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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의 외교활동 연구 : 1882년 수신사 활동을 중심으로

Title
박영효의 외교활동 연구 : 1882년 수신사 활동을 중심으로
Authors
강현정
Issue Date
2003
Department/Major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The propose of this study is to consider the diplomatic activities of Pak Young-hyo (朴泳孝: 1861-1939) featured of the 수신사활동 in 1882, and he was one of the most significant persons among the Civilized party(개화파) that had devoted to enrich Chosun confronted by both the interior and foreign crisis in the 19th century. He was a son-in-law of the king, CheolJong, was in the position of high society in Chosun, and recognized the Enlightment Thought and the international situation realistically. He thought that the ultimate aims Chosun reached in the 19th was not only to preserve the independence of Chosun against the World Powers, but to strengthen in order not to allow the foreign countries to attack and interfere in the domestic affairs by enforcing the reformation. This became a motivation to generate and develop the 개화파. Pak was one of the most significant persons in the 개화파 and the examinatio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개화파 and Pak is fundamental in studying his diplomatic activities. The 개화파 and Pak gathered in Pak, Ku-su s house and gained the knowledge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by reading the foreign books from China and thought that it was more important to reform every part of politics, economy, society and culture of Chosun and strengthen the country, and then to step into the new international society by connecting with the foreign countries. In the change of relationship between China and Japan and the entry of the Western Powers into the Eastern Asia, his recognition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could be shown in 「1888년 상소문」, in this document he understood comparing to the age of civil wars(전국시대) in the ancient China that the international society was dominated by the Powers that the powerful country merged the weak countries. He had a realistic recognition toward the international relationship, and knew that nevertheless 만국공법 and 균세공의, one could not exist in the international society without the power of self- independence. He insisted that Chosun should face up to reality and concentrate to strengthen in order to overcome the crisis, and also should conclude the treaty with the westerns and introduce their technology. The 개화파 recognized these international mood realistically was supported by the King, GoJong, started to reform from the upper parts, and took the policy to open the country to foreign intercourses by concluding the treaty with the westerns. The 조선책략 brought by Kim, Hong-Jib in 1880 when he returned had influenced a lot on the change of the Chosun s foreign policies. It featured of the fundamental diplomatic policy of China to Chosun that strongly urged Chosun to open the country and trade with the Western Powers. In the period of 1880 s, the old army rebellion in 1882(임오군란) happened for the reasons of the discontent of the conservative force against the vigorous activities of the civilized. This was concluded by 제물포조약 which was made between Chosun and Japan for the reason of kidnapping 대원군 to China, and the dispatch of the diplomatic mission(수신사) was decided for representing of apology and ratifying the treaty, therefore 임오군란 was the direct reason to be sent Pak and his men to Japan in 1882. After 임오군란, China expressed its intention directly to subordinate Chosun to China not as a meaning of the old conception but as one of the new one by interfering the domestic affairs and trying to make it a vassal state. For this reason, the denial of China s insistance that Chosun was its vassal state and overcoming from its interference were coming urgent issues for them. He went to Japan not only for exchanging the document for permission and submission the credentials, but also for informing that Chosun was not a vassal state of China and actively requesting the aids to the goverment affairs in Japan during his staying. To examine his activities as a 수신사 centering around 『사화기략』(his travel sketches in Japan), the British Documents on Foreign Affairs(BDFA) and the meeting schedules with Japan, the main point was certain that he emphasized was that Chosun were an independent country both domestically and diplomatically, and it was unright for China to insist that China had a right to dominate Chosun. He made clear that Chosun intended to strengthen the country by concluding treaties and trading with the Western Powers including England, wanted to be protected from China s threat in a sense of the balance of western powers and 균세, and requested the help of them when he had met Parkes, an English consul in Japan. Pak sought the cooperation with Japan by asking their supports to help Chosun to reform when met with the Japanese high-ranking officials and millitary generals. The activity of Pak as a 수신사 was extended its scope than any other diplomats, and it was the opportunity for him who devoted himself to civilize for strengthening the country and be self-independent and wealthy. ; 본 논문은 19세기 개화기 조선이 대내외적인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했던 개화파의 핵심적 인물인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외교활동을 1882년 수신사 활동을 중심으로 고찰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로 조선내 엘리트의 위치에 있었으며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을 뜨고 국제질서를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인식하고 있었다. 박영효는 19세기 조선이 달성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는 밖으로는 국제관계의 변화에 대처하여 주변 열강들로부터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전하며, 안으로는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개혁정책을 실시하여 외국의 간섭과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개화파의 형성·발전의 동기이기도 하다. 박영효는 개화파의 핵심인물이었고 그와 개화파와의 관계를 살피는 것은 박영효의 외교활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전제가 된다.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파는 박규수의 집에 모여 청에서 수입해온 외국서적을 통해 외국의 사정을 접하고,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통해 조선을 부국강병한 국가로 만들고, 외국과의 적절한 외교관계를 통해 새로운 국제사회로 편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서구열강의 동아시아로의 진출과 청·일과의 관계 변화 속에서 박영효의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은 「1888년 상소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 글에서 박영효는 당시의 국제사회를 중국 고대의 전국시대에 비유하면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병합하는 힘 의 정치질서가 지배하는 구조로 파악하고 있다. 만국공법과 균세공의가 있다고는 하나 자립자존의 힘 이 없다면 한 국가로서 존립하기 어렵다고 보는 국제질서에 대한 현실주의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목적을 부국강병에 두어야 하고 서양과 조약을 맺고 기술을 이용하는 등 개화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현실주의적 국제질서 인식을 전제로 한 개화파는 고종의 지원을 얻어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게 되고, 대내적으로는 제도의 개혁 및 근대적 기구의 신설 등을 통해, 대외적으로는 외국시찰과 서양과의 조약체결 노력을 통해 개방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조선정부의 정책변화에는 1880년 김홍집 수신사가 일본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조선책략』의 영향이 컸다. 『조선책략』은 조선의 개국과 서양열강과의 통상을 강력히 요구하는 조선에 대한 청의 기본적인 외교정책을 담고 있었다.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위험을 예방해야 한다는 방아론을 중심으로 서구열강과의 교류를 통해 동양 3국이 함께 러시아의 남하에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의 입장에서 그들의 이익을 위한 방안을 조선에게 강요하는 것이었지만 조선에서는 새로운 외교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정책을 추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80년대에 들어 더욱 활발해진 정부의 개화정책에 대한 수구파의 불만이 임오군란이라는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구식군대의 불만폭발이 시발점이었고 이를 이용해 정권에서 물러나 있던 대원군이 재등장하여 개화정책은 백지화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군란의 진압을 명분으로 청과 일본이 각각 군대를 파병하여 조선을 위협하는 형식으로 자국의 세력확장을 도모했다. 대원군의 청으로의 납치와 조선과 일본사이에 체결된 제물포조약 으로 사건은 일단락 되었고, 조약의 비준과 사과표명을 위한 수신사의 파견이 결정되었으니, 임오군란은 1882년 박영효 수신사 파견의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효는 1882년 수신사의 대표로 임명되어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 의 자격으로 일본에 가게 된다. 임오군란 이후 청의 조선에서의 세력이 확대되어 청은 조선을 옛 사대질서로서가 아닌 근대적 국제질서에서 의미하는 종속국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내정간섭을 노골화했다. 이에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파에게는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주장을 부정하고 내정간섭을 극복하는 일이 시급한 해결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박영효는 단순히 조약 실행을 위한 비준문서 교환과 국서전달만을 목적으로 일본에 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주재 각국 공사들과 체류기간 내내 접촉하여 조선이 청의 종속국이 아님을 주장하고 조선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가 접촉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러시아, 네덜란드, 스페인, 오스트리아, 하와이의 공사들은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거나, 조약을 체결했다하더라도 비준 전이거나 통상관계가 없는 국가의 외교관들이었다. 그의 수신사 활동을 『사화기략』과 영국외교문서(BDFA), 일본측과의 접촉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가 먼저 대외적으로 강조하여 알리는 것은 조선이 내치와 외교면에서 독립적인 주권국이며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주장은 부당하다고 것이었다. 박영효는 주일영국영사 파크스를 만나서 대담하는 자리에서,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과의 조약체결을 통해 그들과 통상함으로써 조선의 부국강병의 기반을 닦고자 한다는 것, 서양의 균세 및 세력균형의 개념하에서 청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원한다는 것을 밝히고 그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영국은 동아시아에서의 열강의 각축에서 우위를 점하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철저한 이해관계를 따져 행동했기 때문에 박영효의 요청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일본의 고위관리들과 군장성들을 만나서 조선의 개혁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등 일본과의 협력을 모색하였다. 박영효의 수신사 활동은 이전 수신사들과는 그 활동범위와 정도에서 크게 확대되었으며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한 개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던 개화파 박영효에게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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