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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世紀頃의 李朝女性服裝과 西歐女性服과의 比較

Title
18世紀頃의 李朝女性服裝과 西歐女性服과의 比較
Authors
박창희
Issue Date
1962
Department/Major
대학원 가정학과
Keywords
18세기이조여성복장서구여성복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當時 우리나라는 其한 鎖國主義와 階級의 羞異가 極其했으므로 在服의 種類, 形態等이 極히 單調로웠고 時代의 흐름에 따르고 在服의 變化가 거의 없었다. 色調에 있어서도 거의 原色系統을 愛用했고 貴族과 平民과의 色에 對한 區別이 其했다. 貴族中心의 時代였으므로 貴族의 在裳에 對한 禁色은 없었고 平民의 在裳에 對하여만 禁色을 要했다. 우리의 在裳은 대개 앞이나 옆으로 트기가 나있어 입기에 簡便하였다. 치마 밑에는 무지기를 입으므로서 치마를 뻐치게 하였고 禮服等도 소매길이가 길고 폼이 넉넉하였으므로 自想히 全體的인 Silhouette이 □다. 비단은 中國에서 道入한 것이므로 主로 貴族層에서 使用되었고 平民層에서는 紗, 羅等의 物이 使用되었으며 全部 自家裁縫으로서 平面裁斷이었다. 太胴과 太腰가 그의 特徵이며 胸部를 壓迫하였다. 反面 佛蘭西는 當時의 生活自體가 華麗하였고 亨藥的인 生活의 連續이 었으므로 머리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細心한 神經을 써서 잘 꾸몄다. Panier가 生긴이후 全體的인 Silouette이 더욱 커졌고 在裳의 色調는 主로 中間色系統을 沈着한 色으로서 Pococo의 優雅한 情趣를 은은히 풍기고 있다. 貴族과 平民과의 區別은 있었으니 在裳에 對한 禁色이나 禁令은 없었다. 細胴과 太腰가 그의 特徵이며 Robe의 밑바침으로는 Panier가 큰 役割을 하였고 옷감을 自由로 選擇하여 立體的인 裁斷으로 꾸며졌으며 當時 佛蘭西는 西歐諸國과의 文化支流가 頻繁하였으므로 種類나 形態에 있어서 多樣性을 띄우고 있다. 李朝時代의 신은 美가 爲主였으므로 대체로 模樣이 織細하고 부드러운 感을 주나 感觸이 매우 딱딱하였다. 대개가 낮은 신으로서 나막신을 除外하고는 踵이 달리지 않았다. 重量이 매우 크고 模樣에 있어서도 別羞가 없었으나 細工이 훌륭했으며 貴族層의 신은 主로 비단신이 었다. 西洋의 신 亦是 비단 헝겊에 刺繡한 것으로서 踵이 따로 달려있는 High=heel의 形態로서 아름다운 Robe와 調和美를 이루었다. 예로부터 머리는 女性美의 表現의 一要素였지만 우리나라와 西洋의 머리 모양은 모두 크며 지나친 裝飾을 하였고 서로 그의 誇大함을 崇尙했다. 特히 西洋의 貴婦人들은 幻想的인 髮型에 魅感되어서 非衛生的임을 感知하면서도 그와같은 形態를 持續하였다. 當時 우리나라는 中國以外의 나라와는 鎖國主義政策을 쓰고 있었으므로 東西洋과의 文化支流는 거의 없었지만 우리나라의 服裝과 西羊服裁과는 어딘지 모르게 많은 共通點을 엿볼수가 있다. 不衣를 많이 입어 下體를 부풀렸고 따라서 풍부한 옷감을 要했던것 亦是 兩國의 共通點이다. 中國文獻等도 參考하여 가면서 좀더 깊은 硏究를 하려고 하였으나 그에 對한 未盡한 點이 많으나 앞으로 더욱 硏究할 것을 期約하며 끝을 맺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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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대학원 > 소비자학과 > Theses_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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