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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九州地方에 移植된 朝鮮朝 粉靑技法

Title
日本 九州地方에 移植된 朝鮮朝 粉靑技法
Other Titles
(The) Hideyochi's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ceramic art of the Yi Dynasty transplanted in japan
Authors
金明蘭.
Issue Date
1981
Department/Major
대학원 응용미술과자수전공
Keywords
도자기전쟁도자문화이조분청사기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It is a well-known fact that Korea suffered heavy losses due to the Hideyoshi's Invasion and the subsequent war of the year which continued from 1592 through 1598. The Manchu war of 1636 eventually resulted in the fall of the dynasty of the Yi Kings. The ravages of the protracted War and Japanese plunder of numerous cultural properties bitterly devasted the whole country of Korea. Ceramic culture was not exceptional and "Buncheong" once flurished during this period disappeared while pottery remained in existence alone. Japan inflicted severe destruction upon Korea also suffered heavy losses, but their pre-calculated plot to plunder Korean culture had a great effect on its migration to Japan. This can be fully justified by the fact that Japanese people called the Hidevoshi's Invasion of Korea in 1592 as "the ceramic war" or "the printing revolution." The transplantation of ceramic culture of Korea in Japan was a conspicuous phenomenon in the migration of Korean culture to Japan. The Japanese generals stationed in Korea Kidnapped a number of Korean potters in their stationing areas, especially Gyeongsangdo and Jeonlado provinces, to Japan. These captive potters's were treated with the utmost courtesy in order to have them introduce their advanced ceramic art in Japan. Though a war brings about the migration and intermix of culture, the war provoked by the Hideyoshi's Invasion of Korea was unparalled in history in that it accomplished successfully the transplantation of culture and civilization of other nation Most of the Japanese generals who invaded Korea were the feudal lods from the provinces of Kyushu of Japan and therefore the captive Korean petters's were mainly scattered in that ragion. This region is the very origin of the Japanese modern ceramic industry which marked the turning point in the ceramic history of Japan. Among the porcelain manufactured from the kilns which were operated by the Korean ceramists who settle down in the provinces of Kyushu, "Karatsu ware," "Takatori were," Satsuma ware," "Hagiware," "Agano ware," "Kouda ware," and "Arita ware" became famous. It is especially noticeable that the name of "Karatsu" had become a synonym for porcelain together with "Sedo" situated west of Japan proper. The "Satsuma ware" Was as highly valued as a typical porcelain of Japan in the West and the "Hagi ware" was numbered second, "pleasure" the first and "Karatsu" the third favorites among the circles of Japanese tea cult. Thus, most of the celebrated ceramics of Japan are of the Korean origin and the brilliant accomplishments of the Korean pottests left their mark in the ceramic history of Japan. The ceramic works of the Korean potters's who were naturalized as Japanese citizens were deservedly similar to those of Korea.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there existed none of porcelain like pottery in Japan of those days. Pottery was manufactured. for the first time in Japan, by Korean potter's Lee Sam Pyeong and Korean stype kiln was introduced. There was available only hand potter's wheel as a forming device in theses days, but the Korean potters's introduced foot potter's wheel which had its reverberation in the ceramic world of Japan. The technique widely prevailed for the Korean style kiln was also "Buncheong" art or the "Mishima" type applied extensively in the early years of the Yi dynasty. This technique could be seen every place where the Korean potters settled down. The "Buncheong" once disappeared from Korea during the Hideyoshi's invasion was revived in Japan by the potters from the southern Korean origin. This kind of "Buncheong" was accepted simply as "Mishima replica" and not highly valued by Japanese people for the reason that it was not manufactured in Korea. However, it can be fully seen from the Japanese "Buncheong" works investigated that the technique applied to them was transmitted entirely from Korea and transformed in Japan. Even though they may not be directly connected to the "Buncheong" chronicle of the Yi dynasty, they are considered to provide suggestive data of their historical background. As discussed above, the Japanese "Buncheong" succeeded to that of the Yi dynasty and therefore there is no difference in particular in technique and production aspect. However, there are some Japanized works, such as "Surie," "Kushime" and a variety of "Hageme," which were newly developed by Japanese themselves. The transplantation of ceramic art of the Yi dynasty in Japan can be substantially reaffirmed through the present comparative study.;壬辰·丁酉亂(1592-1598)이 朝鮮으로 하여금 무참하리 만큼 큰 타격을 받고 그 後의 丙子胡亂과 함께 李氏王朝를 돌이킬 수 없는 衰亡의 길을 걷게 한 元兇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日本의 文化財약탈과 함께 오랜 戰禍로 朝鮮全國은 廢墟가 되고 陶磁文化도 例外가 아니어서 盛行했던 粉靑砂器가 자취를 감추고 白磁만이 겨우 그 命脈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朝鮮에 막대한 破壞를 加한 日本도 피해는 컸다 하지만, 미리 計劃되었던 文化의 약탈은 日本에 朝鮮文化의 移動이라 할 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이며, 그것은 斷的으로 壬亂을 가리켜 日本人들이 "陶磁器戰爭"이니 "印刷革命"이니 하는 말로도 證明이 된다. 朝鮮文化의 日本移動중에 陶磁器文化의 日本 移植은 가장 두드러진 現象으로 朝鮮에 駐屯했던 倭將들은 그 駐屯地域(특히 慶尙, 全羅道)의 수 많은 陶工들을 日本으로 拉致해 갔으며 그들에게 극진한 待遇를 해 주어 조선 陶磁技術을 日本에 誘致시켰다. 戰爭이란 文化를 移動시키고 混合시키는 것이긴 하지만 한 번의 戰爭에서 어느 하나의 部分에 對하여 이처럼 具體的이고도 현저한 文化의 移植·開化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古今을 通하여 歷史上 그 類例를 찾을 수 없는 일 이었다. 朝鮮을 侵略했던 日本倭將들의 대부분이 日本九州地方의 諸藩主들이었으므로 끌려간 포로, 陶工들 역시 주로 九州地方에 分屬되었다. 바로 이 九州地方이야말로 日本陶磁史의 轉換點을 이루는 日本近世陶業의 源流가 되는 곳이다. 日本 九州地方에 定着하여 開窯하였던 수많은 朝鮮陶工들의 가마들 중에 유명한 것은 唐津燒, 高取燒, 薩摩燒, 萩燒, 上野燒, 高田燒, 有田燒 등이며, 그 중에 "唐津"은 日本에서 西쪽의 "瀨戶"와 함께 陶器의 代名詞로까지 쓰여질 정도이고, "薩摩燒"는 西洋에서 日本의 陶磁器를 代表할 만큼 크게 珍重되는 것이며, "萩燒"는 日本 茶人世界에서 一樂二萩三唐津으로 꼽히는 것이다. 이렇듯 日本의 有名한 陶磁器는 대부분이 朝鮮系 陶磁들인 것이며 그 業績은 실로 多大한 것으로 日本陶磁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日本에 定着, 歸化한 朝鮮陶工들의 作品은 당연히 朝鮮것과 비슷하다. 그중에 重要한 것은 그때까지 日本엔 白磁, 즉 磁器라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조선陶工 李參平에 依해 처음으로 만들어 졌다. 가마(窯) 역시 朝鮮式 登窯가 보급되어졌고, 成形手段이라곤 手陶車(손물레)뿐이던 곳에 脚車(발물레)가 普及이 되어 日本 陶業界에 커다란 反響을 일으켰던 것이다. 또한 朝鮮系 가마에서 널릴 流行이 된 技法은 李朝初, 즉 壬辰亂 前까지 盛行했던 紛靑技法 소위 「三島」樣式이었으며, 이 기법은 朝鮮陶工들이 定着한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壬亂을 계기로 자취를 감추었던 李朝紛靑砂器가 바다건너 日本땅에서 南部朝鮮系陶工들에 의해 면면히 그 흐름을 이어 가고 있었던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日本에서의 初期 朝鮮系統의 窯에서 만들어진 作品들을 수집해 본 결과, 우리의 紛靑技法이 고스란히 傳承 傳化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러한 것을 李朝紛靑砂器의 編年에 直結시킬 수는 없을지라도 그 흐름을 짐작케 해주는 좋은 資料가 될 것으로 思料된다. 九州地方이 중심이 되는 朝鮮系窯중에서도 唐津系窯에서 가장 粉靑沙器가 流行이 되었다. 그 作品중에는 李朝작품과 區別하기 어려울 정도의 것도 있고, 새로운 技法이 案出되기도 했다. 摺繪紛靑, 櫛目紛靑, 刷毛目變形등이 和樣化되는 것임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한편 李朝粉靑沙器와의 比較를 통해서 李朝陶技가 日本에 완전히 移植되었음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었다. 이러한 硏究 結果가 이 分野를 硏究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參考資料로써의 구실을 할 수 있길 희망하며 不足한 점은 앞으로 더욱 연구하여 좋은 資料가 되도록 노력할 것을 밝혀둔다. 粉 壬辰·丁酉亂(1592-1598)이 朝鮮으로 하여금 무참하리 만큼 큰 타격을 받고 그 後의 丙子胡亂과 함께 李氏王朝를 돌이킬 수 없는 衰亡의 길을 걷게 한 元兇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日本의 文化財약탈과 함께 오랜 戰禍로 朝鮮全國은 廢墟가 되고 陶磁文化도 例外가 아니어서 盛行했던 粉靑砂器가 자취를 감추고 白磁만이 겨우 그 命脈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朝鮮에 막대한 破壞를 加한 日本도 피해는 컸다 하지만, 미리 計劃되었던 文化의 약탈은 日本에 朝鮮文化의 移動이라 할 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이며, 그것은 斷的으로 壬亂을 가리켜 日本人들이 "陶磁器戰爭"이니 "印刷革命"이니 하는 말로도 證明이 된다. 朝鮮文化의 日本移動중에 陶磁器文化의 日本 移植은 가장 두드러진 現象으로 朝鮮에 駐屯했던 倭將들은 그 駐屯地域(특히 慶尙, 全羅道)의 수 많은 陶工들을 日本으로 拉致해 갔으며 그들에게 극진한 待遇를 해 주어 조선 陶磁技術을 日本에 誘致시켰다. 戰爭이란 文化를 移動시키고 混合시키는 것이긴 하지만 한 번의 戰爭에서 어느 하나의 部分에 對하여 이처럼 具體的이고도 현저한 文化의 移植·開化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古今을 通하여 歷史上 그 類例를 찾을 수 없는 일 이었다. 朝鮮을 侵略했던 日本倭將들의 대부분이 日本九州地方의 諸藩主들이었으므로 끌려간 포로, 陶工들 역시 주로 九州地方에 分屬되었다. 바로 이 九州地方이야말로 日本陶磁史의 轉換點을 이루는 日本近世陶業의 源流가 되는 곳이다. 日本 九州地方에 定着하여 開窯하였던 수많은 朝鮮陶工들의 가마들 중에 유명한 것은 唐津燒, 高取燒, 薩摩燒, 萩燒, 上野燒, 高田燒, 有田燒 등이며, 그 중에 "唐津"은 日本에서 西쪽의 "瀨戶"와 함께 陶器의 代名詞로까지 쓰여질 정도이고, "薩摩燒"는 西洋에서 日本의 陶磁器를 代表할 만큼 크게 珍重되는 것이며, "萩燒"는 日本 茶人世界에서 一樂二萩三唐津으로 꼽히는 것이다. 이렇듯 日本의 有名한 陶磁器는 대부분이 朝鮮系 陶磁들인 것이며 그 業績은 실로 多大한 것으로 日本陶磁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日本에 定着, 歸化한 朝鮮陶工들의 作品은 당연히 朝鮮것과 비슷하다. 그 중에 重要한 것은 그때까지 日本엔 白磁, 즉 磁器라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조선陶工 李參平에 依해 처음으로 만들어 졌다. 가마(窯) 역시 朝鮮式 登窯가 보급되어졌고, 成形手段이라곤 手陶車(손물레)뿐이던 곳에 脚車(발물레)가 普及이 되어 日本 陶業界에 커다란 反響을 일으켰던 것이다. 또한 朝鮮系 가마에서 널리 流行이 된 技法은 李朝初, 즉 壬辰亂 前까지 盛行했던 紛靑技法 소위 「三島」樣式이 었으며, 이 기법은 朝鮮陶工들이 定着한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壬亂을 계기로 자취를 감추었던 李朝紛靑砂器가 바다건너 日本땅에서 南部朝鮮系陶工들에 의해 면면히 그 흐름을 이어 가고 있었던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日本에서의 初期 朝鮮系統의 窯에서 만들어진 作品들을 수집해 본 결과, 우리의 紛靑技法이 고스란히 傳承 傳化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것을 李朝紛靑砂器의 編年에 直結시킬 수는 없을지라도 그 흐름을 짐작케 해주는 좋은 資料가 될 것으로 思料된다. 九州地方이 중심이 되는 朝鮮系窯중에서도 唐津系窯에서 가장 粉靑砂器가 流行이 되었다. 그 作品중에는 李朝작품과 區別하기 어려울 정도의 것도 있고, 새로운 技法이 案出되기도 했다. 摺繪粉靑, 櫛目粉靑, 刷毛目變形 등이 和樣化되는 것임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한편 李朝粉靑沙器와의 比較를 통해서 李朝陶技가 日本에 완전히 移植되었음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었다. 이러한 硏究 結果가 이 分野를 硏究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參考資料로써의 구실을 할 수 있길 희망하며 不足한 점은 앞으로 더욱 연구하여 좋은 資料가 되도록 노력할 것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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