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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前期 養蠶業 硏究

Title
朝鮮前期 養蠶業 硏究
Authors
남미혜
Issue Date
2002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bstract
본고는 조선전기 국가의 勸蠶 政策의 실상과 함께 養蠶業이 鄕村의 주요 생업활동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규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조선전기의 주요산업은 農業이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다각도로 전개하였다. 조선시대 農政이 勸農桑 이라고 표현될 만큼 양잠업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조선전기 직물의 종류로는 무명·삼베·모시·비단이 있다. 다양한 의류작물 가운데 국가가 農民들을 대상으로 하여 중점적으로 육성하려했던 산업은 養蠶業이었다. 養蠶業에 중점을 두었던 이유는 양잠업은 桑木재배를 위한 경작지가 필요하지 않고, 3월부터 5월까지 약 40일간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여해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산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전기 국가의 양잠업에 대한 관심은 儀禮의 정비과정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조선왕조는 개국 초부터 儒敎式 禮制를 정비하는데 그 가운데 民生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국가의례도 정비하였다. 농업과 관련된 의례로 先農祭와 親耕禮가 정비되고, 양잠과 관련된 의례로 先蠶祭와 親蠶禮가 정비되어 정기적으로 거행되었다. 親蠶禮는 成宗 8년 처음 시작되어 宣祖代까지 총 6번 거행되었다. 조선초기 양잠업의 권장을 위해 이를 지도·관장하는 기관으로서 蠶室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都會蠶室은 太宗 17년(1417년)에 開城·加平·淸風·義城·遂安·泰仁 등지에 설치되었으며, 세종대에 이르러 평안도와 강원도·함경도에도 설치되었다. 잠실은 궁궐과, 延禧宮·아차산·樂天亭 등 京中에도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都會蠶室이 설치된 각 지역의 농업환경은 상당히 좋지 못하였다. 전라도 태인 지역만 제외하고는 모두 토지가 척박한 지역으로 墾田 結數가 많지 않았으며 水田비율도 상당히 낮은 지역이었다. 반면에 1結當 농업인구수와 戶當 평균인구수는 높아 농업에만 의지해서는 民生의 안정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지역이었다. 즉 지방 잠실은 농업 외의 다양한 산업에 종사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지역에 중점적으로 설치되었다. 지방 잠실은 端宗·世祖代에 이르러 숫자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잠실의 숫자가 너무 많아 민가의 桑葉을 채취하게 되는 민폐가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成宗代 이후로는 各 道에 1개의 지방 잠실만 운영하다, 成宗 16년(1485년)에는 잠정적으로 운영이 정지되었다. 이후 燕山君代에 각 지방의 잠실은 치폐를 반복하다가 中宗代에 이르러 다시 설치되었다. 조선전기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蠶書가 활발히 편찬되었다. 태종 15년 韓尙德은 {農桑輯要}의 양잠 부분만을 발췌해 {養蠶經驗撮要}를 간행하였다. 世祖代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시 한차례 蠶書 언해본이 간행되었다. 독립된 잠서의 발간과 언해본 잠서의 간행은 양잠업의 확산과 기술보급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조선전기 勸蠶政策은 북방지역에도 시행되었다. 북방지역의 양잠업 보급은 주로 함경도 지역을 중점적으로 추진되었으며, 15세기 평안도·함경도 일대에 양잠업을 하는 농가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16세기에 들어서도 勸蠶정책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16세기 권잠정책은 특히 中宗代 士林派들의 향촌안정책의 일환으로서 추진되어 잠실이 복설되었으며 친잠례가 거행되었다. 그리고 두 차례의 農桑敎書가 반포되었으며 金安國에 의해 蠶書 언해본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中宗代 士林派의 失勢와, 16세기 사회경제적인 조건의 변화에 따라 養蠶業이 점차 場市와 관련을 맺으며 경영되면서 권잠정책은 더 이상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않는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16세기 양잠업의 활성화를 가능하게 한 사회적 요인은 바로 복식 사치의 유행이었다. 15세기 중반 지배층을 중심으로 시작된 사치풍조는 곧이어 일반 관리, 사대부층에 파급되고, 15세기 말엽에는 富商大賈, 일반 민, 천민층에까지 확산되었다. 당시 지배층들이 가장 선호했던 옷감은 중국에서 수입해 온 紗羅綾緞이었다. 紗羅綾緞은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한 高價品이었기 때문에 주로 兩班들의 소비품이었고 일반 민들은 明紬를 선호하였다. 이처럼 복식부분에 있어서 사치가 유행하자 고급직물의 생산이 경제적으로 유리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고급옷감에 대한 선호도가 증가함에 따라 관련산업인 양잠업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어 직조기술과 양잠기술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紬 交綺交織한 고급직물이 많이 생산되었으며 민간에서도 私織이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다. 명주의 고급화도 진행되어 水紬·鼎紬·吐紬 등 고급명주가 생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변화는 양잠기술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15세기의 농서 {四時纂要抄}와 17세기초의 농서 {農家月令}의 양잠 항목을 비교해보면 양잠기술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農家月令}에서는 인공 상엽가루 이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조선전기 다른 농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중국 양잠법에서 탈피하여 조선의 독자적인 양잠기술을 수립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6세기에는 명주의 생산지가 널리 확대되고 유명 산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전·후기 각 지리지 풍속조를 비교해보면 16세기 이후 강원도, 전라도의 여러 지역으로 양잠업이 확대됨을 볼 수 있다. 16세기 중엽 이후부터 명주의 유명산지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며, 이는 조선후기 각 직물의 유명산지의 형성으로 가시화 되었다. 16세기에 양잠업은 향촌의 일반적인 부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6세기 경상도 성주에 거주했던 사대부 李文楗은 매년 양잠업을 지속적으로 경영하였다. 사대부가에서는 栽培 家桑과 桑葉 受贈을 통해 지속적으로 양잠업을 경영할 수 있었다. 매년 평균 60斗 이상의 고치를 수확하여 일부는 自家에서 소비하고, 일부는 場市에서 판매를 하기도 했으며, 그리고 일부는 공물 방납을 위한 상품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16세기에 양잠업은 단순히 貢物생산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상품유통경제의 발달과 연계해 商業的인 목적하에 경영되고 있었다. 商業的 양잠업의 경영은 양잠업이 활성화되는 16세기초부터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양잠업은 경작할 전답이 적은 士大夫들이나 小農들에게 있어서 생계유지를 위한 주요 경제활동으로 행해졌으며, 地主들에게는 고 수익을 보장해주는 주요 산업으로 등장하였다. ; This thesis attempts to study the policy of encouragement of sericulture in the early Chosun Dynasty and to examine that sericulture was settled as an important trade for the people of the country at that time. In the early Chosun Dynasty where the main industry was farming, the nation made various efforts to develop the productivity of farming. The policy of farming in the Chosun Dynasty was usually called encouragement of farming and sericulture(農桑). From this fact we can see that sericulture played a very important role in the economy of the Chosun Dynasty. In the early Chosun Dynasty, there were various kinds of cloths such as cotton fabric, hempen fabric, grass cloth and silk. Among these cloths, the main industry which the nation wanted farmers to develop was sericulture. The reason why sericulture was focussed on is that sericulture didn t need any other lands for mulberry trees and that farmers could earn high income in sericulture by intensively working for about 40 days from March to May. The nation s concern about sericulture in the early Chosun Dynasty was found in the process of nation s rites. Chosun Dynasty had practiced the Confucian rites from the birth of the nation. Among the nation s rites, there was a rite which was closely related with people s trades. While the rites connected with farming were Sunnong-jae(先農祭) which was practiced to worship God of Farming and Chinkyung-ryae(親蠶禮) where King himself was shown to farm, the rites related with sericulture were Sunzam-jae(先蠶祭) which worshiped God of Sericulture, and Chinzam-ryae where Queen herself was shown to raise silk worms. Chinzma-ryae began in the eighth year under the rule of Sungjong(成宗) and was practiced six times in all till Sunjo(宣祖). In order to promote sericulture, the early Chosun Dynasty created Jamsil(蠶室), the organization for leading and managing sericulture. In 1417, the seventeenth year under the rule of Taejong(太宗), Dohyae Jamsil(都會蠶室), Jamsil in province was set up in several places like Gaesung(開城), Gapyoung(加平), Chungpyong(淸風), Yeosung(義城), Sooan(遂安) and Taein(泰仁) and in the reign of Sejong(世宗), it was founded in Pyongan-do(平安道), Kangwon-do(江原道), and Hamkyong-do(咸境道) and was also included in Hansung(京中) such as Kyoungbok royal palace(景福宮), Changduk royal palace(彰德宮), Yeonhee royal palace(延禧宮), Acha Mountain(峨嵯山), Nakchung pavilion(樂天亭). The environment of farming in the provinces where Dohyae Jamsil was managed was in a bad condition. Most areas except Taein of Jeonla-do(全羅道) were not good to be cultivated, where lands were waste and the rates of wet-field cultivation was very low. In those provinces, people could not secure their livelihood depending on only farming because of high population of living and farming there. That is to say, Dohyae Jamsil was mainly managed in the provinces where people had to engage in not farming exclusively but other industry to make their livelihood. Dohyae Jamsil largely increased in the reign of Danjong(端宗) and Saejo(世祖). As Dohyae Jamsil grew to be too many, there were lots of troubles related with picking mulberry leaves in individual houses. The effort to get rid of these evils brought the result that there remained only one Dohyae Jamsil in each province since the rule of Sungjong(成宗) and finally in the sixteenth year of the reign of Sungjong, Dohyae Jamsil disappeared for the time being. Under the rule of Yunsan(燕山君), Dohyae Jamsil repeated its birth and death, and under the rule of Jungjong(中宗) it was revived. In the early Chosun Dynasty, manuals of sericulture were largely published on both national and individual level. For example, Han sang-duck(韓尙德) published a manual on sericulture named Ryangjam-kyunghum-chalyo({養蠶經驗撮要}) excerpting contents about sericulture from Nongsangjipyo({農桑輯要}), Essentials of Farming and Sericulture in the fifteenth year of Taejong(太宗). Under the rule of Saejo(世祖), some interpreted Chinese books about sericulture were published. The publication of the manuals of sericulture and the introduction of the interpreted manuals on sericulture gave great influence on the spread of sericulture and the development of its technology. The policy of encouragement of sericulture in the early Chosun Dynasty was also found in the northern province, especially focussed on Hamkyong-do. In the fifteenth century, farmers who managed sericulture increased in Pyunan-do and Hamkyong-do. The poilcy of encouragement of sericulture which continued in the sixteenth century was mainly practiced as a means of securing farmers by a political party called Salim(士林派). Dohyae Jamsil reopened and Chinzam-ryae was practiced and Nongsangjipyo was published twice. An interpreted Chinese book on sericulture was published by Kim an-kuk(金安國). But under the domination of Salim party(士林派) and the change of the socio-economical condition in the 16th century, sericulture grew to be connected with regular intervaled markets(場市) and the policy of encouragement of sericulture was not actively proceeded. The condition that sericulture was lively spread in the 16th century is socially related with the tendency of luxury of clothing. This tendency began among the domineering class with high offices in the middle of the 15th century, was immediately spread among ordinary officials and people of high birth, and was enlarged in merchants called Busantaego(富商大賈), ordinary people of the rural areas and even people of humble class. Cloths which was favored by the domineering class was SaRaRyoeng Dan(紗羅綾緞) which was imported from China. While SaRaRyoeng Dan was mainly consumed by people of higher class as it was very expensive wholly depending on import, ordinary people liked Myungju(明紬). As the tendency of luxury in clothing was enlarged, the production of high-quality cloths had much advantage. The increase of favor for high-quality cloth influenced on sericulture and resulted in changes in the technology of weaving cloth and sericulture. The luxurious cloth which was weaved with silk threads such as Ju(紬), Cho( ) and Gye(綺) was largely produced and its production was popular among ordinary people. Myungju with higher quality such as Soo-ju(水紬), Jung-ju(鼎紬), and To-ju(吐紬) appeared. These changes of society brought changes of the technology of sericulture. Comparing farming maunals in the 15th century like Sasichonnyaecho({四時纂要抄}) with ones in the early 17th century like Nonkawullyeong({農家月令}), we can see the change in the technology of sericulture. Nonkawullyeong suggeseted how to use artificial powder from mulberry leaves. This kind of suggestion could not be found in any other books in the early Chosun Dynasty, which showed the unique technology of sericulture of Chosun Dynasty independent from the Chinese influence of the technology of sericulture. In the 16th century, the lands for producing Myonju were enlarged and the provinces famous for Myonju grew to be formed. Referring to parts of custom in the treatises on geography(地理志) published in the early and late Chosun Dynasty, we can find that sericulture was spread in Gangwon-do and Cholla-do since the 16th century. The provinces famous for Myongju became to be formed since the middle of the 16th century. In the 16th century, sericulture was seen to be served as subsidiary business in the rural areas. Yi mun-kun(李文楗, 1495∼1567), a man from high class, called Sa-dae-bu(士大夫) who lived in Seongju of Kyoungsang-do in the 16th century managed sericulture each year. Generally men from high class were able to manage sericulture by planting mulberry trees in their own household, sometimes given mulberry leaves for free. They could harvest above sixty du(斗) of cocoons each year. As for the products, they consumed some, sold others in regular intervaled markets and used still others as a tribute to be offered. Considering these situation, we can find that sericulture in the 16th century was not managed for simply tributes to be offered but managed for the commercial purpose which was connected with the development of circulation of products. The management of sericulture for the commercial purpose was gradually proceeded since the early 16th century when sericulture was lively spread. While for some men from high class and paesantry who had very little land for farming, sericulture was served as main economical activities to make their livelihood, for landlords it was served as an important industry securing high in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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