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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皇 Gregory Ⅶ의 敎會改革과 政治的 關心

Title
敎皇 Gregory Ⅶ의 敎會改革과 政治的 關心
Authors
李信子
Issue Date
1965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聖敎皇 Gregory VII는 1085年5月25日 Salerno에서 死亡 하였다. 나는 正義를 사랑하였고 罪惡을 미워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追放生活속에서 죽노라. (Dilexi justitiam et odi inigwtatem ; propterea morior in exilio.) 이것은 임종시의 Gregory VII의 獨白이었고 지금은 그의 碑文에서 傳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生涯에 對한 含蓄된 表現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神의 恩寵이 함께 하기를 祈禱하였던 그는 Salerno 의 St. Mathew 聖堂 에 안정되었다. Salerno에서의 그의 죽음은 改革事業과 Gregory VII 自身을 爲해서도 悲運이었다. 그러나 絶望이라는 할 수 없겠다. 오랫동안의 Gregory VII의 努力으로 어느 程度 다시 回復한 威身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없는 것이다. Gregory VII의 後繼人 Victor II 以后로도 敎皇廳의 帝權에 對한 政策은 계속되었으며 先代敎皇의 事業完成을 爲하여 努力되었다. 더욱이 Henry가 등용하였던 官吏들은 別로 忠誠을 보이지 않았고, 아직도 破門된 狀態에 處하여 있는 Henry IV의 位置는 위태로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Henry IV의 在位期間에는 平和란 存在할 수 없을것이라는 事實을 그의 아들 Henry도 認定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그의 父王이 帝國의 父王이 帝國의 威身을 더以上 더럽히기 前에 退位해야 한다고 生覺하여 結局 Henry IV는 아들에게 ?기어 1106年 破門된 채로 追放生活 속에서 死亡하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先代 敎皇의 뜻을 이은 敎皇廳의 努力으로 Henry V 와 교황 Calixtus (1119-1124) 사이에 이루어진 Wormo 和約 (Concordat of Wormo)으로서 다시 敎皇廳의 위신은 回復되었으며 lay investiture 는 廢止 되었다. Gregory VII가 意圖하였던 바 俗權 위에 서는 敎權을 完全히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敎權과 俗權이 서로 양보 하므로서 Gregory VII가 別世한지 39年만에 Hildebrand 敎皇廳의 努力은 勝利를 걷운 것이다. 主敎 Calixtus 는 … 그대에게 … 聖職賣買에 依함과 暴力에 依함이 없이 그대의 參席下에 獨逸王國에 屬한 獨逸領域內에의 主敎, 修道院長들의 選出을 집행할 권리를 부여한다. …·더욱이 選出된 사람은 Scepter를 通해서 그대로부터 regalia가 급여된다 …· … 나는 神의 恩寵과, 聖 Rome 敎會와 우리의 主人이신 敎皇 Calixtus 의 恩寵으로 神에게, 神의 聖徒들에게, Peter 와 Paul 에게, 그리고 聖카토릭교회에 모든 ring과 stabb를 通 한 investiture를 양도한다. 今后로는 領主 및 王等 俗權에 依한 聖職에의 任命은 禁止되고 다만 그들은 選出만을 집행할 수 있게 되었다. 王黨派의 著述家들이나 Gallican 著述家들은 一般的으로 Gregory VII는 너무도 自己의 Rome 敎皇의 地位를 높이 보고 있고 敎會와 世俗의 모든 것들로 하여금 그의 발아래 굴복케 하였다고 말하여였다. 또한 Bower 는 그의 Rome 敎皇史에서 Gregory VII가 「絶對的, 世界的 獨裁主義」를 이루려고 애썼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Gregory VII 當時의 皇帝派들의 見解와 닮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 Gregory VII의 關心이 어떻게 變動되어 갔는가를 考察하여 보았거니와 그는 Dictatus Papae 에서 明確히 그의 敎皇職에 對한 明分을 밝혔고 그것은 오랜 Rome Catholic 敎會의 傳統이 되어온 것이다. 그는 數次의 宗敎會議를 召集하여 主敎들과 더불어 敎會改革을 論議하면서 그 宗敎會議를 通한 法令을 發表하여 끊임없이 敎會의 改革을 試圖하였던 것이다. 敎會의 內部를 改革하므로서 잃었던 敎皇廳의 改革을 다시 찾고저한 Gregory VII의 努力은 純粹한 敎會問題에서 出發하여 政治 問題에까지 이르렀으니 그것은 모든 敎會의 腐敗의 原因中의 一部는 lay investiture에 依함이었던 것이다. Gregory VII 는 Saxon族反亂時에 Henry IV의 변심을 보았고 1076年 Christmas eve에 있었던 Cencius 의 거짓된 행위를 겪었으며 더욱이 1077年 Canossa에서 그렇게도 참된 態度로 참회하였던 Henry IV의 변절을 잇달아 겪으면서 끊임없이 그들을 容恕하고, 참회하기를 바라면서 Henry IV에 對立했던 Gregory VII는 ?고 帝國主義的인 性格의 人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中世 基督敎 社會史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의 重要性은 充分히 認定되어 있음에도 그의 人格, 事業은 여러 論難의 對象이 되어 왔다. 그는 一面 優秀 著述家로서 敎會改革運動의 고무자로서 重要視 되었으며, 他面 Bonibace VIII 와 같은 野心 많은 敎會政治家였다고 여겨 졌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 두 개의 見解가 그릇된것이라고 認識되어가고 있다. 그는 敎會改革의 最初의 着想者가 아니며 그것은 Mosenmoutier 의 Humbert 가 그 改革 運動의 理論家 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單純히 敎會의 强力한 行政家였을 뿐만 아니라 예언자적인 使命을 깊이 깨닫고 철저한 信念을 갔고 있던 사람이었다. 때때로 머리를 굽혀 自己行動을 후회하고 용서를 바라며, 또 다시 反抗하면서 自己의 正當하다고 生覺하는 主張을 내세우곤 한 Henry IV 와 달리 그는 한번도 自己의 行動을 후회하거나, 주저하는 일이 없었고 그는 正義를 爲한 그의 鬪爭을 爲하여 努力한 것이다. 다만 그는 그가 교황직에 즉위할때에 自身이 그 일을 맡는다는 自體에 對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Napoleon 은 내가 만일 Napoleon 이 아니었다면 나는 Gregory VII가 되기를 願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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