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 179 Download: 0

14세기 고려 사대부의 성리학 수용과 가정 이곡

Title
14세기 고려 사대부의 성리학 수용과 가정 이곡
Authors
고혜령
Issue Date
1992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dvisors
.
Abstract
This study is intended to shed new lights on the characteristics and positions of the literari class(Sa-dae-bu) in the later part of the Koryo dynasty. Recently considerable number of researches have been done on this class, and it has now been generally accepted that the military coup d’Etat of 1170 brought in a new class of bureaucrats that emerged from local clerical professions through passing the literary examinations. This new bureaucrats are thought to have become the bearer of the Neo-Confucianism and builder of the new Choson dynasty, rejecting the hitherto prevailing Buddhism. The history of the literali class in the late Koryo dynasty can be divided into 3 periods: in the first period, the literatis were mostly small-landowners capable of doing clerical jobs and were subservient to the military overlords, but generally resisting to the Mongol invaders. In the second poeriod when Koryo Kingdom was suffering under Mongol dominance, the literatis came up to the forefront of governmental service, through compromises with the dominating Mongols and through contacts with the aristocrats. In the third period, in the last years of Koryo dynasty, the literatis took increasingly aggressive attitudes against both Buddhism and the mongol Yuan-China, accepting the strict principles of Neo-Confucianism. The most radical ones of this literati class became later the core members of the dynasty builders of Choson. Among the above-mentioned three periods, my present research directs chiefly to the second period, that is the first half of the 14th century. First, I have done an extensive and intensive survey of the careers of those Koryo literatis who acquired the high honor of passing the Chinese civil service examination in the Mongol capital. These highest Confucian elites were guaranteed the governmental posts back in Korea. They were however posted usually to the positions of literary, educational or ideological functions rather than of actual political power. Noteorthy also is the fact that their family background was generally low, with no long-standing high ancestry. Then I have made equally through survey of the careers of those literatis who were related with the introducing of Neo-Confucianism in the Koryo dynasty. It turned out that those who played active role in introducing Neo-Confucianism almost without exception had successfully passed 송 civil service examinations and studied or stayed in the Yuan China. As to their family background, most of them hailed from the newly arisen families which became known only from their father-generation or at most grandfather-generation for their first governmental posts. When we compare the family background of those who passed the Yuan examination and of those who were active in Neo-Confucianism, we can generalize that the former was lower and ascendancy was more recent. The literati class ascended into the governmental posts by dint of their proficiency in classical Chinese learnings, and then could maintain their acquired positions through consciously fostering such relations as inter-marriage, examiner-candidate(Chwa-ju Mun-saeng 座主門生) and teacher-discipline. The transmission lineage of Neo-Confucianism from Paik I-Jong(白이正) through Kwon Pu(權溥) and Yi Jae-hyon(李齊賢) to Yi Saek(李穡) was established through the combination of all these factors. Introducing of Neo-Confucianism and expulsion of Buddhism were actually the two sides of the same coin. Those who actively criticized and opposed the Buddhism, such as Choi Hae(崔瀣), Paik Mun-bo(白文寶), Yi in-bok(李仁復) and Yi Saek, were not of completely different opinion from those who maintain the view of co-existance of Buddhism and Confucianism, such as Yi Jae-hyun and Yi Gok(李穀). The two lines of view were common in that neither did negate the Buddhism altogether and both claimed the necessity of containing the excessiveness of Buddhist activities. The most conspicuous features of Neo-Confucianism in its practical aspects were stressing filial piety above all and the 3 years’ mourning period. These two typical Neo-Confucian virtues were begun to be stressed very much by the Koryo literatis of this time. Yi Gok(李穀) exemplifies all the features of this class and of his time. As the son of a minor clerk in the country side, he passed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n Korea. By dint of his talent, he then succeeded in the examination in the capital of Yuan empire. This gave him the governmental position in Yuan China and high fame back in Koryo. His rise in social prestige was also very much expedited by marriage relation with the prestigious clan of Kwon family of Andong. He held the official positions concurrently in China and Korea. He maintained close contacts and communications with the renowned contemporary Chinese literatis. He made considerable contributions in resolving the conflicts and confusions arising from the interrelations between Yuan China and Koryo. He himself was a devoted Confucian, stressing the inner virtues of Outrightness and Respectfulness. He was also heavily referring to the “Four Books” of Neo-Confucianism. His son, Yi Saek, could later become the greatest scholar of Neo-Confucianism in the last period of Koryo dynasty. The newly arisen literati class of the first half of the 14th century continues to be active throughout the subsequent periods, struggling with the complicated internal and external problems, and the radical faction of this class proceeded to establish a new dynasty, the Yi Dynasty Korea. ; 高麗 後期 武臣執權으로 前期의 門閥貴族 대신에 새로운 지배세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新官僚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士大夫의 祖型이 되고 이들을 胎盤으로 하여 朝鮮 건국의 주동세력이 되는 新進士大夫가 등장하였다는 것이 최근까지 학계의 통설로 받아 들여져 왔다. 新進士大夫는 鄕吏 출신으로 科擧를 통해 중앙에 진출하였으며 지방의 중소지주적 경제기반을 가진 존재로 이해되어 왔다. 또 이들은 性理學을 이론적 무기로 삼아 불교를 배척하였다. 이와 같은 이해 위에서 고려 후기 지배세력의 한 갈래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士大夫의 존재가 부각되고 士大夫의 槪念과 性格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어 왔다. 본 연구는 고려 후기 士大夫의 실체를 재조명하여 그 성격과 역사적 위상을 밝혀 보려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먼저 士大夫에 대한 諸說을 검토하고 이를 정리해 보았다. 그 결과 고려시대의 士大夫는 “文臣 중심의 官僚를 지칭하는 用語”로서 知識 官人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고려 후기 士大夫는 시기에 따라서 그 성격을 셋으로 구분하여 말할 수 있다. 제1기는 무신집권하에서 등장하는 能文能吏의 새로운 문신관료로써, 이들은 무신집권체제에 참여하여 현실타협적 측면이 강하고 당시의 체제를 비판하거나 개혁을 추구하려는 측면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반면에 蒙古와의 항쟁과정에서 민족의 자존을 희구하는 민족의식의 표현으로서 역사의식을 고양시키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제2기의 士大夫는 元 간섭하에서 元에 왕래하면서 性理學 受容에 앞장 선 사람들이다. 이 시기에는 이들이 정치 일선에 참여하고 개혁에도 참여하여 유교적 정치이념을 펼치려는 노력도 하지만 당시의 정치상황은 왕의 側近勢力이나 嬖幸과 같은 비정통적 정치세력이 정권을 농단하고 있었으므로 士大夫들은 소외되는 형편이었다. 한편 이들은 座主 門生관계에 의해서 學緣으로 얽혀져 있어서 학문적 공감대를 같이 할 뿐만이 아니라 官途에서의 출세와도 깊은 연결을 가져 그들의 유대관계를 더욱 강화시켜갔다. 또 이들은 기존의 귀족가문과의 통혼으로 그들의 가문적 지위를 더욱 상승시켜 나가기도 하였다. 이런 측면은 사대부들이 권문세족과의 타협적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제3기의 士大夫는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척물론을 전개하였고 元·明교체기의 국제상황의 변화와 더불어 공민왕대의 개혁정치에 참여하였으며 친명적 태도를 취하였던 사람들이다. 이들 중 급진개혁파들은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이렇게 士大夫의 존재는 시기에 따라 그 성격이 구분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추구하려는 정통적, 유교적 관료계층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본 논문에서는 위의 시기 구분에 있어서 제2기에 해당하는 14세기 전반기의 士大夫의 성격을 구명하고 특히 이곡의 경우를 대표적인 사례로 써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먼저 원 간섭기라는 특수한 정치상황에서 원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제과에 급제한 士大夫를 대상으로 그들의 성장과 발전과정을 통하여 士大夫의 성향을 살펴 보았다. 高麗·元의 특수관계가 전개된 후 원제국은 蒙古族 優位의 종족별 신분제를 유지하면서도 漢族 文化를 수용하여 유학을 일으키고 과거를 실시하여 유교적 지배체제를 수리하였다. 고려 士大夫로서 元 科擧에 응시하여 급제한 사람들은 당시 儒者 또는 지식계층의 최고의 엘리트라 할 수 있다. 일단 元 制科에 급제하면 고려에서의 출세는 보장되는 것이었다. 이들이 고려에서 갖는 관직은 주로 文翰職, 史官職을 맡아 활동하였다. 制科에 응거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권문세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보다는 當代에 起身하였거나 父 또는 祖父대부터 出仕하기 시작하여 가문적 기반이 미약한 신진가문 출신이 더 많았다는 점도 우리의 주의를 끈다. 또 이들과 함께 14세기 성리학 수용과 관련된 고려의 士大夫들을 대상으로 이들의 사회적 기반과 출신을 살펴 보았다. 성리학 수용에 앞장선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출신자이고 이들 士大夫들은 거의 모두 元에 유학한 경험이 있거나 원에 왕래가 있었던 사람들이다. 가문을 분석해 보면 父 또는 祖父대부터 官人으로 진출한 신진가문이 주류를 이루며 그 중에도 父代에 진출한 가문이 전체의 반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當代 起身者까지를 포함하는 신진가문의 비율은 65%에 달한다. 출신이 한미한 경우 이 길을 택하려는 경향이 컸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성리학 이념과 학문을 토대로 官路로 나가고 통혼이나 學緣으로 출세기반을 튼튼히 하여 귀족화의 추세를 보여준다. 이들은 상호간에 座主 門生관계나 門人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제과 합격자와도 긴밀한 교유관계가 있었다. 安珦, 白이正에서 權溥, 李齊賢, 李穀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師受관계를 통해 학문적 교류도 심화되어 왔다. 이들의 뒤를 이어 麗末 유학의 宗匠이 된 것은 李穡이다. 성리학 수용과 불교배척은 表裏관계에 있는 것이다. 安珦을 위시해서 斥佛論을 전개해 온 사람들은 崔瀣, 白文寶, 李仁復, 李穡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반면에 공존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李齊賢, 李穀등으로 대체로 이 시기에는 두 계열이 병행되어 온 듯하다. 그러나 共存論者도 이미 佛敎에 대해서 異端이라는 인식을 갖어서 儒者로서 불교를 말하는 것은 금기시하고 있으며 척불론자도 불교의 존재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공존적인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 다만 불교의지나친 번성을 말미암아 일어나는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막기 위한 制裁를 가할 것을 주장하는 선에 머물러 있다. 이들의 경우 아직 불교 자체에 대한 논리적 비판은 대두되지 못하였다. 性理學의 실천적 측면은 인간의 기본 도리인 孝의 실천으로 나타나는데 효의 실천은 곧 家廟의 설립과 3年喪制의 실천으로 나타난다. 李穀이나 白文寶 등이 모두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들과 교유가 깊은 尹澤은 불교의 법으로 장사지내지 말 것을 유언하였으며 그의 아들 尹龜生은 朱子家禮를 처음으로 실천에 옮겨 3년상을 치루었다. 稼亭 李穀은 14세기 전반기의 인물로서 원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치고 원에서의 관직생활과 고려에서의 활동을 겸하였으며 元 文士와도 교유가 잦았던 인물이다. 그는 麗末 성리학의 최대 학자인 李穡의 부친이기도 하며 향리 출신으로 고위관직에 올라 귀족화해가는 신진士大夫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는 지방 戶長의 아들로서 학문적 실력으로 과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 하였으며 아울러 家門의 성장은 安東 權氏와의 혼인을 통해 이루어졌다. 元의 관직을 받은 그는 고려의 관직도 함께 받아 양국의 관리로서 활동하였는데 그의 임무는 주로 麗·元 관계속에서 발생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되었다. 특히 그와 元 士大夫와의 교유는 성리학 수용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상적으로는 그는 人倫의 본질적 측면을 추구하려 하였다. 인간의 기본 도리인 孝의 실천에 투철하였다. 또 사물을 대하여는 誠 敬을 위주로 하였으며 특히 周易의 “敬以直內”를 강조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孟子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 그의 문집을 통해 고찰해 보면 그는 四書에서 많은 인용을 하고 있으며 특히 居敬의 학문을 강조하고 있다. 李穀의 경우는 14세기 전기 성리학 수용기의 儒者로서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성리학자들은 14세기 후반기의 士大夫와 성격상 구별되는 점도 갖고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14세기 후반기의 田制모순이 더욱 심화되고 元·明교체기의 양국과의 관계의 혼선, 왜구의 침략등 대내 대외적인 이중의 고통속에서 급진 개혁파는 무신세력과의 제휴로 전제개혁을 단행하고 새 왕조를 개창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麗末의 개혁파 士大夫는 조선 건국의 주역으로서의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 양반사회는 麗末 士大夫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Fulltext
Show the fulltext
Appears in Collections:
일반대학원 > 사학과 > Theses_Ph.D
Files in This Item:
There are no files associated with this item.
Export
RIS (EndNote)
XLS (Excel)
XML


qrcode

Items in D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