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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1905년 한국의 균세론 수용과 균세적 대외정책 연구

Title
1880년-1905년 한국의 균세론 수용과 균세적 대외정책 연구
Authors
홍은하
Issue Date
2000
Department/Major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This study focuses on acceptation of Kun-Sei (Asian balance of power theory) and on the foreign policy by Kun-Sei in Korea, during the period of the opening of port in Korea. The time frame is limited from 1880 to 1905. In spite of the importance of effect of Kun-Sei, the most precedent studies on the foreign policy and diplomatic history have not been noticed it. However, Kun-Sei is essential to understand the foreign policy of that period for Korea till now. This study aims to analyze the Kun-Sei and to explain the Korean foreign policy by Kun-Sei Ron. Kun-Sei affected to the Korean decision-maker and made a lot of changes in Korean foreign policies. This study consisted in three parts. First, the study begins when Korea takes over the Kun-sei policy and it analyze the world-systemic environment in the late 19th century. Second, the study defines what Kun-Sei is, how to accept it by whom, and what issue was argued from it in Korean society. Third, how to execute Kun-Sei policy and what is the false in the process. Like a lot of minor powers at that time, Korea s fate has been significantly influenced by external powers aggressive behaviors. Thus, the background (or systemic environment) is a necessary to understand the why Kun-Sei is accepted by the ruling class including King Kojong. Kun-Sei means a balance of power in the Chinese character. However, there are some differences between Kun-Sei Ron in Korea and the balance of power in Western origin. Kun-Sei is the metamorphosis from the balance of power by conflict the East Asian traditional idea and western Theory. A strategy of Korea for survival by balancing among the competing powers was immature and ineffective. It was mainly due to the era of imperialism as well the immature foreign policy of lack of qualification of the decision-maker. Above three facts were the direct results for the colonialization of Korea. ; 한국은 1876년 개항이후 1880년 2차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면서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인식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하였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확장은 총과 포로 무장한 함대를 통해 동아시아에 확장되었고 이미 일본과 중국은 새로이 재편된 세계체제의 한 부분에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 일본과 사이에서 제한된 외교관계만을 가져오던 한국에게 급격히 확장된 관계범위와 공법질서는 혼란과 충격을 가져왔다. 개항과 동시에 이루어진 공법질서로의 편입은 전통적 화이질서를 무너뜨렸고 서구적 질서와 통상을 강요하였다. 공법체계에 대한 습득과정에서 한국은 균세론을 수용하였다. 국제체제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의 힘을 투사할 능력이 없는 한국에게 타국의 세력을 이용하여 적을 견제한다는 이이제이 적 해석이 가능한 균세 정책은 일련의 찬반논쟁을 거쳐 수용되었다. 세계체제의 주변부로 편입하게 되면서 한국은 한반도에서 일국이 세력우위를 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균세적 정책시행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약소국인 한국은 국제체제를 자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동할 수 있을 만큼의 세력을 가지지 못했었고 서구열강들의 경쟁에서 비롯된 이중외압과 전통적인 동아시아 지역체제로부터 오는 외압 속에서 다른 어느 국가들보다 강력한 압력아래 놓여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한국의 정책결정자는 균세론을 적극 수용하였고, 정책으로 반영하였다. 한국은 지속적으로 균세정책을 실천했다. 공법체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정책화시킨 균세 외교를 통해 한국의 전통적인 외교관계는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정책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는 국제체제에 융통성 있는 대응으로서가 아닌 임기응변적인 세력 끌어들이기에 그치면서 균세적 대외정책은 오히려 한국의 주권유지에 역효과를 가져왔다. 1880년대 초반 한국의 독립은 자국의 힘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얻어진 부산물이었다. 즉 한국의 독립유지는 어느 열강도 한반도가 다른 국가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한국이 겪게되는 주권의 제한과 박탈은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막연하고 무(無)대책적이고 지나친 낙관론과 공법체계에 대한 비상식적인 의존감에서 비롯되었다. 외국과의 관계 속에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는 신뢰의 형성 없이 그때그때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외국세력과 결탁하였을 뿐 아니라 정책을 꾸준히 실행해야할 담당자 마져도 수시로 교체되어 정책의 지속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외교정책을 전담하는 부서 또한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에 의해 수시로 변경되었으며 국왕과 각료들간의 합의와 동의 없이 자의적인 변경이 이루어졌고 결국 이러한 조건들과 결합된 균세정책은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는 커녕,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시킨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국가가 국제체제 속에서 주권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국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정확히 인식하고 이러한 정확한 현실인식에 기초하여 자국의 능력을 고려하여 수행할 수 있는 정책을 설정, 그리고 이렇게 얻어진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없이 체제의 강압성과 강력한 이중외압, 효과적인 대외정책을 선택하고 집행하는 제도의 미비,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의 보존과 국민의 안위를 위해 노력해야할 정책결정자들의 자질 미흡이라는 세 가지 악조건의 결합이 한국을 국권상실로 이끌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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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대학원 > 정치외교학과 > Theses_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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