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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 近代 駐韓 美國公使 硏究 (1883-1905)

Title
韓國 近代 駐韓 美國公使 硏究 (1883-1905)
Authors
손정숙
Issue Date
2004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bstract
본 고에서는 한국 근대 주요한 활동을 펼친 대표적인 4명의 미국공사들 즉, 푸트(L. H. Foote), 포크(George C. Foulk), 씰(John M. B. Sill), 알렌(H. N. Allen)에 대한 사례 연구를 통해 주한미국공사관의 외교활동과 그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근대 한미 양국의 외교 교섭의 실질적 창구 역할을 담당했던 주한 미국공사들은 한국에서 미국 정부의 정책을 집행하는 공식 미국 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한국왕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때로는 한국 정치 세력과 연합하여, 한국 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특히 당시 미국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외교적 관심과 비교할 때, 미국공사들의 한반도에서의 위상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비공식 자문역이라 불릴 만큼 한국왕실에서 그 비중이 컸고, 주한 외교관들 사이에서도 수장(首長, doyen)으로서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주한 미국공사들의 활동에 대한 주목은 실질적인 차원에서 근대 한미 외교사를 규명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종래의 연구는 주한 미국공사들을 고종의 주권 수호 노력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결과 본국 정부의 견책, 때로는 소환을 당했던 '친한적(親韓的)' 미국인들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공사들의 외교 활동을 '친한적'인 그들의 개인적 성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들은 미국정부가 임명해 한국에 파견한 미국의 외교관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다시 말해 미국공사란 직책은 결코 '친한적' 일 수 없는 위치였다. 따라서 주한 미국공사들이 한미 외교 22년간(1883-1905) 일관되게 한국의 독립 보전을 지지하는 등 '친한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면, 이것은 주한 미국외교관들이 추진한 하나의 외교 전략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종래 주한 미국공사들과 본국 정부는 그 외교정책에서 상호 이반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넓은 범주에서 살펴본다면 주한 미국공사들은 본국 정부의 외교 정책 선상 안에서 움직인 것으로, 즉, 당시 본국과 주한 미국공사관과의 입장 차이는 현지 외교관이 미국의 정책을 한반도에서 구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방법상, 기술상의 견해 차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4명의 개별 사례연구를 통해 주한 미국공사관은 한미 22년간 일정한 독자적인 외교적 전략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1899년 국무장관 해이가 발표한 문호개방정책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열강들의 위협 속에서 자치권을 위협받고 있던 한반도의 상황에서 미국공사들은 한국의 영토적, 행정적 보전이 미국의 권익 증진에 가장 좋은 기본 조건이라는 판단했고, 한미조약을 근거로 본국정부에 보다 적극적인 한반도 문제 개입을 촉구했다. 또한 이들은 한국의 자치권에 위해가 되는 그리고 배타적 권익 독점으로 미국의 권익에 걸림돌이 되는 열강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주한 미국공사관의 움직임은 당시 자주 독립 정책을 추진하던 한국왕실의 의도와 부합되는 것으로 한반도에서 미국공사관과 미국의 입지를 강화시키는데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푸트공사 이래 알렌공사까지 미국공사들은 한국왕실과 긴밀한 우호를 유지하면서 시기에 따라 반청, 반일, 반러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그 이유는 미국공사들이 한국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진정한 옹호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시장개방과 균등한 무역기회 확보라는 목적에서 동인된 문호개방의 외교 전략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즉, 주한 미국공사들의 외교활동은 '친한적'인 성격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미국의 권익 증대와 보호라는 측면에서 기본 동인된 것으로 이 목적 실현을 위해 한반도에서 실리적인 정치, 외교 활동을 펼쳤던 것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1899년 이후 고종이 측근세력 중심으로 절대군주권을 확립하고 대외적으로 세력균형정책을 펼치면서 미국의 대한반도 영향력이 감소하자, 당시 공사였던 알렌은 한국의 자치능력에 회의를 보이며, 보다 강력한 열강의 간섭이 미국의 이권에 더 호의적일 것이라는 논지로 이를 지지하기도 했다. 또 러일전쟁기 알렌의 친러 반일 외교정책은 일본이 경제적인 면에서 장래 미국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이라는 관점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요컨대, 주한 미국공사들의 외교활동의 주 목적은 시장개방과 한반도내의 모든 이권 경쟁에서 다른 열강들과 함께 동등한 기회를 보장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기본 전제가 한국의 독립유지와 근대화였다. 이와 같은 외교적 구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첫째,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에 대한 미국공사관의 외교 방침은 시기에 따라 변화했다. 그 시기에 한국에서 배타적 우위권을 독점하고 있는 나라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또한 한국에서 동등한 상업 기회의 확보를 방해하는 외국 세력들을 저지하기 위해 한미조약의 규정에 따라 미국정부는 한국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때로는 한국을 위해 거중조정을 해 줄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본국의 외교정책에서 한반도의 경제적, 전략적 가치는 작았기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며 한국의 동맹국이나 카운슬러의 역할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즉, 미국은 한미수교이래 1905년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할 때 까지 "한국이 중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거나 일본에 의해 병합되거나 또는 독립국가로 남아있거나 우리는 잃을 것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던 것이다. 둘째, 주한 미국공사들의 외교 구상은 당시 한국왕실의 정책 방향과 부합되는 것이었다. 한국 근대 최고 통치권자였던 고종은 열강들의 세력을 끌어들여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한국의 자주독립보존과 근대화라는 두 가지 당면 과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고종은 특히 영토 야욕이 없는 '공평무사'한 정책을 표방하고 있던 강대국 미국의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이를 위한 한 방편으로 미국에게 이권을 양여하고 미국 자본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이는 한국의 근대화 정책 추진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즉, 고종은 미국이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침탈에 맞서 한국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방어해줄 한국의 완충역(buffer)으로 기능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한편, 한반도에서 미국의 권익 향상이 주 임무였던 미국공사들에게 이 같은 고종의 대미 외교정책은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적극 지원해야 할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공사들은 본국 정부의 무관심속에서도 한국 주재 미국 외교관으로서 고종으로 하여금 호의적인 대미 인식 그리고 인미정책(引美政策)을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호의와 노력을 보여주었다. 셋째, 미국공사들은 자신들의 외교 정책 수행에서 '미국의 한국 근대화 지원'이라는 명분을 강조하였다. 공사들은 공통적으로 한반도에서 미국이 서구 문명의 전달자로서 한국의 진보와 개혁을 위한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나아가 자신들은 문명화된 미국인으로서 미개화된 한국의 진보와 독립을 이끌어줄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그들의 외교적 목적 달성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즉, 미국공사들은 "미국은 한국의 근대화 지원국"이라는 호의적인 이미지를 부각시켜 한국정부의 미국형 근대화 정책 추진을 지원, 조장했다. 이러한 미국공사관의 전략은 효과적이었고 그 결과 미국은 타 열강들보다 한반도에서 성공적인 경제적, 문화적 진출을 할 수 있었다. 넷째, 미국공사들이 독자적인 외교 전략을 구상하고 이를 주도적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미국 정부의 동아시아 외교 정책의 특징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미국 정부는 아시아 지역의 외교관들에게 확고한 훈령을 내리기 보다 현지 외교관들의 자유재량에 따라 외교 정책을 추진해 나가도록 했다. 이와 같은 개인주의적인 성격의 외교 형태가 주한 미국공사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외교 정책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주한 미국공사들은 본국의 지원이 부재한 가운데서도 문호 개방 정책이라는 외교적 전략을 통해 한반도에서 미국의 국익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이들의 외교 전략은 고종의 외교 정책과 일치되는 점이 많았고 그 결과 미국공사관의 한반도내에서의 위상은 확고해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한국 근대 22년간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크게 강화되고 미국에 대한 호의적인 이미지 형성에 기여하였다. 청일 전쟁 이후 대자본의 이권 사업이 열강들에게 개방되는 시점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수익성 있는 사업을 장악할 수 있었던 나라가 미국이었다. 그리고 이 움직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미국 외교관들이었다. 이들은 "동양의 나라에서 신뢰받는 자리에 있는 외국인들의 영향력은 그들 본국정부의 영향력을 강화시킨다." 라는 신념 속에서 한국 정부의 미국인 고문관 초빙 정책을 적극 지원해 줌으로써 한국 정치, 외교, 행정, 기술 등의 분야에서 많은 미국인들이 활약할 수 있었다. 또한 본국 정부의 선교 지원 정책에 따라 미국공사관도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을 지원해 주었고 그 결과 한국은 아시아에서 개신교 선교사업이 가장 발달한 나라중 하나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주한 미국공사들은 실질적 정책 추진자로서 근대 한미 외교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들은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에 맞추어 본국의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문호 개방이라는 원칙 하에서 외교 전략을 추진했음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19세기말 20세기 초 한국에서 구현된 미국 외교 정책의 한 특징이었던 것이다. 비록 한국 주재 외교관들이 전개한 외교 전략은 본국정부에 의해 저지되었지만 현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들 외교관들의 활동은 한국 근대 한반도에서 미국적 요소를 구축, 확장시키는데 상당히 공헌한 것으로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activities of American ministers in Korea and make a historical evaluation on their diplomatic strategy in modern Korea. To achieve these purposes four American ministers were chosen and their activities were closely examined. Those are L. H. Foote, George C. Foulk, John M. B. Sill and Horace N. Allen. The American diplomats who resided in Korea for the years 1883-1905 didn't only perform their official duties as an American representative but also they exercised great influence on the politics of modern Korea with having a good relation with Korean court as well as some Korean political factions. Particularly, their position in the Korean peninsular was very remarkable when we consider that Washington authorities were indifferent to Korea. Korean court regarded them as an unofficial advisor. Moreover, The American ministers as a doyen of the diplomatic body led western diplomats resided in Seoul. In a way, they were a hub of the diplomatic agents in Korea. The study of American ministers could contribute to the understanding of actual Korean-American relation for the modern period in that they played an actual role in promoting the diplomatic relation between Korea and America. The first United States representatives to Korea arrived in Seoul in 1883. In 1905 Korea lost control of her foreign affairs to Japan and the United States withdrew its legation from Korea. It is said that American ministers who had taken care of the United States legation during the twenty-two years represent a 'pro-Korean' American of those days because they advocated Korea's integrity and independence, otherwise the U. S. government didn't have much interest in that questions and rather admitted Japan's protectorate over Korea in 1905. But I think it is problem that we understand activities of American ministers as personal with separating them from their home country's policy. Their position representing American government could not make them 'pro-Korean,' or real advocators of Korea's independence. Rather, we can say that is a diplomatic strategy of American diplomats in Korea if they consistently supported Korea's efforts to preserve its political independence and territorial integrity. The U. S. legation had maintained its own diplomatic strategy of which feature was very similar to the Open Door Policy driven by the Secretary, John Hay in 1899. In a sense, we can say the American diplomats in Korea were a pioneer of the Open Door Policy of the year 1899. They thought Korea's territorial and administrative preservation was the best condition for the America's interests in Korea. This is why they supported King Kojong's efforts for Korea's modernization and independence and were antagonistic to the countries which held superior powers over the Korean government and would like to interfere with American concessions. Especially, they believed American government was responsible for Korea's territorial integrity as well as its development according to the regulations of the American-Korean treaty in 1882, and urged the Washington government to give stronger interests to Korea. In short, the main purpose of diplomatic activities of the American ministers to Korea was to open a country to foreign intercourse and obtain equality of opportunities particularly in economic area. For this purpose, Korea's independence and modernization were prior conditions. Now, we will discuss the characteristics of strategies conducted by the U. S. ministers for the modern Korean period. First, the foreign policy of the U. S. legation were not fixed. They were antagonistic to the powers which seized control over Korea. Therefore American diplomats in Korea frequently ignored the neutral policy of home government by embroiling themselves in palace politics, generally resisting Chinese claims of suzerainty over Korea, and from the year 1895 when sino-Japanese war ended in Japan's victory many who had previously preferred Japan over China became highly critical of Japanese policy. Second, the diplomatic conception of the U. S. legation corresponded to King Kojong's foreign policy. The King Kojong kept having 'pro-American' attitude despite the non-involvement policy of the U. S. government and as a result, Americans could obtain the most profitable interests in Korea. Kojong wanted to use America as a buffer for Korea's integrity against struggles of the Great Powers surrounding the Korean peninsular. The King of Korea, looked upon the United States representative in Seoul as the symbol of a friendly and beneficient power capable of protecting his kingdom from multiple external pressures. He encouraged a confidential relationship with American ministers. This is why the United States Legation in Seoul enjoyed the confidential relation with the Korean court. The American representatives whose main job was to advocate American interests in Korea used the King's pro-American policy and actively supported Kojong's pro-American attitudes. Third, the U. S. legation emphasized America's impartiality and morality when they conducted diplomatic activities in Korea and as a result, it strengthened American style modernization reform in Korea. All the American diplomats believed America should be the main source of Korea's progress. Fourth, the home country allowed diplomats to exercise discretion in deciding their diplomatic direction because of distance of both locality and time. In other words, America's diplomacy in the Far Eastern Asia was individual, which made it possible that the American diplomats evolved their own strategy. The American representatives took an important position in Korean-American relations for the twenty-two years when the official diplomatic relation had maintained between Korea and the U. S. They promoted their own diplomatic strategy under the principle of 'Open Door' for the purpose of advocating American interests in Korea. This was discouraged by the home country asserting 'non-involvement' toward the Korean question. American policy in eastern Asia during the last quarter of the nineteenth century was marked by a desire to maintain a position of impartial neutrality toward the international struggle for control of the Korean peninsula. Nevertheless, the American diplomats gave much contributions to construction and strengthening of American influence in the Korean peninsular for the modern period. Americans could obtain the most profitable concessions from the Korean government and American missionary works successfully settled down in Korea. Overall, we could conclude the diplomatic strategy of the American representatives who had taken care of U. S. legation was very effective on behalf of the United States. This should be explained as one of features of American diplomacy i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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