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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敏 硏究

Title
阿敏 硏究
Authors
李蓮香
Issue Date
1966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함홍근
Abstract
以上에서 筆者는 阿敏의 生涯의 大網을 考察해 보았다. 이를 要約하여보면 阿敏은 일찍이 文舒爾哈濟의 死後 太祖의 밑에서 자라 四大貝勒에 一人으로 推戴되어 特別한 地位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뿐아니라 많은 戰鬪에 參加하였고 그中鳥喇 明 朝鮮과의 交戰에서 가장 뚜렸한 實蹟을 갖고 있으므로 三分하여 考察했던 것이다. 鳥喇等地에서는 老將 對 少將間에 戰略上의 差異, 朝鮮 遠征時 首將으로 出戰하여 凡事를 恣意로 決定하였으니, 太宗이 命한 共議를 어김으로 함께 出戰한 諸將間에 軋轢도 생겨 異心을 갖어 不旺師 할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결국 調和에 있어서는 그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되었다. 또 朝鮮에 對하여 많은 物品을 요구하였으니, 物品이 太宗을 爲해서가 아니라 私私로히 取할려고 했으니 이에 滿足치 않아 回軍時 奪取까지 行하였다. 또한 그壯年期에 明과의 交戰에서 失敗하여 以前에서부터 諸事件에 阿敏에 罪目의 對象이 되였으니 이러한 軍事的인 失敗가 皇室內部의 軋轢 또 그의 貪慾生活과 더불어 論罪의 對像이 되게 했던 것이다. 勿論 論罪의 對像이 되게 했던 것이다. 勿論 論罪의 對像으로 삼기는 不適當한 것이 있었지만은 결국 阿敏의 財産을 모두 沒收 되었고, 다만 生活을 유지할 수 있는 最小의 財物만을 주어졌던 것이다. 敷衍하면 阿敏도 少年期부터 才質을 認定받아 太祖가 愛養했고 淸朝確立에 寄與한바 크며 太祖-太宗代를 通하여 이루워 놓은 業蹟은 크나, 비록 그의 性格上의 他人과의 不和 貪慾으로 그의 晩年을 깨끗이 보내지 못하였다는 것은 滿洲國建立부터 野望을 갖어 그의 異志를 보여준 대로 强力한 實現을 꿈꾸었으나 實際生活에서 滿足을 갖어 올수 없어 阿敏이 더욱 自己의 立場을 他將과 同等하게 할려고 애쓴 대서 他人의 눈에 異心을 품은것 같이 보여 졌을 것이다 阿敏 自耳도 異志를 갖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滿洲人의 立場에서 볼때 老?에서도 그記錄을 볼수 있듯이 執拗하는 그의 性格은 많은 敵對者를 갖게 했고 또 阿敏의 勢力이 强大해짐 은 他將間에 猜忌를 자아 냈던 것이다. 이러한 同族들의 猜忌는 그로 하여금 離居 하고저 하는 心境의 變化까지 誘發시켰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朝鮮關係에서 阿敏은 하나의 두통꺼리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阿敏이 朝鮮에 대한 要求가 많을뿐 아니라 不旺師하여 至王束 할려했으니 王京에 王과 阿敏이 함께 居한다면 어떠한 待遇는 해야할찌 問題였고, 이러한 阿敏에 對한 감정의 좋지아니함은 敵將으로서의 마음도 있지만 朝鮮의 百姓들에게 剃頭 시킴으로 因하여 民族的인 立場에서도 감정이 좋지않음이 當然하다. 以上으로 阿敏의 全生涯를 살펴볼때 滿鮮間에 그의 성격 때문에 잘못 認識되어 질수도 있지만, 淸創業期의 中樞的인 役割을 했을뿐 아니라, 특히 朝鮮遠征時 首將으로서 兩國 交涉史에 硏究에 하나의 基調가 될까하여 硏究의 對像은 삼았으나, 期待한 대로 成果를 걷우지 못한것을 朝淸의 史料의 不足으로 □史料를 中心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며, 더욱이 그에 關한 思想이나 敎育에 關하여 普及하지 못한 것은 記錄의 全無로 因하여 추측에 불가할 것이므로 論外로 삼을 수 밖에 없음은 甚히 遺憾된 것이다. 앞으로 阿敏의 問題에 關해서 뿐 아니라 朝淸交涉史에서 阿敏以後 兩國의 交涉始末을 더욱 考察되어야 된다고 생각 되며 本硏究가 하나의 디딤돌의 역할이나마 할수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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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대학원 > 사학과 > Theses_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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