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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한시 연구 : 전개양상과 그 특성을 중심으로

Title
신라한시 연구 : 전개양상과 그 특성을 중심으로
Authors
호승희
Issue Date
1993
Department/Major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dvisors
.
Abstract
한시라는 장르는 일단 그 양식이 중국에서 완성된 ‘외래문학’의 한 양태이다. 자수, 대구, 성률 등 미리 정해진 ‘양식적 틀’ 안에서 창작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충분히 소화시켜 자기의 뜻이나 서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상당한 수준의 한문학적 소양과 수련이 요구된다. 신라의 한시를 다루는데 이러한 한시의 장르적 성격을 유념해야 하는 것은 이 시기가 한시 수용의 초기 시대이기 때문이다. 본고는 650년대 「태평송」에서 900년 초기 최승우 한시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한시 수용양상과 그 특징, 실제 작품들의 성격과 그 성격들이 변이되어 가는 과정을 추적하고, 이를 통해 나타나는 신라한시의 몇몇 ‘독자적’인 특성을 부각시키는 데에 논의의 주된 목적으로 삼았다. 그리고 방법론의 한 일환으로 동시기의 당시로부터의 영향과, 일본한시와의 대비 또는 관계를 다각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되도록이면 신라한시가 지니는 ‘객관적’ 위상 밝히기에 주력하였다. 우선 Ⅱ장에서는 ‘사회. 문화사적 발전’ 속에 전개해 나가는 신라한시의 제반양상을 살피기에 중심을 두고 논의했다. 여기서 신라는 통일전에 백제나 일본처럼 ‘왕권강화용’으로 한시를 수용하지 않고 ‘외교의 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어, 결국 통일 이후 외교적 필요가 상실된 뒤에는 한시가 주변장르로서의 위상을 벗지 못한 채, 역사 나아가 문학사의 표면에서 잠재되어 버리는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그대신 ‘공식적인’ 문학장르의 기능은 산문이 하고, 운문인 한시는 개인의 서정표현을 위한 한 양식으로 승려층에서부터 일찍이 영위되어, ‘서정표현양식’으로서의 기본적인 특징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800년 초기 동북아 전체를 휩쓴 ‘당풍문화 열기’, 신라인에 대한 ‘당 진사과 개방’, ‘신라상인의 대외적 활약’ 등 새로운 역사적 계기들과 맞물려 신라 빈공한시의 출현, 선승들의 정치 문화 참여, 경문.헌강왕의 한시취향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김입지, 김가기, 김운경 등의 신라시인이 배출된 것을 당의 중당시, 일본 헤이안 嵯峨朝 한시 등에 상응하여 나타난 한 문학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국내에도 왕을 중심으로 한 왕족과 국내 문인들의 시단도 결성되어 ‘탈세적 정신 추구’를 지향하는 하대의 시정신까지 발현하였으며, 이러한 시정신은 빈공들의 ‘정신적 뿌리’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신라한시의 영세한 자료 성격상 빈공들의 남아 있는 한시를 보다 면밀하게 연구해야 할 것으로 본다. Ⅲ장에서는 신라 빈공들을 산출한 당 진사과시의 운용양태와 920년대 헤이안조 大江維時가 편찬한 『千載佳句』에 대한 자료검토를 통해 빈공들의 한시가 자신이 장안에 들어가 배운 시풍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또 중당년간의 김입지 등의 한시가 최치원 시에 버금갈 정도로 인정받고 있음을 발견했다. 따라서 821년 김운경으로 시작되는 빈공한시의 계보 세우기와 그들의 작품적 성과를 살펴보는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김입지는 요합이 편찬한 『극현집』의 ‘청담’, ‘청냉’한 시풍을 어느 정도 수렴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청정’한 내면세계에서 발현하는 ‘청징’한 풍격을 창조하고 있다. 그 다음 세대인 박인범, 최치원은 함통년간에 동시에 장안으로 들어가 시단을 풍미하였던 ‘방림십철’등과 교류하였다. 그러나 박인범은 김입지처럼 불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그 자신의 ‘이원론적 시정신’을 ‘청한’하며 ‘유려’한 심상으로서 표현하였으며, 최치원은 재당시 가도시의 영향 아래 ‘고음’과 ‘한’을 반복 구현하다, 귀국후 자신의 개인적인 사회적 좌절을 겪으면서 시풍의 변이를 일으키게 된다. 그는 후기에 ‘담박’한 사변적인 정신원리를 불교를 통해 비로소 확보하여 초기시와 뚜렷하게 차이지는 시를 짓고 있다. 소종년간에 들어가 시를 배운 최승우, 최광유는 이 시기에 유행한 이상은, 온정균식의 ‘염려’한 시어에 영향받고 차용하기도 하나, 최광유인 경우 자신의 ‘한아’한 시의로 인해 ‘지분기’가 거의 없는 경물묘사 위조의 영물시를 짓고 있다. 반면, 최승우는 빈번한 전고와 첩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시의만을 추구하는데, 그의 이같은 시태도는 정.경 혼융이라는 당시의 본령이 본격적으로 해체되어 가는 과도기의 모습마저 엿보게 해 준다. 이상과 같은 개별적인 내용을 몇가지로 수렴하여 Ⅳ장에서는 신라한시의 특성을 동시기의 일본 나라조, 헤이안조 한시와 대비하면서 살펴보았다. 한시를 ‘공구화’시키고, ‘유교이념을 표방한’ 나라, 헤이안조 한시와 달리 신라한시는 개인의 ‘농도깊은 서정’을 표현해 내는 양식으로서의 전통을 수립하였으며, 신라 전대에 걸쳐 사회의 지배이념이던 불교적 사유를 기층문화, 도가적 이상 등과 결합시킨 독특한 ‘감성’을 자신의 풍격으로서 창조시키고 있기 때문에 당시와는 근본적으로 차별되고 있다. 또한 相聞歌의 기층적 전통을 기니고 있어 제, 량대의 『옥대신영』궁체 등에 많은 공감을 보낸 나라, 헤이안조 한시의 ‘輕艶’을 바탕으로 한 ‘綺靡’한 미의식과는 달리, 신라는 고신라 시대부터 지속되어 온 전통적인 정신세계와 화랑문화, 그리고 새로이 융합된 불교적 사유 등이 『문선』에서의 몇몇 개념들을 차용, 주로 ‘淸’이라는 미감으로 편재되어 가는 것을 발견했다. 빈공한시에 대한 평가와 그들 스스로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淸澄’, ‘淸麗’, ‘淸婉’, ‘淸寒’ 등의 시풍격은 단순히 당시의 영향이기 보다는 산, 운문 통틀어 신라문학 나아가 신라문화가 갖고 있던 하나의 미의식 전통에서 나온 문학적 성과라고 보았다. 끝으로 Ⅴ장에서는 이상에서 밝혀진 몇몇의 내용들을 바탕으로, 신라한시가 지닌 문학사적 의의를 논했다. 우선 전통가요의 ‘기층화’와 한시장르의 ‘표층화’가 아직 진행되지 않은 시대에 이룩해 놓은 문학적 성과라는 점에서 신라한시의 사적인 의의가 도출된다. 한시는 외래장르를 수용하여 이를 ‘자리화’해 나가는 방정식을 직접 제시하면서, 비록 신라국내에서는 한시로서 신분상승하기에 열악한 문학외적 조건에 처해 있으면서도 당에서 경험하는 문학의 현지체험, 그리고 당시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시를 주고 받으며 실력을 겨루고, 심지어 헤이안경에까지 자신들의 작품이 상품으로 팔려나가 어느 의미에서는 국경을 넘어서 시 재능을 인정받아 후대의 어느 시대에 뒤지지 않은 업적을 구축하고 있다. 이들의 명성은 해동불교로서 신라가 당과 어깨를 견주면서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던 것 처럼 당시 동북 아시아 전반에 걸쳐 위치하던 신라문화의 대외적 위상에 걸맞는 성과를 한시문학에서 창조해 냈다 할 것이다. ; 漢詩というジャンルは, 一應その樣式が中國に完成された 外來文化 のひとつの樣態である.字數, 對句, 聲律等,すでに決定された 樣式的型 の中から創作しなればならないので, これを充分に消化させ自分に意や抒情を表現するに 相當な水準の漢文學的素養と修鍊が要求されるといえる. とくに, 新羅の漢詩をとりあげる場合, このような漢詩ジャンル的性格を留念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 この時期が 漢詩受容の初期時代だからである. 本稿の目的は, 650年代『太平頌』から900年初期の催承祐の漢詩に至るまで,新羅の漢詩受容樣相とその特徵, 實際の作品の性格とその變移の過程を追跡し,これらに現れている新羅漢詩の幾つかの獨自性を浮刻させるところにある. そして, その方法論の一環として同時期の唐からの影響, 日本との對比と關係を多角的に考察し, 可能な限り新羅漢詩が持つている客觀的位相をはつきりさせようとした. 先ずⅡ章では‘社會文化史の發展’の中に展開された新羅漢詩の諸般の樣相を探るのに中心を置いた.ここで統一前新羅では百濟や日本のように 王權强化用 として漢詩を受容したのでなく, 外交手段 として利用しており,結局は統一以後,外交的必要が喪失されてからは,漢詩は周邊ジャンルとして,歷史と文學史の表面から潛在してしまう現狀に直面する.その代り公式的文學としての機能は散文が行い,韻文の漢詩は個人抒情表現の樣式として僧侶層から營爲し,いち早く抒情表現樣式という基本的特徵を作り出した.そして800年初期,東北亞全體を 影響する‘唐風文化熱氣’と新羅人への‘唐進士科開放’,‘新羅商人の對外的活躍’等新たな歷史的契機とがみあつて,新羅賓貢漢詩の出現,禪僧たしの政治文化への參與,景文.憲康王の漢詩趣向という新たな局面に直面することになる.金立之,金可紀,金雲卿等の新羅詩人が輩出したのは唐の中唐詩, 日本の平安嵯峨朝の漢詩等に相應し表された文學現象といえる.更に,國內にも王を中心として王族と國內文人との詩檀も結成され‘脫世的精神’を志向する下代の詩精神まで發現し,このような詩精神は賓貢たちの漢詩の‘精神的根源’の役割をしているとみなされる. 新羅漢詩の資料の零細な性格上,賓貢たちの殘した漢詩をより綿密に硏究しなげればならない.Ⅲ章では, 新羅賓貢を生んた唐の進士科試の運用樣態と920年代の平安朝の大江維時が編纂した『千載佳句』の資料の檢討を通して, 賓貢たちの漢詩が長安の遊學から學んだ詩風に相當な影響を受けていたことを確認した.ここで,中唐年間の金立之等の漢詩が,崔致遠の詩に比べられる水準であるのが發見された. 從821年の金雲卿から始まる賓貢漢詩の系譜の見直しと彼らの作品的成果を考察するとこるに主力た. その結果, 金立之は姚合の編んた『極玄集』の 淸淡 , 淸冷 の詩風をある程度收めるがら, 自分身の獨自的な內面世界から 淸澄 した風格を創造している. その次の世代の朴仁範と崔致遠は咸通年間に長安へ入り, 當時の詩壇を風靡した 芳林十哲 等と交流した. ここで朴仁範は, 金立之のように佛敎的思惟を基底とした彼自らの 二元論的詩精神 を 淸寒 とともに 流麗 した心尙として表現するようになつたが, 崔致遠は在唐詩に賈島詩影響のしで 苦吟 と 恨 を反復的に具現されることになる. 崔致遠は歸國後, 個人的に社會的挫折を經驗したがら, 詩風の變移を成り立たせた.彼は後期に 澹泊 な思辨的精神原理を佛敎を通して確保始し初期詩とは明白に異なつた詩を作つている. 昭宗年間に入り詩を學んだ崔承祐と崔匡裕は, 當時流行した李商隱と溫庭筠の 艶麗 な詩語に影響をうけたり借用したりもしたが, 崔匡裕の場合,自分の 閑雅 な詩意のため 脂紛氣 がほとんどない景物描寫爲主の詠物詩を作つでいる. その反面, 崔承祐はたび重なる典故と疊語を使用し自分の詩意だけを追求したが, 彼のこのような詩態度は 情景混瀜 という唐詩の本領が本格的に解體されいく過度期の姿さえ見せている. 以上のような個別的內容を幾つか收めながら,Ⅳ章では,新羅漢詩の特性を同時期の日本奈良朝と平安朝の漢詩との對比を試みた. 漢詩を 工具化 させ, 儒敎理念を標榜 する奈良と平安朝漢詩とな異なり, 新羅漢詩は個人の 濃度深い 抒情を表現する樣式としての傳統を樹立している. 新羅全代に跨がる社會の支配理念であつた佛敎的思惟を基層文化と儒家的理想等と結合させた獨特な感性を自分の風格として創造させていうために唐詩とは根本的に違. また齊粱代の『玉臺新詠』の宮體等に多くの共感を寄せた奈良と平安朝の漢詩の 輕艶 を基底とした 綺靡 な美意識とは異なつて,新羅の漢詩は,古新羅時代からの傳統的な精神世界と花郞文化,そして新たに融合された佛敎的思惟と『文選』からの幾つかい槪念を借用して,主に 淸 という美感の發顯を成し遂げた.賓貢漢詩にたいする評價と彼ら自身の作品に見られる 淸澄 , 淸麗 , 淸婉 , 淸寒 等は,單な唐詩の影響ではなく,新羅文學と新羅文化が源泉的にもつている美意識傳統から出た文學的成果と考えてよい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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