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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전반 謙益의 求法活動과 그 의의

Title
6세기전반 謙益의 求法活動과 그 의의
Authors
심경순
Issue Date
2001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Gyem-ik was the first Baekjae(百濟) monk who went to India and study Buddhism there who lived under the reign of King Munyoung(武寧王) and King Sung(聖王)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His truth seeking journey started in the 12th year of King Munyoung s reign(512), when Baekjae was reinforcing its national power and security after it removed its capital to Woong-jin, making keen political competitions with Gogureo(高句麗), and expanding its power over Tamra (Cheju island) and Gaya areas. Under this circumstance, Baekjae needed to promote Buddhism as its ruling ideology while solidifying a foundation for national prosperity. The Buddhist gana(敎團) too needed new Vinaya(律) to readjust and innovate itself after the transfer of the capital to Woong-jin. Meanwhile, Baekjae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southern kingdoms of china and imported the bloomed Buddhism of those regions which already had "The Four Vanaya(四大廣律)" translated and "Dasadhyaya vinaya(十誦律)" popularized even before Gyem-ik set out his journey. But China of that time didn t strictly follow vinaya to produce serious religious evils and make Buddhism estranged from common people. Royal family and aristocrats were the only earnest believers in Buddhism. By this reason, Gyem-ik went to India instead of China. He arrived in the Central north India by sea and devoted himself to practice of vinaya and study of Buddhism there. He mastered Sanskrit composition and language and probably made countless efforts to translate Abhidharma-pitaka(論藏) and Vinaya-pitaka(律藏) of the hinayana(小乘) line into Sanskrit because he brought Abhidharma(阿毘曇) and Five Vinaya Doctrines(五律文) when he came back to Baejae. When he came back with the Indian monk Baedalda and Sanskrit vinaya texts in the 4th year of King Sung s reign(526) after almost ten years seeking after truth, the king himself welcomed him with open arms. The king also provided a temple to Gyemik, where Gyem-ik and Baedalda began to translate total 72 Sanskrit vinaya texts by the support of Royal family and government and the assistance of 28 domestic monks. Among those texts, "Abhidharma(毘曇)" and "New Vinaya(新律)" each Abhidharma-pitaka and Vinaya-pitaka of Sarvastivada(說一切有部) line received a special treatment since the king himself wrote introductions and they were preserved at Taeyo-jeon(台耀殿) afterwards. So their significance was great for the kingdom as well as for Buddhism. Meanwhile, monks truth seeking activities began to move from simple learning from advanced Buddhist doctrines to further propagating Buddhist principles to Japan. And Japanese nuns began to come to Baekjae to receive sila(戒) and learn vinaya, which implied the high level of Baekjae Vinaya Buddhism. In conclusion, Gyem-ik s truth seeking activities served as a decisive momentum to develop the Vinaya Buddhism of Baekjae. ; 본 논문은 삼국 최초의 求法僧인 謙益의 구법활동에 관한 것이다. 謙益은 백제 율종의 시조라 할만큼 백제의 불교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리라고 추측되지만, 지금까지 그에 관한 연구는 사료의 빈약함으로 인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가 구법활동을 한 시기나 가지고 온 범본이 어떤 것인가 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먼저 謙益의 출발시기를 무녕왕 12년(512)으로 새로이 추정해 보고, 이 당시 백제의 정치적 상황과 대외관계를 통해 구법배경을 찾아 보았다. 당시 백제는 정치적으로 웅진천도 이후 어느정도 국력을 회복하여 안정을 되찾은 상태로, 대외적으로도 고구려와 치열한 경쟁을 하며, 한편으로는 탐라 및 가야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는 국가중흥의 발판을 마련하면서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서 불교를 진흥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한 백제불교계에서도 웅진천도 이후 허술해진 교단의 정비와 쇄신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다음 謙益이 인도로 율을 구하러 갈 수 밖에 없었던 구법동기를 중국 남조국가와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찾아 보았다. 백제는 중국 남조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당시 융성했던 남조의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謙益이 떠날 때까지 중국에서는 사대광율이 번역되었고, 남조에서는 십송율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계율이 엄정하게 지켜지지 않아 불교적 폐단이 심각하였으며, 일반 서민과도 괴리되어 왕실과 귀족중심의 불교가 성행하였다. 이 때문에 謙益은 중국이 아닌 인도로 구법활동을 떠나게 된 것이다. 謙益은 해로를 이용하여 중인도에 도착했으며, 이 곳에서 계율의 수행과 더불어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범문와 범어에 통달했고, 율부를 깊이 공부했다. 또한 귀국시 아비담 과 오율문 을 가지고 온 것으로 보아 소승 계통의 논장과 율장을 범문으로 옮겨 적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귀국 후 활동으로 주목되는 것은 역경작업이다. 謙益은 10여 년의 구법활동을 끝내고 성왕 4년(526)에 인도승 배달다삼장과 함께 범본을 가지고 귀국했으며, 왕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또한 謙益에게 안주할 절을 제공했고, 이곳에서 그는 범본 72권을 왕실 및 국가의 후원으로 배달다삼장과 국내 승려 28명과 함께 번역하였다. 특히 설일체유부의 논장과 율장으로 생각되는 "비담"과 "신율"은 왕이 직접 그 서문을 쓰고, 태요전에 보관할 만큼 불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매우 의의가 컸다. 한편 謙益으로부터 시작된 백제승들의 구법활동은 단지 선진적인 불교를 배워 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일본에 전하는 전법활동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와 더불어 律師의 파견은 초기 일본 계율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일본의 비구니들은 백제에 와서 계를 받고 계율을 학습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백제 계율의 높은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며, 결국 謙益의 구법활동은 백제의 계율불교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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