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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 발생기원설에 따른 형성과정의 사적가치 고찰

Title
승무 발생기원설에 따른 형성과정의 사적가치 고찰
Authors
박지윤
Issue Date
2003
Department/Major
대학원 체육학부무용전공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승무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고 아직까지도 세 가지 기원설 , 불교의식무 기원설, 민속무용 기원설, 기방 예술 기원설 사이에서 아직 정확한 형성과정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시연되고 있는 승무(僧舞)가 과거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승무의 기원설에 대한 이견(異見)은 분분할 수밖에 없고, 또 이렇다할 역사적 문헌자료가 없으니 단지 그 모양새나 한 줄의 글 귀 만으로 그 원류(原流)를 유추해야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기원설들 간의 내용과 문화를 선형적인 역사적 사실과 대조했을 때 기원설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역사적 사실 찾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승무가 우리전통무용에서 가지는 가치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에 본 연구는 기원설들 간의 연결고리 즉, 형성과정에 영향을 미친 사건들을 중심으로 승무의 형성과정을 밝히고 그 형성과정 속에서 승무가 갖는 사적가치를 찾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역사적 사건은 크게 불교의 유입과 유교의 유입, 산대도감의 폐지 그리고 여악의 폐지의 네 가지로 나뉘며, 이것들은 각 기원설들이 성립되는 시점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것들을 살펴보면, 삼국시대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문화가 번창하게 되는데 이 때 고구려의 무용총을 살펴보면 무용도에서 보여지는 무용수의 복식의 모습이 우리 전통춤의 장삼과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승무의 원형적(原形的)인 모태(母胎)는 삼국시대로 소급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팔관회와 연등회에 나타난 불교문화의 번성은 불교의식무가 이미 그 당시부터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유교를 치국이념(治國理念)으로 삼으면서 불교는 급격히 쇠락하게 되고 결국 포교와 탁발의 수단으로 조선 중엽 불교의식무를 개발, 발전시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러니 하게 불교의 의식무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조선 중엽 이후 산대놀이가 폐지되면서 산대 놀이패들은 각 지방으로 흘러 놀이패를 형성하게 되고 이 때에 시연되기 시작한 가면극은 그 전에 행해졌던 것들과는 달리 서민문화를 적극 수용하며 풍자적이고 해학적으로 변하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승무라는 어원이 처음 발생하게 되고 서민의 정신을 담은 승무로써 자리 매김을 하게 된다. 1900년대 이후 외적으론 외세의 침략이 심해지고 내적으론 교방청에 있던 관기들 중 일부가 사적인 무용활동을 시작하면서 민속춤과 교방춤의 교류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1910년 한일합방을 계기로 여악이 폐지되면서 관기들은 기생조합을 설치하고 차후 그 이름을 권번이라 바꾸게 되면서 일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교방춤은, 관객층이 일반인으로까지 확대되게 되고 그 레파토리 또한 궁중정재에서 민속무용으로 영역이 확대되게 된다. 그 후 교습된 기생들은 한성준등 민속춤의 거장들에 의해 민속춤을 습득하게 되고 또 발전시키게 된다. 이 때 승무도 그 중에 주요 민속춤이었다. 이렇듯 승무는 사찰의 의식무에서 민속의 가면무로 다시 기생들에 의해 무대에 올려지면서 하나의 완벽한 홀춤으로 예술적 가치를 갖게 된다. 승무는 무대를 옮기면서 시행자들이 바뀌게 되고 또 그들이 속한 문화의 가치가 승무에 투영되면서 승무는 우리나라의 종교와 민속, 그리고 기방무용을 무용으로 승화되게 된다. 또한 이들간의 시행 시점이 - 비록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을 문헌으로 검증할 길은 없었지만 - 역사적 사건들과 대략적으로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삼국시대부터 모태를 두고 현대까지 아우르는 승무의 사적가치는 가히 한국무용의 정수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승무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승무의 형성과정만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무용의 역사를 재 고찰하는 작업이라 생각되며, 또 신분이 낮았던 기생들이 실은 우리 고위층이 향유했던 문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무용까지 계승, 발전시킨 문화의 전달자였다는 역사적 사실 속에서 한국무용에 대해 왜곡된 시각, 즉 기생들이 춘 춤이라는 편협한 생각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결국 무용을 계승, 발전시킨 무용인에 의해 무용의 역사가 제대로 규명될 때 우리의 무용의 역사는 보다 진일보(進一步)하여 문화적인 보고(寶庫)로써 자리를 잡을 것이며, 본 연구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승무의 형성과정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밝히고 그 안에서 승무의 가치를 찾아내고자 했다. ; The discussion about the origin of Buddhist dance has been continued since it appeared first, and the origin of Buddhist still cannot be found among the three theories of origin- a Buddhist ritual, a Korean folk dance, and an art of KiBang. On this dissertation, the author tried to find out a forming process of Buddhist dance as discovering the connection on the theories of origin for the purpose of showing the historical value of Buddhist dance which is called as flower of Korean traditional dance. There is no way to deny the existence of the different opinions about the original theory of Buddhist dance because the Buddhist dance which is performed in Korea is difference from the old one in lots of ways. Also there are not enough historical information about the Buddhist dance so people has analogized the original current by only the form or one sentence. However, thesis could find not only a link in between the theories but also the value of Buddhist dance in Korean traditional dance comparing the historical facts with the content and culture among the theories. Because of the facts that GoGooRyu brought the Buddhism ideology to control the country and also the dancing form which is shown on MooYongDo in MooYongChong is similar to the Korean traditional dance JangSam , the origin of Buddhist dance must go back to the period of three countries. As Confucianism was accepted as the national ideology in ChoSun period, the Buddhist culture suddenly lost its power. As a result of that, people explored and developed the Buddhist ritual dance in the middle of ChoSun period as a step of propagation of religion and religious mendicancy in Confucianism but ironically, the Buddhist ritual dance had developed most during this period. After the middle of ChoSun period, the abolition of SanDaeNoly made all the group of SanDaeNoly spread in each towns and regroup. During this period, the masked drama was started and they positively accepted the culture of common populace unlikely the old dramas. Therefore, the masked drama had possibly changed satirical and humorous. In the process, the word "SeungMoo-Buddhist Dance" came out and the Buddhist dance made its genre which include the common populace s spirit. After 1900, the reasons of that Korea suffered from a foreign invasion and the part of the official Kisengs in GyoBangChung started private dance activity made an interchange between the cultural dance and the GyoBang dance. With discontinuing of YuAk which was an occasion of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in 1910, the official Kisengs made their own union which was called as KiSeng union and they changed the name as KwounBun later. When the GyoBang dance which was played only for high class people was opened to the public, there was a change of level in audiences and the area of the repertory was also expended from the royal court dance to folkdance. Later, trained Kisengs acquired the folkdance from the masters like Han, Sung-Jun and developed it. At that moment, the Buddhist dance was one of the major folkdance. Like these, the "SeungMoo-Buddhist dance" was played on stages by Kisengs as a folk masked dance from ritual dance and achieved the artistic value. The Buddhist dance required different dancers in different stages and as the cultural value was reflected in the Buddhist dance, "SeungMoo" was sublimated to a dance which includes our religion, culture, and the art of Kisneg s. Even though there is no perfect verification, it is not exaggeration to say that the historical value of "SeungMoo" which place its origin in the three countries period is the purity of the Korean Dance by seeing the starting periods of the dancers were approximately same. The process of digging up the history of "SeungMoo" is not only an examination of forming steps of the Buddhist dance but also a postmortem of history of Korean dance in my opinion. hopely this dissertation could be a turning point to make public notice that Kiseng was the one who inherited and developed the high class culture. As a result, only when the dancers who inherit and develop dig up the history of dancing, the history could develop more and take the great position as a cultural treas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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