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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사회 변동과 족보 소송

Title
19세기 사회 변동과 족보 소송
Other Titles
Social change and genealogy lawsuit in 19th century : mainly Ha wee-ji(河緯地) family's lawsuit
Authors
윤미영
Issue Date
2013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백옥경
Abstract
In late Josun dynasty, someone’s family was important as well as learning or personality to assess one person. Therefore a nobleman’s social rank or status was collective since it’s based on families rather individuals between 18th and 19th century. A family mainly formulated clans with renowned ancestors or towns with same people for social activities. It published genealogy of descent group branches(派譜) to distinguish other descendants to reflect strong bondage of the same people. From 18th to 19th centuries, expansion of genealogy caused social problems forge and lawsuit of genealogy such as descent group branches(派譜) or Daedongbo(大同譜). It is known that genealogies were forged by newly emerged noblemen and rich farmers. They tried to merge with other genealogy or fake as a descendant of the renowned by changing their regional origin of family genealogies. And such forges or disputes during genealogy publication triggered lawsuits. Ha wee-ji(河緯地), one of Sayukshin(死六臣), received posthumous names and Bulcheonwee(不遷位), due to continuous rewards since his restoration of the position. After that Ha won(河源)’s descendants, who are Ha wee-ji’s successors, published the genealogy with its clan’s activities. During the work, they insisted that they are the descendants of Ha wee-ji and Ha shi-chul(河始澈) asked to be added on Ha seok-jung(河錫中) family’s genealogy. Ha shi-chul seems like from a humble family or below, but was one of rich merchants and craftsmen. Even with such economic and backgrounds, Ha wee-ji failed to be a member of Ha wee-ji’s descendants by changing his regional origin of family genealogy and raised a lawsuit claiming as the descendant of Ha wee-ji in 1827. This suit case was initiated during Daedongbo publication and shows emergence of a middle class and possibility of social status changes. At that time, such class’s attempts for ascent of status can be found in various ways, for example, faking Yu-hak(幼學), listing up one’s name on Hang-an(鄕案) or forging genealogy. Among them, forge of genealogy sometimes triggered lawsuits. That’s because emerging middle classes failed when they tried to list up their names on genealogies to fulfill desires of higher social status. Like this, in 19th century, there was newly emerged class’s endeavor for social status in many ways. One of the mis descendant confirmation of a renowned ancestor or succeeding head family with genealogy lawsuits. Since these problems are related to noblemen’s social status as well as their ranks, local society had interests in them. Therefore local society including a memorial hall for Confucianist services to honor distinguished scholars and statesmen(書院) involved suits expressing their thoughts, and this reflected in results. There still remains exclusive perception of social status among noblemen and endeavor to keep their closed status system. And it can also be expressed with social network of local society in the central government, which was based on social relations. After all, genealogy lawsuit caused from social status changes were new classes’ attempts to raise status, which were failed because of social network of noblemen throughout central government and local society. This is an example of incorrect common understanding that social status can be easily changed with economic power.;조선 후기 사회는 개인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학식이나 인격 못지않게 출신가문을 중요시하였다. 때문에 18-19세기 양반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는 개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가문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집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가문은 名祖나 顯祖를 중심으로 門中을 형성하거나 同族 마을을 형성하여 사회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派譜를 간행하여 다른 자손과 구별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강한 동족의식이 형성되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18-19세기 派譜, 혹은 大同譜 등의 족보 간행의 확대는 僞譜의 출현, 족보 소송 등의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였다. 족보의 위조는 주로 조선후기에 새롭게 등장한 신흥양반층과 요호부민층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본관의 改貫을 통해서 合譜하거나 유명 顯祖의 후손으로 冒錄하는 방법을 통해 신분을 상승시키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족보 위조의 문제, 혹은 족보 발간 과정에서 나타난 분쟁은 소송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사육신 중 한 명인 하위지는 숙종대 신원이 회복 된 이후 계속되는 포장 조치로 인해 諡號와 贈職을 비롯하여 不遷位의 은전을 입게 되었다. 이후 하위지의 계후자인 하원의 후손들은 여러 문중 활동과 더불어 족보를 발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위지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河始澈이란 자가 河錫中家에 入譜를 요청하였다. 하시철은 신분적으로 미약한 가문의 인물이거나 혹은 그 이하의 인물인 것으로 보이며, 경제적으로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던 상공업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문자를 습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자 해독력과 문장력이 우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제적, 문화적 기반을 가진 그는 현조인 하위지의 후손이 되기 위해 본관을 改貫하여 入譜를 시도하였으나 좌절당하였다. 그러자 하시철은 순조 27년(1827) 격쟁을 통해서 하위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소송 사례는 대동보 간행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조선후기 새롭게 성장한 중서층의 등장과 신분 변동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이러한 계층의 신분 상승 시도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幼學을 冒稱하거나 鄕案에 이름을 올리거나 족보를 위조하는 등의 방법을 이용하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족보의 위조는 소송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는데, 성장하고 있던 중서층의 인사들은 자신들의 신분적 욕구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족보에 입록을 시도하였고, 그것이 실패하자 소송으로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이처럼 19세기에 이르면 새롭게 성장한 계층에서 다양한 형태의 신분 확보 노력이 보이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족보 소송으로 인한 현조의 후손여부, 종통 승계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이 문제들은 단순히 신분뿐만 아니라 양반의 사회적 지위와도 관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향촌 사회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서원을 비롯한 향촌사회에서는 이 소송에 개입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였고, 이는 소송의 결정에 반영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양반 사족 내부에는 여전히 배타적인 신분 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들만의 폐쇄적인 신분구조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앙에서도 향촌 사회의 혈연적, 사회적 연계망을 통해서 여론을 표출할 수 있었다. 결국 19세기 신분 변동 과정에서 발생한 족보 소송은 새로운 계층의 신분 상승 시도였으나 기존 양반 사족들의 향촌을 비롯한 중앙에 퍼져 있는 인적 연계망으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당시 신분 변동이 경제력을 통해서 쉽게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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