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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조선인 여자근로정신대에 관한 실태연구

Title
일제말기 조선인 여자근로정신대에 관한 실태연구
Other Titles
(A) Study on the Korean Joshikinroteishintai in the late Japanese Colonization
Authors
여순주
Issue Date
1993
Department/Major
대학원 여성학과
Keywords
일제말기조선인여자근로정신대여성학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조순경
Abstract
This study is about Korean women forcibly taken to Japan as Women's Volunteer Corps. Some investigation on Korean Men drafted as soldiers or as laborers during the late Japanese colonial period has been known for 48 years of Independence. The object of this study is to reveal that Korean women were mobilized as members of Women's Volunteer Corps by government arrangement which is a kind of forcible displacement of Koreans. This study is based on the document survey and case study of 31 women who reported to Korean Council for the Women Drafted for Sexual Slavery by Japan. Documents are newspapers published in those days and researches about the forcible displacement of Koreans. The interviews with 31 cases were made in their houses or coffee-shop near their house from the end of 1992 to Feb. in 1993. After the 1930's Japanese wanted to solve their own problems through the invasion war and the war industrialization. So the Japanese Facist, proclaiming the National General Mobilization Law and the Labor(National) Mobilization plan, tried to secure the means of production and work force in order to continue the invasion war. They compensated the shortage of labor with various kinds of drafting system. Japanese maiden girls began to be organized as Women's Volunteer Corps from Oct. in 1943. At first the organization were made Voluntarily with the hep of sikuchouson(市區町村), chounaikai(町內會), and women's organization, but after Mar. in 1944 forcible recruitment began. After the announcement of Women's Volunteer Labor Ordinance women listed int eh national register were ordered to work by the warrant of teishinkinro(挻身動勞). They mainly worked at war industries. The labor mobilization in Korea in the 1930's is as follows. The government officials arranged South Korean labourers to be engaged in building or mining in North Korea. At the late 1930's labor mobilization policy was turned into compulsory one because of the shortage of labor by drain of relative over-population in spite of vast demand from war industrialization. For the forcible displacement, the Nation General Mobilization Law took effect in Korea. After 1939, the forcible displacement of Koreans was carried out in Korea, Japan and other Japanese colonies. The forcible displacement of Koreans to Japan was carried out in the forms of the recruitment, the government arrangement and the draft. Among these three kinds of labor mobilization, the greatest number of people were mobilized by the government arrangement. All of three forms were forcible displacement becau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was deeply involved in them. In Japan drafted Koreans were engaged in coal-mining, constructing and war factories, suffering the deadly forced labor with extremely low salary. The Japanese recruited Korean women as factory workers from the earliest day. In the lat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y mobilized unmarried women as Women's Volunteer Corps were advertised extensively as an example of naisengittai(內鮮一切) to get much more Volunteer in Korea and to arouse the chauvinism in Japan. According to the interviews they began to be taken from 1941, but most of them were drafted after 1944. They were sent to Hujikosi airplane factory in Toyama Prefecture, Misubishi airplane factory in Nagoya Prefecture and Numazu textile factory in Sizuoka Prefecture. Most of them graduated from the elementary school. When they were mobilized they were in their mid-teens and lived in big cities in South Korea-Kyungsung, Inchon, Kwangjoo and Jinjoo. Because almost all of them were students, they were organized by the school. 20 cases out of 31 Volunteered because they believed the cajolery that they could earn money and study in Japan. The rest of the case (11 person) were forcibly taken. Some of them were chosen through lottery or teachers wrote down students' names in the list to compensate the number allotted to each school by the authority. There were cases who received the notice through the head of the village. In this case the notice might not be official one based on the Ordinance but it seems that the notice was made in the lowest echelon of the authorities. After taken to Japan Women's Volunteer Corps lived in their own dormitory in which masters were women except for the headmaster. They were organized in military style, such as platoon, company and so on. The headmaster appointed platoon leaders and company leaders among the draftees. They were scheduled to call the roll twich a day-in the morning and in the evening. At the factory they worked with lathes and painted under the strict surveillance of the foremen. They had many accidents - fingers were cut off, some even died at work - as thery were unskilled. The meals were very small and pickled radish was the only side dish due to the poor food supply. So hunger and hand work under the strict surveillance they suffered beriberi and typhoid. And the earthquake killed six draftees in Misubishi factory in Nagoya Prefecture. Furthermore, during the end of the war they rushed about madly to find a shelter from the successive air raids. They lived miserably and Japanese put their wages aside and never returned even after the end of World War Ⅱ. Korean Women's Volunteer Corps were arranged by the government with the help of the school. Even the Women's Volunteer Labor Ordinance was announced not only in Japan buy also in Korea, there were very few qualified women to Ordinance which applied to only skilled women workers in national register. Therefore, in Korea women were mobilized by the government arrangement even after the announcement of the Ordinance. It was related that the forcible displacement of Korean men home and abroad was carried out mostly by government arrangemen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ppreciate Korean Women Works Corps in history by revealing women's experience during the lat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study has some limits in restoring the realities of Korean Women's Volunteer Corps using poor document and about 50-years-ago memories of the cases. To discover the documents directly related to Women's Volunteer Corps and to survey the school register are needed. Also the study about the mobilization as Women's Volunteer Corps in Korea and in Manchuria, another Japanese colony at that time, is needed.;이글은 일제 말기 조선에서 일본으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 여자근로정신대에 관한 실태연구이다. 일제 말기 조선인 남성들에 대한 병력과 노동력 강제 동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연구가 이루어져 왔으나 여성에 대한 노동력 동원에 관한 것은 해방이후 은폐되어오다가 최근에야 실상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이글에서는 남성에 비하여 소수이지만 여성에 대한 노동력 동원은 여자근로정신대의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형식적으로는 관알선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동원이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연구 방법으로는 문헌 연구와 사례 조사를 병행했다. 문헌으로는 당시 신문과 노동력 동원에 관계된 자료들과 기존 연구를 보았고 사례 조사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로 신고한 여성들 중에서 일본으로 동원된 여성으로 제한하였다. 사례 수는 면담에 응한 31명이다. 면담은 1992년 말부터 1993년 2월까지 사례의 집이나 집 근처 다방에서 이루어졌다. 일제는 1930년대 이후 자국의 모순을 침략 전쟁과 이를 위한 군수 공업화로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국가총동원법, 노무(국민)동원계획 등을 발표하여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국가가 확보하여 전쟁을 강행해나가려고 하였다. 태평양전쟁까지 계속되는 전쟁으로 생긴 노동력 부족을 근로보국대, 징용 등 여러 형식으로 보충하였다. 일본 여성에 대해서는 가족제도의 보호를 이유로 1943년 10월부터 주로 미혼 여성을 여자근로정신대 형식으로 동원하였다. 처음에는 시정촌장(市町村長), 정내회, 부인 단체 등의 협력을 통해 자주적으로 여자근로정신대를 결성하여 출동하였으나 1944년 3월 이후 강제 동원이 시작되었으며 1944년 8월 「여자정신근로령」의 시행후에는 국민 등록을 한 여성에 대해 정신근로영서를 통지하여 출동을 명령하였다. 출동한 산업은 기계, 항공기, 군작업청 등 군수 회사가 압도적이었다. 조선에서 1930년대 노동력 동원은 다음과 같다. 1930년대 초반에는 관알선의 방식으로 남부 조선의 원동력을 북부 조선의 토건업과 광산업에 동원하였다. 1930년대 후반에는 상대적 과잉 인구의 고갈과 군수 공업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때문에 국가총동원법이 조선에도 적용되어 강제 동원이 시행되었다. 1939년 이후 조선인 남성들은 모집, 관알선, 징용이라는 세 가지 형식으로 일본으로 동원되었으며, 특히 관알선에 의해 가장 많은 수가 동원되었다. 또한 이러한 동원은 형식은 다르다 할지라도 모두 조선총독부가 관여한 강제동원이었다. 이들은 국내뿐 아니라 일본으로도 많이 동원되었지만 중국이나 남양군도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들은 노동 조건이 열악한 광산, 건설현장, 군수공장 등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일제는 조선인 여성도 일제 초기부터 여공 모집으로 동원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미혼 여성을 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하였다. 일제는 식민지였던 조선인 여성에게는 더 많은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자국민에게는 자극과 각성을 얻기 위해 내선일체의 모범으로서 조선인 여자근로정신대를 선전하였다. 면담한 사례들을 통해서 보면 이들의 동원 시기는 1941년부터인데 1944년 이후에 많았다. 동원된 공장은 도야마현 후지코시 비행기 공장, 나고야현 미쓰비시 비행기공장 그리고 시즈오카현 누마즈 방직 공장이다. 이들은 거의 국민학교를 졸업한 학력으로 10대 중반에 많이 동원되었다. 동원 당시 살던 지역은 경성, 인천, 광주, 진주 등 이남의 주요 도시였다. 주요한 대상이 학생이었으므로 동원의 주요 기관은 학교였다. 사례 31명 중 20명은 지원하였는데 지원동기는 나라를 위해서라고 신문에서는 선전되는 것과는 달리 공부하기 위해서거나 돈을 번다는 선전을 믿어서였다. 나머지 11명은 강제로 동원되었다. 지원의 형식을 빌었지만 관이 학교마다 인원을 할당한 관알선이어서 지원자가 나오지 않은 학교는 제비뽑기에 걸리거나 선생이 임의로 작성한 명단에 뽑힌 것이다. 애국반장을 통해서 정신대 통지서를 받고 간 경우도 있었다. 여자근로정신대로서의 생활은 남자와 분리된 여성만의 기숙사에 배정되었고 기숙사 관리자도 료장 외에는 대개 여성이었다. 여자근로정신대원들은 군대식으로 소대, 중대로 나뉘었고 료장이 정실대원 중에서 소대장과 중대장을 뽑아 통솔하게 하였다. 하루 일정도 아침, 저녁으로 인원 점검을 하는 등 군대식으로 통제되었다. 당시 식량사정이 좋지 않아서 식사량은 매우 적었고 반찬도 단무지 정도였다. 굶주림과 중노동으로 각기병이나 장질부사에 걸려 고생하였다. 공장에서는 반장의 감시하에 선반(旋盤)일이나 페인트칠을 주로 하였다. 작업중 손가락이 잘리거나 죽은 경우도 있었으며 나고야 미쓰비시 공장에서는 지진으로 6명이 죽었다. 또한 전쟁 말기에는 연이은 공습으로 피난을 다녀야했다. 이런 고된 생활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그들의 임금을 강제 저축하여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다. 조선인 여자근로정신대 동원은 관이 주관하여 주로 학교를 통하여 학교 졸업자와 재학생을 대상으로 지원을 받는 관알선 형식을 취했다. 조선에서 일본에서와 같이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었지만 조선인 여성에 대해서는 기능자 등록만 되었기 때문에 실제 법령상 대상이 되는 것은 극소수였다. 따라서 법령 발표 후에도 조선에서는 계속 관알선 방식으로 동원되었다. 이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조선인 남성에 대한 국내와 해외로의 노동력 강제 동원이 관알선에 주로 의존한 것과도 연결된다. 이 논문의 의의는 일제 말기 여성들의 경험을 드러냄으로써 조선인 여자근로정신대를 역사적인 사실로 자리매김하려는 것이다. 본 논문은 부족한 자료와 실제 동원된 지 40여년이 지난 후 피해 당사자를 면담했기 때문에 이들의 기억에 의존한 여자근로정신대의 실태 복원에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 그리고 법령외에 당시 조선에서 여자근로정신대로 여성들을 동원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관련 자료 발굴과, 학교를 통한 동원이 많았으므로 학적부를 통한 조사도 앞으로의 과제이다. 또한 국내 공장으로 동원된 경우와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만주에서의 동원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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