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 38 Download: 0

조선시대여악고

Title
조선시대여악고
Authors
박재희
Issue Date
1975
Department/Major
대학원 무용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I will investigate in this thesis The women's music (女樂) , which has an important position in the Chosun Music system. This will throw further light not only upon the concept of The women's music but upon its contribution to the history of Korean dancing though the study of th origin of The women's music and th process of its development as well as the two claims of its maintenance or abolition in the Korean music history. The women's music means the performance and the allotment of singing and dancing by women at the court occasions. It is one of old traditions handed down from Koryo Dynasty. In general the early period of each dynasty used to succeed the preceding dynasty's music. The Rhee Dynasty took over the music of Koryo Dynasty. But the change of Rhee Dyansty's political system and its belidf that ""Etiquette and music is the Koryo Dynasty and in the creation of a new styled dancing. However, most part of this women's music should be abolished in the court feast brought about th replacement of The women's music by The Boy's Dancing(舞童). But it also had many difficult problems to be succeeded so that The women's music was used again. From then to the reign of the King Ko Jong, The Boy's music(男樂) was used of the court feast for men, The women's music was used of the feast for women. In the reign of the King Yeon San, The women's music was most flourishing and the feast was the most outrageous one that has ever been. In this time, the original music which had been established for one century since the national foundation was trampled down under the reckless behavior of the King Yeon San. When Im Jin Japanese invaion broke out in the reign of the King Sun Joo, most dancers died or were captured by the enemy so that The women' music was completely destroyad. In the reign of the King Kwang Hae, the system of The women's music reestablished for the feast of the Empress dowager, which continued to the reign of the King Kyo Jong. The appeal to the king that The women's music should be abolished had been continued but it was succeeded for five hundred years of the Rhee dynasty except in the reigns of the King Se Jong and the King Sun Joo. We should remember that the system of women's music has many faults but it left us a great properties. It is not too much to say that a lot of sons and about fifty kinds of court dancing have been succeede by The women's music.;본 고는 우리나라 악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악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여악의 기원과 설치목적 등을 살펴보고 역대로 분분하던 여악의 존폐양설을 살펴봄으로써 여악의 개념을 좀 더 명확하게 밝혀보는 동시에 한국무용사에 어떠한 공헌을 하였는가를 알아보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여악이란 고려때부터 국중 행사에 여자로서 가무를 분장하여 거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여악은 주로 궁중연향에 관여하였으므로 대부분 종실 재상을 상대한 까닭에 교양이 높아야 했고 가무도 격조 높은 것이라야 하였다. 이 여악은 고려 이래의 오랜 유풍이다. 고려조에는 팔관회와 연등회 등 대연을 축하하는 절차를 갖추기 위하여 대체로 문종때 송으로부터 대량으로 수입한 교방악을 사용하였다. 즉 문종 27년에 교방 여제자 진경등 13명이 답사행가무를 연등회에서 상연토록 상주하였고 같은 해에 교방 여제자 초영등이 새로 전해온 포구악과 구장기별기를 팔관회에 사용하였고 31년에는 왕모수가무를 연등회에 사용한 것이 교방악의 효시라 하겠다. 이 외에 수연장 연화대 오양선 헌선도 곡파 등이 연행되었다. 어느 왕조나 할 것 없이 그 초기에는 전조의 악을 그대로 인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조초에 와서도 역시 고구려의 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정체가 바꾸어지면 차츰 차츰 변모해 가는 것만은 필연적인 사실이고, 더욱이 고인들은 “일대지흥필유일대지제작” 이라는 신념과 “심음이지악심악이지정”이라는 생각이 투철하였기 때문에 수명지군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고려조의 정재들이 조금씩 변화하여 갔고 또한 새로운 정재를 창제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에도 이 여악의 제도는 그대로 계승되어 국중 행사, 즉 연향때나 외국의 사신들을 접견할 때, 또는 봉명사신들의 송별연등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역대로 여악의 존폐에 관한 시비론은 끊일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세종조에 박연 등이 연향에 여악을 쓰지 말자고 상소한 결과 여악 대신 무동을 궁궐에 갖추게 하였는데 이것이 곧 남악의 발단이다. 그러나 남악도 이어가기 어려운 폐단이 있었으므로 다시 여악을 쓰게 되어 이로부터 고종말까지 대체로 외연에는 남악을 쓰고 내연에는 여악을 쓰게 되었다. 특히 여악의 기세를 올린 것은 연산조인데 연산군의 방약무인 유연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태조 건국으로부터 1세기 동안 쌓아올린 음악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그 대신 음악이 성행되어 성종조까지 겨우 정리된 악무는 하루아침에 붕괴되고 말았다. 이것이 선조조에 와서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악공과 관현맹인 그리고 무원 등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없어져 버렸으므로 여악도 완전히 혁파되었다. 그러나 광해조에 대비의 진풍정을 위해 여악은 다시 복설되어 고종조까지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여악을 혁파하자는 논의는 계속되었으나 완전히 혁파한 시기는 세종조와 선조조의 잠시 뿐이고 그대로 이조 500여 년 동안 이어오게 된 것이다. 이 여악제도는 많은 폐단이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으나 우리에게 더욱 큰 유산을 남겨주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수많은 노래와 50여종에 이르는 정재들은 거의 여악에 의해서 전승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경중 각사비 또는 충청. 경상. 전라도 즉 삼남읍비 중에서 나이 어리고 영특한 자를 선상하였고 성재 후에는 다시 본읍으로 돌려 보냈으므로 경중에서 연행되는 가무는 이들을 매개로 하여 각 지방에도 널리 보급되었던 것이다.
Fulltext
Show the fulltext
Appears in Collections:
일반대학원 > 무용학과 > Theses_Master
Files in This Item:
There are no files associated with this item.
Export
RIS (EndNote)
XLS (Excel)
XML


qrcode

Items in D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BROW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