other way was to import the metal works into Nangang through trade between Han and Nangnang. Archaeologist hypothesize that Seogram-ri tomb No.9 in Nangnang was used to bury high ranking officials due to the quantity of artifacts found in the tomb. We estimate that the metal works from Seogam-ri tomb No. 9, especially the bronze wine container and bronze mirror, were made in the early first century, during the late Han dynasty(後漢). Metal works have found in the Samhan(三韓) period, located in the central-south portion of Korean peninsula at the same time as Nangnang have exhibited some similarities with those from Seogam-ri tomb No. 9. But the metal works were not similar in shape and quality. Although both the Nangnang and Samhan absorbed culture from the Han, the Nangnang had accepted more cultural developments from the Han than the Sam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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