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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작업을 통해 본 에드바르트 뭉크의 사회의식

Title
벽화 작업을 통해 본 에드바르트 뭉크의 사회의식
Authors
김소연
Issue Date
2003
Department/Major
대학원 미술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본 연구는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 1863-1944)의 작품 중 벽화 작업을 당시 노르웨이가 처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 고찰함으로써 뭉크의 작품 세계를 새롭게 읽어보고자 한 것이다. 뭉크는 국제적인 예술의 중심지를 찾아 조국을 떠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상징적인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벽화라는 새로운 양식을 접하게 되면서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미술의 공적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더 나아가 국가적인 중요한 전환기인 고국의 독립 이후 노르웨이로 돌아와 공공의 특성을 갖는 벽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분명한 사회 의식을 표출했다. 또한 그가 직면했던 노르웨이의 현실은 그의 작품 형성에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노르웨이는 정치적으로 가장 급변하는 시기였다. 노르웨이는 대외적으로 500년 이상의 종속적인 관계인 연맹에서 벗어나 1905년에 독립하게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한 계급 갈등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동운동과 노동당의 세력 확장이 어느 때 보다도 컸었다. 그러한 가운데 노르웨이는 문화적인 정책을 통해 국가적인 정체성을 국민에게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며 예술가들도 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 속에 대중을 위한 예술 양식의 필요를 강하게 느낌으로써 공공 벽화 예술이 발달하게 된다. 뭉크의 벽화 작업은 이러한 노르웨이 내에서 국민을 단합시키려는 국가 정책과 대중을 위한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던 예술계 내에서의 움직임 두 방향에 모두 맞닿아 있었다. 뭉크는 오랜 외국 생활을 하던 중에 린데 프리즈와 라인하르트 프리즈 같은 이국의 후원자를 위해 벽화 작업을 했는데 이 경험을 통해 미술이 개인만의 고유한 영역에 머물지 않고 건축과 주문자와의 관계를 고려해야하는 공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이는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이후의 공공 벽화 작업의 기초를 마련했다. 외국에서의 성공과 함께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화가로 인정받게 된 뭉크는 1909년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완전히 정착하면서 20년 이상을 공공 벽화를 위한 작업에 몰두했다. 이 작업들은 이전의 자신의 후원자들을 위한 작업과는 다른, 노르웨이의 정세와 관련된 뭉크 자신의 사회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기념하며 국가의 지적인 성과를 의미하는 오슬로 대학 벽화의 작가로 선정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성공했고, 완성된 벽화에서는 일반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민속적인 역사관을 통해 노르웨이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이상을 제시했다. 뭉크는 이 작업과 동시에 또 다른 공공건물을 염두에 둔 새로운 제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이 제안들을 주문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전시회를 통해 적극적으로 벽화로 만들 기회를 만들려 했으며 이것은 소수가 아닌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예술을 추구하고자 한 그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고 보헤미안 시절을 거치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직시하며 사회의 진정한 실재를 그려야 한다는 예술가의 의무를 배운 뭉크가 벽화를 위한 제안으로 선택한 주된 테마는 프롤레타리아, 그 중에서도 노동자였다. 그는 사회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계급으로써의 노동자들을 표현하려 했고 이러한 노동자들을 모티브로 한 그림들을 벽화를 위한 제안으로써 10년 이상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1년에 프레이아 공장의 벽화를 주문 받고 도시의 산업 노동자의 모습들을 제안했으나 주문자가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오랫동안 추구했던 노동자 그림들은 1928년 오슬로 시청 벽화를 주문 받음으로써 다시 한번 벽화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뭉크는 시청 벽화를 위해 이전의 노동자 그림들을 다시 이용하면서 노동자들의 시청 건설 장면을 채택했다. 이것은 그가 오래된 것을 부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바로 노동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이 또한 완성하지는 못하게 된다. 이렇게 뭉크가 벽화를 위한 제안으로 20년 이상 발전시켜온 노동자 그림들은 벽화로 완성되지 못하고 스케치나 회화들로 남겨져 있지만 그의 적극적인 사회에 대한, 노동자에 대한 의식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미술사에서 뭉크는 그의 대표작인 <생의 프리즈>가 강조되어 불행했던 개인사를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작품을 한 작가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에서의 이러한 접근은 그의 전반적인 작품 세계뿐 만 아니라 작품 형성의 일차적인 배경이 되는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시대 상황을 간과함으로써 작가를 완전히 이해하는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이전에는 소홀히 다뤄졌던 뭉크의 벽화작업을 당시 노르웨이가 처한 대내외적인 상황을 연관지어 설명하기를 시도하였으며, 그 결과 그의 벽화 작업에서 뭉크가 뚜렷한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했음을 알 수 있었다. ; This study was attempted to consider the Edvard Munch(1863- 1944) s mural paintings out of all his works considering conditions of Norway at that time and to research newly the world of his works. Munch left his native country seeking for the center of the international art and made symbolic works based on his very individual experiences. But, as he met a new style of mural paintings, he realized the public meaning of art that is formed under the relation with the outside. He returned to Norway after her independence that was an important turning point for Norway, and strived for mural paintings, which have a feature of popularity, in earnest and showed his definite social consciousness. In addition, the Norway s reality at that tim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his works. From the late 19th century to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Norway withdrew from a union, which had been continued over 500 years subordinately, and declared the independence in 1905 in view of foreign relations while she suffered from conflicts between social classes resulted from urbanization and industrialization and was troubled with a labor movement to resolve the problem and extension of the influence of the Labor Party than any other times in view of domestic conditions. Meantime, Norway made efforts to establish the national identity to a people by cultural policies and artists also recognized powerfully the need of a style of art for the public on the basis of a sense of the national community, so the public mural paintings was developed. Munch made mural paintings for foreign sponsors such as Linde Frieze and Reinhardt Frieze when he lived in foreign countries for long time and these works enabled him to understand a public relation of art that should consider the relation between construction and an orderer without keeping the unique area of individuals. With successful activities in foreign countries, Munch was recognized as a representative Norwegian painter. He returned to his homeland in 1909, settled down in Norway completely, then devoted himself to the public mural paintings over 20 years. He actively made efforts to be selected as a muralist, who would draw a mural painting in the wall of Oslo University to celebrate the Norway s independence and to applaud her intellectual development. Finally, it was decided that he would draw the mural painting, and he suggested a hope and ideal for the Norway s new future on the basis of the folk historical view focused on the general public in the completed mural painting. Munch was preparing a new suggestion bearing another public building in mind in addition to this work. Though he did not take an order for this suggestion, he made efforts to have an opportunity for drawing an mural painting by holding an exhibition actively, which he showed his strong will to pursue the art that not minority but all people can share. The main theme that Munch selected for the suggestion concerning the mural painting was a proletarian, especially a labor. He intended to express the laboring population as a socially rising class and had developed his intention for 10 years by suggesting mural paintings that got a motive from the labor. Meantime, he took the order for mural paintings of Freia Factory in Oslo in 1921 and suggested figures of urban industrial labors as a theme, but the orderer did not accept the theme and the work was not completed. But, the labor, a theme that he had pursued for long time, can be expressed in a mural painting when he took the order for the mural painting of Oslo City Hall in 1928. Munch decided that he made the mural painting showing labors constructed the city hall building. The reason is that he thought persons, who bury the old things and create a new future, would be the very labor. But, he also did not complete the work for reasons of health. In this manner, though paintings covering labors that he had developed over 20 years as a suggestion for the mural painting were not completed into mural paintings but remained at sketches or paintings, they showed his consciousness about society and labor clearly. The researcher attempted to describe his mural paintings, which were neglected previously, under the relation of the Norway s foreign and domestic conditions at that time. In result, it was shown that Munch showed his definite social consciousness in his mural paintings and made efforts to reflect it to his works activ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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