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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소석불상(小石佛像) 연구

Title
조선말기 소석불상(小石佛像) 연구
Other Titles
Small stone Buddha images in toward the end of the Joseon Period
Authors
진미지
Issue Date
2012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홍선표
Abstract
조선말기 불교계는 대체적으로 국가의 억압 속에서 교단과 사상 등 제반이 침체에 빠져 피폐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반대로 이 시기는 다른 어떠한 시대보다 민간화 된 모습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에 따른 현상으로 현재 전국 곳곳의 사찰에 봉안되어 소장 중인 소석불상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소석불상은 모두 석재로 제작되었으며 급격히 도식화 된 경향을 보인다. 일례로 강원도 양구 심곡사 소장의 소석불상(1887)을 비롯하여 서울 청룡사 석삼존불상(개금기 1902), 금정사 소장의 소석불상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다수의 불상이 남아 있어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본 논문은 18~19세기 소석불상의 전국적 분포현상에 주목하여 그 배경과 원인을 살피는데 연구의 초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연구대상으로 삼은 바는 우선, ‘50cm 이내’의 크기에 ‘석재’로 제작되었으며 ‘불(佛)’의 존격을 가지고 있는 상으로 한정하였다. 게다가 그 중에서도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무릎위에 얹은 수인’을 결한 불상이 많았으므로 이를 더하였다. 조선말기 불안한 정세 속에서도 각 계층에서의 적극적인 불사 속에서도 18세기말 사찰의 중 · 재건과 더불어 소규모 암자를 기반으로 꾸준히 증가하는데, 이렇게 전국 곳곳에 암자 수가 급증하게 되면서 생기게 된 공간은 당시 불교가 민중의 신앙으로 개별적 사찰의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전각에 따른 불상의 봉안처를 철저히 따르기 보다는, 암자라는 특성상 이와 같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봉안한 불상 또한 달리 하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기에 본 연구에서는 당시 오히려 기복신앙의 증진효과를 위한 공간의 특성상 수요에 따라 이러한 소석불상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까지 조사한 소석불상의 지역별 분포 현황을 살펴보자면 서울 및 경기권 사찰에서 10구, 강원권의 사찰에서 3구, 경북·경남의 사찰에서 각각 6, 8구를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이러한 대부분의 소석불상이 전남지역에서 29구로 수적으로 월등하다. 그 외 전북지역과 제주지역에서 각각 1구를 제외한 나머지 충남과 충북 지역에서는 이미 사찰문화재가 조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유사한 소석불상을 소장한 사찰을 찾아보기 힘들다. 강원권의 소석불상은 대체적으로 서울 · 경기지역과 어린 아이의 모습인 동형불에 가까운 편에 속한다. 한편 경상지역에서는 전체적으로 조각상태가 우수한 불상이 조사되고 있는데 이전의 동형불상과 신체의 비례나 자세에서 보다 근엄함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어 1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전남권의 소석불상은 17세기부터 시작된 조선후기 다불상 일부에서 도상적으로 매우 유사함을 살펴볼 수 있으며, 다른 지역보다 수적으로나마 월등한 추세이다. 그 외에도 전북 · 제주권의 소석불상은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도식화된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대부분의 소석불상은 이미 17세기의 삼존불상 및 다불상에서 도상의 전거를 확인할 수 있다. 세부적으로는 손을 무릎위로 내리고 있는 마치 변형된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이 같은 수인은 17세기 이후 나타난 불석재 불상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이후 19세기 다수의 소석불 · 보살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더욱이 조선시대의 불상에서만 살펴볼 수 있는 수인이기에 당시 시대성을 담아 표현한 특징으로 대표할 수 있을 것이다. 존칭문제에 있어서는 아미타불로 추정되는 심곡사 소장의 불상만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으며, 그 밖에 청룡사의 석삼불상을 포함한 전남 지역의 다불상 또한 어떻게 명명할지는 아직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본다. 그렇기에 본 논문에서는 사지(寺誌)의 통해 암자를 비롯하여 사찰에서 석재도분의 ‘아미타불’이라는 기록을 통해 조선 말기 소석불상의 존칭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이렇듯 본 논문을 통해 살펴 본 18~19세기 전국소재 소석불상은 대부분이 평면적이고 도상적으로 단순해져 도식화 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소석불상은 돌이라는 제재 속에서 크기가 비교적 작다는 점, 그리고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현재 제작 및 원 소장처 마저 불분명한 불상이 대다수라는 점에서 시대의 한 단면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석조불교미술의 흐름 속에서 이와 같은 조선말기 소석불상을 살펴보자면, 결국 민중화된 불교의 양적으로 폭넓어진데 따른 결과물로서 근대로 넘어가기 전의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근·현대로 넘어오기 전 시대적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Towards the end of the Joseon Period, the country’s Buddhism was in dire straits due to oppression by the government. This period displayed another feature, which was that unlike in the past, Buddhist temples came to be left outside the government’s influence, and thus could start exploring a way of reinvigoration in their own way. Small stone Buddha images currently kept at temples throughout the country are an example of the effort made by Buddhist temples for reinvigorating their religion. They include the ones in Simgoksa Temple in Yanggu (1887), Cheongnyongsa Temple in Seoul (1902), and Geumjeongsa Temple. This paper focuses on the background of small (50 cm or less in height) stone Buddha images dating back to the 18th-19th Century that were placed in temples throughout the country. Also, many of them show specific hand gestures, with the hands placed on the knee with the palm down. Amidst the unstable political situation toward the end of the Joseon Period, many temples that had been built a century earlier were refurbished and there was a steady increase in the number of temples, particularly small-sized hermitage cells, which might have been regarded as more suitable places for earnest prayers for blessings. It is guessed that there was an increase in the number of people relying on Buddhism in order to receive "mental consolation" in such a tumultuous period. Small-sized hermitage cells required Buddha images that were suited to their limited spaces. By region, the number of small stone Buddha images is as follows: 10 in temples in Seoul and Gyeonggi-do; 3 in Gangwon-do; 6 in Gyeongsangbuk-do; 8 in Gyeongsangnam-do; 29 in Jeollanam-do; 1 in Jeollabuk-do; and 1 in Jeju. However, none of this kind of Buddha images were found in Chungcheongnam-do and Chungcheongbuk-do. Those in Gangwon-do, Seoul, and Gyeonggi-do look similar to children. Those found in Gyeongsangbuk-do and Gyeongsangnam-do generally display the good skills of the sculptors. Compared to those made earlier than the late 18th Century, these images display a dignified look in body proportions and stance. Those found in Jeollanam-do display a similarity in appearance to some of the ones made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the 17th Century or later). Those found in Jeollabuk-do and Jeju display a trend of schematization, compared to those found in the other areas. Most of these small stone Buddha images appear to have stemmed from the appearance of Buddha triad or multi-Buddha images made in the 17th Century. In particular, their hand gesture is regarded as a modified form of hangma chokjiin (touching the earth mudra), which displays their hands as being placed on the right knee. This type of hand sign is found in many stone Buddha images that were made in the 17th Century and thereafter and thus can be said to contain characteristics of that period. As for their classification, the name "Amitabha Buddha" is attached to the one in Simgoksa, while those kept in Cheongnyongsa in Seoul and in Jeollanam-do remain unnamed. This paper investigated the names for the small stone Buddha images based on the various records about Buddhist temples and hermitages. As noted in the foregoing, stone Buddha images made in the 18th~19th Century found throughout the country display the trend of schematization, with most of them being plane-like and simplistic in appearance. The small stone Buddha images made toward the end of the Joseon Period are products of a more popular branch of Buddhism and thus they provide a clue to the situation that existed right before the country’s early modern period. It can be said that these images played a significant role as being objects that filled the void left by the period right before the country's early modern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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