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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최치원의 사상과 역사인식 연구

Title
고운 최치원의 사상과 역사인식 연구
Authors
이재운
Issue Date
1996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bstract
Today more than ever it is necessary to rediscover those people most important in Korean history, and to understand the human side of our history. I began this study by looking at the trends of intellectual thought in the late Silla, as the stage was being set for the rise of the Koryo. Soon I realized that it would be valuable to concentrate on Choe Chi-won, who represented the progressive thought of his time. This dissertation reevaluates Choe ’s thoughts, first analyzing and organizing them, and then examining their place and effect in the history of Korean though. Choe worked for political reformation that would lead to a new social order, order sorely needed to calm the political turmoil of the 8th year of Queen Jinsung’s reign(A.D.894). His concept of reformation was one of national renewal from within: He proposed saving Silla be developing it into a Confucian nation, which was a reasoned approach rather than a violent revolution. Choe ’s political ideology had a definitive effect on the establishment of a Korean Confucian nation. He aimed to establish a moral society based on the order that would arise from the establishment of a Confucian political system, which would base the king’s power on his virtue and restraint. Further, Choe called for the establishment of a Confucian bureaucracy, the development of centralism, the reformation of the taxation system to provide tax relief for the people, a peace-oriented foreign policy, a humanistic military policy, etc. As a realist, he saw the world clearly. Instead of focusing on the differences between Taoism and Confucianism, Choe sought to create a higher philosophy incorporating common ideas of both philosophies. His participation was not a short-sighted one for his own personal gain, but was aimed at the long-term reformation of a society in conflict. He never deviated from his Confucianism ideals, even after his retirement from politics. His resolute step to go into the mountains was not a simple escape from reality, for he had never been a pessimist even in the most miserable of times. He never lost his faith in Confucianism, even during the chaos accompanying reformation. He intended to conquer the catastrophic reality of social disintegration by inducing the group consciousness of a national community, and bringing together scattered power by nurturing the ideas of reconciliation and compromise, and subduing antagonism, disruption, and discord. His endeavor toward this goal were thoroughly Confucianist, and his championing of Confucianism should receive more recognition as a turning point in Korean history, in that he continually pursued the establishment of Confucianism at a time when Buddhism and Taoism were entrenched. Choe Chi-won was also concerned with Haw-em thought(華嚴思想)which supported his Confucianist political ideology. This can be condensed to the centralism of absolute monarchy, and it was the foundation upon which Chun-Tae thought(天台思想)of Koryo embraced the thought of Zen Buddhism in the state of haw-em. He understood Taoism(道敎)as related to Confucianism, and he was a man of great learning in both Taoism and Confucianism. His ideas concerning Taoism were also effective in developing a national consciousness. Choe did not discriminate between Textual Buddhism(敎宗)and Zen Buddhism(禪宗), and what is more, he tried to integrate the ideas of Confucianism, Taoism and Buddhism into a coherent whole, taking great effort to examine their similarities, always centering of Confucianism. In other words, in his search for high times in his search for high moral principles, Choe Chi-won went further than other intellectuals of his times in his search for a unified philosophy based on the tree great doctrines of Confucianism, Taoism, and Buddhism. And he used the knowledge gained from his search in the determination to help solve Silla’s many problems, both domestic and foreign. His synthesis of the three by no means resulted from any confusion in his thought processes. He thought clearly as he pursued his goal of overcoming chaos in intellectual circles by remolding Silla self-consciousness into that of a single united people with a nation and culture to be proud of. Choe himself strove to approach the archetype of a good Silla citizen through “Pung Ryu Do(風流道)”, which was the practical application of the philosophy that he always kept to a high intellectual standard. His methodolgy as an historian also deserves admiration. He endeavored to write a sympathetic history of his age, but always from an objective view point, and wanted it to become the basis for governmental policy. His books were a crystallization of history, intending to imbue the people with a strong national consciousness and pride in their culture. His history writing contributed to the establish of a foundation for history writing in the Koryo, and therefore helped clarify later Korean history. Choe Chi-won was a far-sighted leader of the intellectuals of the middle era, far more progressive than his contemporaries. This leadership flowed from his realistic insight, appreciation for the three great philosophies, and historical consciousness. ; 오늘날 韓國史學에서는 인간을 재발견하여 한국사를 인간의 역사로 생명력있게 파악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무엇보다 요청되고 있다. 본시 筆者는 신라 下代의 전환기에 처한 당시 지식인들의 사상적 동향에 대해 관심을 갖던 중, 당대를 대표하는 인물인 崔致遠에 대해 새롭고 전진적인 면에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도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筆者는 本稿에서 그의 사상적 맥락과 성격을 일관성있게 추출해 봄으로써그동안 그의 思想이 사실과 다르게 그릇 평가되어진 것을 밝히고, 그의 思想이 韓國思想史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영향을 확고히 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최치원은 眞聖王 8년(894) 新羅 下代 노출된 정치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자기 변화를 도모하여 새로운 사회질서 수립을 위해 政治 改革論을 제시하였다. 그의 改革案은 당시 혼란에 빠진 신라사회를 儒敎國家로 발전을 꾀함으로써 革命이 아닌 合理的 해결책을 통해 구원해 보고자 하였으니 자연 그의 政治思想은 以後 韓國 儒敎國家 形成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는 儒敎的 政治理念에 입각한 통치질서의 구축을 위해 仁政과 德治를 전제로 한王權强化와 유교적 관료제도의 정착, 중앙집권체제 구축, 爲民意識에 입각한 租稅制度의 개혁, 平和指向的인 對外政策, 人道主義的 軍政 等을 제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道義社會 구현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와같이 그에게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의식과 긍정적인 인식태도가 부합되어 현실세계를 직시하면서 현실세계에서 잘못된 점을 하나 하나 고쳐 나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그의 현실 참여는 자신의 영달을 꾀하고자 하는 미시적인 참여가 아니라사회의 잘못된 점을 시정하고자 하는 거시적인 입장에서의 참여였다. 이처럼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그의 기본적 입장은 政界를 은퇴한 이후에도 거의변함이 없었다. 그의 入山에의 決行도 단순한 현실도피가 아니었으며 더욱이 그는 결코 厭世主義者가 아니었다. 오히려 궁예와 견훤이 新羅 各地를 攻取하는 대혼란 속에서 그 스스로 儒者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고 盡忠報國하기 위해 짐짓 한 발짝 물러나이제 亂世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개혁을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대립과 분열과 갈등을 지양하며 화합과 화해를 추구하는 思想的 接木을 통해 분산된 힘을 응집하고 민족공동운명체로서의 집단의식을 유발함으로써 시대적인難破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철저하리 만큼 儒敎的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니 당시 佛仙의 激流속에서 初志一貫 儒敎의 正道를 역설하며 그 實踐精神로 살아 마침내 愛國的 忠의 精神으로까지 湧出한 그의 儒學思想은 우리 儒學史에서 좋은 指針이었으며따라서 이로부터儒學史의 새로운 一章이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최치원은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儒學者로서의 政治理念 즉 그가 중시했던 中央集權的 專制王權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華嚴思想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화엄의 입장에서 禪宗을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高麗 天台思想 확립에 기반을 마련하기 도 하였다. 道敎思想에 대한 최치원의 이해 또한 거의 儒敎思想을 빌어 상대적으로 파악하고있어 그가 비단 도교사상에만 매어 있지 않았음을 확실히 해주며 의 道敎觀 역시매우 현실주의적인 국가의식 속에서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최치원은 敎와 禪 그리고 儒·佛·道 三敎思想에 대해 異質的인 것으로 보지 않고 一體的 見地에서 접근시키고자 하였으니 그는 儒敎를 주체로 하여 상호간의 유사성 내지 上通性을 모색하는 데 힘썼던 것이다. 즉 諸思想의 특징을 서로 명확하게인정하면서도 그 個別性 보다는 보편적 성격을 추출·종합함으로써 擧國的인 사상적 통합을 시도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당시 新羅가 지닌 對內外의 現實問題를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따라서 그의 三敎에 대한 관용적 태도는 결코 사상적 혼돈과 혼란에서 온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러한 사상적 통합을 東人으로서의 自我意識으로 발전시켜 신라인들로 하여금 自國에 대한 주체의식으로 낙관적인 인식을 가지게 함으로써 民心을 다시 회복시키는 데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제 최치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三敎를 다 포함하면서도 그것의 綜合한 것에 그치지 않고 좀 더 높은 次元에서 그것을 살릴 수 잇는 別個의 原理를 窮究하던 중 우리의 固有思想인 風流道를 발견함으로써 그 원형에 접근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우리 韓國思想에 대한 역사상 최초의 연구자였던 것이다. 그는 歷史를 기술함에 있어서도 自國史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述而不作과 以實直書를 근본으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道德性에 기준하여 政治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으니, 이 당시에 나온 그의 歷史著述은 다시 한 번 統一의 위업을 완수하고자 하는 강한 國家意識의 산물이었으며, 신라인에게 민족적 自我意識과 文化自尊의긍지를 심어주기 위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崔致遠 史學은 高麗 王朝의 역사서술에 기반을 조성하여 韓國의 傳統史學을 정착시키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以上을 통해 우리는 그에게서 보여지는 현실에 대한 통찰력이나, 사상적 안목, 역사에 대한 인식 등을 고려해 보건대 그는 더 이상 古代的 知性에 머무를 수 없는 中世知性의 先覺者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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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대학원 > 사학과 > Theses_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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