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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연행록의 전개와 특성연구

Title
18세기 연행록의 전개와 특성연구
Authors
김현미
Issue Date
2003
Department/Major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bstract
본 연구는 '자생적 근대'라고까지 표방된 18세기의 정신사와, 문학적 형상 변화를 가장 첨예하게 드러낸 문학적 성과물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였다. 기존의 연구사에서 연행록은 특정 작가의 특정 부분에 주목하기 시작하여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그 창작층의 면에서, 연행록 속에 담겨져 있는 주제적 측면에서, 또한 글쓰기 방식 면에서 뚜렷한 특성을 가지고 발전하여 북학이라는 실천적인 사상과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고, 학계에서도 이러한 현상에 주목하여 실기 문학으로서, 여행과 체험의 문학적 기록으로서 소개하기 이르렀다. 또한 대표적인 것들은 학위 논문과 소논문으로서 개별 연구가 하나 둘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기에, 이들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의 고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외교 기록'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해 지금까지 본격적인 문학적 연구가 미루어졌으므로, 비교문학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여행자문학론'으로서 작품을 분석하고자 했다. Ⅱ장에서는 연행록이 형성된 배경을 알기 위해, 조선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중국 체험인 공적 '교빙(交聘)'의 역사와 그 중에서 개인적 기록을 남긴 연행록 작자층을 살폈다. 1637년 청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 조선과 청의 외교 관계는, 약 50여 년 간의 조율 기간이 끝난 후인 18세기에 안정기로 접어든다. 이 시기 난두배, 상고(商賈)의 문제 등 '아래의 교역(下有而交易)'에 해당하는 경제 문제가 대두되었고, 사행을 간 인사의 필담이 조선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드러나 사행의 개별화·구체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18세기 교빙의 과정에서 지어진 한문 산문 연행록은 작자층과 연행록 특성상 세 시기로 삼분할 수 있다. 우선 1700년부터 1732년까지의 삼정사(正使 副使 書狀官)를 중심한 서인계 노론인사들, 특히 낙론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경화사족층인 '六昌'의 학적 동아리를 중심으로 지어지는 전기, 1737년부터 1777년까지 초기의 작자층이 이어지면서 잡지 형식의 심화라는 형상면의 변화가 두드러지는 중기, 1778년 이후 18세기 말까지 이른바 '북학파'의 본격적 연행록 창작과 비(非) 삼정사의 연행록 창작이 두드러지는 후기가 그것이다. Ⅲ장에서는 18세기 연행록에 나타난 상대국의 '이미지와 은유'가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서술대상으로서, 연행록 속에서 관심을 가지고 서술했던 문물들을 찾고 그것이 창출해 내는 은유와 이미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16세기 후반 허봉의 『조천기』등에서 드러나는 강한 이념지향성과 그로 인한 정학서원, 문묘 등의 주목에 반해 18세기 초기 연행록들에서는 국내의 산천과 명승고적들과 그 유람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강한 이념 지향성이 들어갈 수 있는 정녀묘, 이제묘 등의 역사 고적을 경관만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연행록 속의 주목 대상이 사상을 볼 수 있는 상관물 들에서 일상 문물로 넘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연행록들에서는 시사(市肆), 건축물의 제도, 음식물, 청인의 의관, 생활 도구 등을 파노라마적으로 소개하고 있어, 그런 것들이 있는 청은 '정신 문명의 전범' 보다는 '(물질) 문명의 덩어리'로 파악된다. 문명의 요소 중에서도, 그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골동서화'로 대변되는 고급 문화와 북경의 시사에서 볼 수 있었던 환희·연희의 대중 문화이다. 18세기 중기의 연행록에서는 소개하는 문물의 범위 면으로 보았을 때 대체적으로 초기에서 보여준 다양하고 넓은 '문물에 대한 관심'을 비교적 충실히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구조'에 대한 관심과 청인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교유에 대해 주목하고 있어, 이로 보는 청의 이미지는 '체계적으로 알아야 될 대상이며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다. 18세기 후기의 이른바 '북학파' 연행록들이 주목하는 문물들과 경험의 영역은 전·중반부의 관심 영역들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면서도 그것들보다 '특화·심화' 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단일 문물 둥에서도 북학파 연행록의 비상한 관심을 끈 것은 '벽돌'이다. 그들은 특히 '조성력'과 '영구함'을 이 안에서 찾았다. 이렇게 '움직이고' '조성해 내는' 이미지의 문물에 주목하는 연암은 아무 것도 없는 역사 유적을 보면서도 그 때 그 심정의 생생한 장면화를 해 낸다. 그러나, 이러한 문물의 주목 결과 '만들어 내고 흘러가는' 청의 이미지는 비 북학파 김정중, 이재학의 연행록 등에서는 다시 '연경팔경' 중심의 '壯觀' '奇觀' '古蹟' 이라는 '참 좋은 구경'의 대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Ⅳ장에서는 그 문물을 서술한 이면에 있는 작가의식(Subtext)의 성격과 전개양상을 알아보았다. 여기서는 하나의 전범이 되어 동시대 연행록 창작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각 시기의 대표작으로 그 대상을 한정했다. 이들의 작가의식은 중용 제 20장에서 誠에 이르기 위해 善을 선택하고 굳건하게 실천하는 과정으로서 제시된 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의 과정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이것은 조선에 와서 이황에 의해 '백록동 서원 학규'에 편입되어 학문하는 순서로서 인식된다. 결국 이러한 작가 의식의 흐름은 이 시기 연행록이 '淸'이라는, 중화인가 아닌가가 끊임없이 의심되는 존재를 분석하고 알아 가는 과정으로서 씌여졌고, 그것은 한 세기동안 끈질기게 발전적으로 진화하면서 또한 연행록을 쓰는 힘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기를 대표하는 노가재의 작가 의식은 遊와 博覽이다. 스스로의 연행을 壯遊라 표방했던 노가재는 연행록 안에서 다양한 遊의 모습을 제시하고, 그가 택한 遊는 향락적 유락이 아니라 遊山으로 특화된다. 이러한 遊(山)의 이면에서는 청의 문화를 널리 보려는 열망도 공존하였는데, 이것은 '기승절경'이 어떠한 도덕적 지표를 주지 않아도 멋있기만 하면 아무 재단도 없이 그를 받아들이는 농연그룹의 특징적인 遊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遊와 博覽은 그들의 심미의식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기를 대표하는 담헌 홍대용의 작가의식은 審問이다. 특히 문면 전체에 드러나는 것은 '묻다'가 더 많다. 묻는다는 것은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담헌은 자연스럽게 물을 수 있는 대상, 즉 사람들에게 주목하였다. 또한, 이러한 問이라는 태도에 선행하는 것은 審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사전적으로 '상세히 조사하다/ 깨닫다/ 자세하다' 라는 뜻이 있다. 특히 이 글자가 -問과 연용될 때는 '자세히'라는 부사적 함의가 강하지만, 여기서는 이것도 하나의 술어로 간주해도 될 만큼 '자세히 살피는' 태도가 문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담헌이 살피는 대상은 주로 묻고 분석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기존 여행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환희 혹은 유관의 경지로 대변되는 것과는 구별되면서 연행에서 성찰의 심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박지원의 작가의식은 심문 이후에 이어지는 愼思나 明辨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범위를 뛰어넘는 비약적인, 배움의 경지에서 깨달아 행하는 경지로 읽을 수 있다. 그가 열하일기 안에서 궁극적으로 알고싶어하는 대상은 淸이었는데, 그것은 단선적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의 목소리를 가진 청나라로 드러난다. 하여, 그를 알기 위해 분투한 '실상을 알기 위한 치열한 태도'는 다양한 듯한 북학파의 연행록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준거가 된다. Ⅴ장에서는 형상적 변화를 서술했다. 목적상 '장편 기행문'에 해당하는 연행록은, 상부에 보고하는 축일기사류의 전통과 이전 산문 연행록들의 관습에 따라서 일록형식으로 쓰여졌다. 18세기 전기에는 공적 임무 뿐 아니라 누대, 정자 등에 올라가 아래를 굽어보는 관람 행위와 노가재 연행록으로 대표되는 遊山 경험을 습합하면서 산수유기와 누정기의 글쓰기 방식을 습합하고 있다. 또한 '잡지체'가 등장하고 유행하였다. 잡지(雜識)란 독립된 항목에 대하여 짤막하게 서술하는 짧은 글들을 말하는데, 노가재에서 시작되어 도곡 이의현, 이의만에게서 충실히 이어졌다. 18세기 중반의 담헌연기는 하나의 표제 아래 표제와 관련된 사항만이 모여있는 기사체(紀事體)로 소개된다. 이른바 '기사체'의 등장 원인은 두 가지로 추측되는데 하나는 조헌(1574)의 『동환봉사』 같은 선례가 있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전대의 잡지 형식이 확대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잡지 형식의 확대와 심화는 이압의 연행기사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종반부의 『북학의』에도 영향을 준다. 또한 문답과 척독의 삽입이 있어서 연행록이 의론화될 수 있고, 그러면서도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효과를 주고 있다. 18세기 후기 북학파 연행록의 경우는, 연행이 그들의 중요한 경험이었던 만큼 그를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 면에서도 여러 가지 선택과 실험이 행해진다. 박제가의 『북학의』처럼 상소문 형식으로 된 표제화된 글들, 이덕무의 『입연기』처럼 이전의 일록형식을 비교적 충실히 반영한 것, 유득공의 『연대재유록』처럼 청인들과의 교유문답 기록을 중점적으로 옮긴 것 등 여러 가지 글쓰기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 북학파의 연행록은 일록체로 돌아가는 현상도 공존한다. 18세기 후반의 또 한가지 특징은 여러 가지 문헌, 각종 공문을 참고하여 정확히 쓰는 '고증적' 글쓰기 방식이다. 이는 주로 지리 고증의 내용에서 등장하며, '고증학'이라는 학문 조류가 서서히 조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Ⅵ장에서는 18세기 연행록의 문학사적 의의를 살폈다. 이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산문 연행록의 문학적 독립을 본격화 시켜서, 이전 해외 기행 문학으로서 시가 점하던 위치를 반분하였다. 둘째, 연행록이 서인계 노론, 낙론적 세계관을 가진 작자층의 생각을 대변하면서 자연스럽게 그것이 북학파의 문학으로 이어졌다. 셋째, 연행록 안에 숨은 지속적인 작가 의식이 어떤 질서를 따라 정리될 수 있을 정도로 유기적으로 상호 연결이 되었으며, 따라서 체계화된 이 의식들이 시대 정신에 영향을 주었다. 넷째, 한문 산문 글쓰기 방식의 다양한 실험과 영역 확대라는 측면에서 일록, 유기, 잡지, 필기체 등의 다양한 습합과 표현들은 18세기 한문 산문계의 고문론과 그에 따른 다양한 창작 못지 않게 문 발전에 기여하였다. ;This study can be traced to a question of which literary works were best to reflect classical scholars' ideas and the changes of literary features in the 18th century, when is called ' a spontaneous modern age'. The early studies on 'Yeonhaenglok'(books of travel to Ch'ing) mainly focused on particular works and particular writers. However, lots of 'Yeonhaenglok' shar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in respect of writers, themes and ways to write, reflecting the practical idea of 'bukhak'. They also have notable literary features. Recently, Some studies viewed 'Yeonhaenglok' as documentary literature or literary records of travel. The history of these new studies needs to be researched on. This study, in particular, dealt with 'Yeonhaenglok' as 'travelers' literature' as some recent comparative literature studies have done. It is meaningful given that not enough studies have been done about 'Yeonhaenglok' because of the attitude of considering them as diplomatic documents. ChapterⅡ dealt with the history of 'kyobing'(a diplomatic practise), which was the only way to travel to Ch'ing for Joseon' people, along with the writers who wrote 'Yeonhaenglok' after the travel. The Joseon dynasty and Ch'ing had a stable relations in the 18th century, when trade practises such as 'Nandubae' and 'Sanggo' were taking place and records of travel to Ch'ing had a significant effect on the Joseon society. 18th century's prose 'Yeonhaenglok' written in Chinese in the process of 'Kyobing' had evolved in three phases, factoring in their writers and other features. Firstly, 1700-1732, when the writers were chiefly classical scholars belonged to the Noron - Seoin faction. Many of them served as 'Samjeongsa' and were members of 'yookchang', a society based on the 'nocklon' idea. Secondly, 1737-1777. At that time, although there was no visible change in writers, the number of 'Yeonhaenglok' written in the form of 'jabjiche'(writing divided into classes according to the subjects) characteristically increased. Thirdly, 1778- the end of the 18th century, when lots of 'Yeonhaenglok' were written by scholars belonged to the 'bookhack' faction or not belonged to 'Samjeonsa' Chapter Ⅲ researched into the things depicted in 'Yeonhaenglok' because they reflect the writers' thought on Ch'ing. This chapter also studied the meanings of images and metaphors created by the depicts. In the later 16th century, 'Yeonhaenglok' stuck to ideology, which is confirmed in works such as "Chochungy" by Heobong that kept their eye on things such as 'jeonghakcseowon' (a private school in Ch'ing) and Confucian shrines. However, 'Yeonhaenglok' written in the earlier 18th century paid attention to scenic spots and places of historic interest. When they wrote about the tombs of 'jeongnyeo'(women who led a chaste life) and the tomb of 'Yi jea'(a classical scholar in the Geryeo dynasty), which had ideological meanings, they mainly focused on the scenic beauty of the places. Earlier 18th century's 'Yeonhaenglok' panoramically described things that they saw in Ch'ing such as 'sisa' (a market place), architectures, foods, attire and daily commodities, confirming that the writers viewed Ch'ing as 'a lump of material civilization' not as a model of moral civilization. The writers particularly kept eye on Ch'ing's high class culture, translated in 'guldongseowha'(antics), along with popular culture such as 'whanhee'(a tightrope dancing) and 'yeonhee'(a dramatic performance), carried out in 'sisa'. In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there was no discernible change in the rage of things that 'Yeonhaenglok' dealt with. However, writers especially pay attention to 'structure' and Ch'ing's people, which shows that the writers saw Ch'ing as an object that they should systematically study on and a place where people were living in. The 'Yeonhaenglok' written by 'bookhankpa' in the later 18th century succeeded to and developed the interests of earlier 'Yeonhaenglok''s writers. 'bookhankpa''s 'Yeonhaenglok' expressed special interests in bricks. They discovered constitution and permanence from bricks. 'Bak-Jiwon'(a scholar belonged to 'bookhankpa' and a representative writer of 'Yeonhaenglok'), who kept eye on things such as bricks that created the images of move and formation, pictured the emotions of people related to the places of historic interests where he visited. Yet, Ch'ing, which was described with the image of creation and flow by 'bookhankpa', became just an object of sightseeing in the 'Yeonhaenglok' written by non-'bookhankpa' such as Kim-Jeongjung and Lee-Jeahack. Chapter Ⅳstudied the subtext of 'Yeonhaenglok' and how it had developed during the 18th century. This study is just contained within the representative works of each phrase because they had significant effect on other works in their times as a model of 'Yeonhaenglok'. The development of the subtext was similar to the process of achieving 'seong'(誠:chastity). 'Jungyong'(a Classic of Confucianism) said 'seon'(善:goodness) should be chosen and done restlessly to realize 'seong', following the process of 'bakhak'(博學:wide knowledge) - 'simmoon'(審問:examination) - 'sinsa'(愼思:deep thought) - 'mungbyun'(明辨:a clear understanding) - ('dukhaeng'(篤行:practice)). In the Joseon dynasty, the process was viewed as the same to that of studying. Lee Whang(a scholar) applied the process to the curriculum of his private school named 'baerokdong seowon'. In conclusion, this development of subtext shows the fact that 'Yeonhaenglok' were written in the process of studying Ch'ing. Writers doubted whether Ch'ing deserved sinocentrism and they wrote 'Yeonhaenglok' in the process of researching into Ch'ing over the 18th century. 'No-Gajae' is a representative writer in the first phase. The subtext of his works can be condensed into 'yoo(遊;tramp)' and 'bakhak'(wide knowledge). His appetite for seeing Ch'ing' culture lies behind the subtext of 'yoo'. The subtext of Hong-Daeyong, who represent writers in the third phase, is summarized into 'simmoon'(審問:examination). Given that, it is no wonder that he expressed interests in people who could be asked. He also payed attention to things that can be examined and analyzed, which differentiate him from writers who just enjoyed sightseeing in the first phrase. Bak-Jiwon is a writer belonged to bookhankpa in the third phase. The subtext of his works does not exactly fall into the category of 'sinsa'(愼思:deep thought), 'mungbyun'(明辨:a clear understanding) that follow 'simmoon'. In fact, the subtext of his works includes the final stage of practice. Bak-Jiwon's 'Yeonhaenglok' show that it was Ch'ing' that he ultimately wanted to understand. Moreover, he thought that Ch'ing' had various aspects. At that time, Bak-Jiwon's trying to scope out Ch'ing' share with those of other writers belonged to 'bookhankpa'. ChapterⅤdealt with the development of the ways to write 'Yeonhaenglok'. The beginning of the 18th century, writers' experiences during travel to Ch'ing' were recorded day by day in 'Yeonhaenglok' in the form of 'chookilgisa'(books to brief superior authority) and earlier 'Yeonhaenglok'. As writers came to be interested in sightseeing, they were written in the form of 'Sansuyoogy' and 'Noojeonggy'. At that time, 'Yeonhaenglok' were also written in the form of 'jabjiche(writing divided into classes according to the subjects) by some writers such as No-Gajae, Do-Gok, Lee-Uihyun, Lee-Uiman. 'Damhunyeongy'( a 'Yeonhaenglok' in the 18th century) was written in the form of 'Kisache', which is a collection of short writings that have separate titles. It could succeed to the form of "Dongwhanbongsa" by Cho-Hyun (already written in the form of 'Kisache') or develop the form of 'jabjiche'. Lee-Yap's 'Yeonhaengkisa' also showed the development of the form of 'Kisache', along with "bookhakui" in the third phase. The form of 'Kisache' enabled 'Yeonhaenglok' to deal with discussion with people and expression of emotion. For bookhankpa, they tried to write 'Yeonhaenglok' in various forms as their travels to Ch'ing' were so important experiences for them. For example, there are "bookhakui" written by Pak-Jeaga in the way to memorialize the King, "ypuengy" written by Lee-Duckmoo in the form of a travel diary, and "yeondeajeayulick" written by Yu-Duckgong in dialogue with Ch'ing' people. To the contrary, Yeonhaenglok written by non-Bookhankpa had a tendency to be written in the earlier form of a travel diary. During the later 18th century, writers tried to wrote exact information in 'Yeonhaenglok', researching lots of books and official documents, which reflects the influence of china's 'Kosunghak'(a idea) Chapter Ⅵ studied the meanings of 18th century's 'Yeonhaenglok' in the context of the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Firstly, as prose 'Yeonhaenglok' were widely written, the number of poems decreased in the books of travel abroad. Before then, poem was predominant in the books. Secondly, 'Yeonhaenglok' reflected the idea of classical scholars belonged to the Noron -Seoin fraction and finally came to be 'bookhankpa's literature. Thirdly, the subtext of 'Yeonhaenglok' had coherently developed during the 18th century, having significant effect on the Joseon society. Forthly, 'Yeonhaenglok' were written in various forms of writing in Chinese such as 'illok', 'yougi', 'japgi' and 'pilgiche', contributing to the development of literature. The contribution is comparable with that of 18th century's 'Gomunlon' or other literary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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