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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기 노론의 정치적 이념과 권력관계에 관한 연구

Title
숙종기 노론의 정치적 이념과 권력관계에 관한 연구
Authors
김연민
Issue Date
1993
Department/Major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bstract
이 論文의 目的은 肅宗朝에 있어서 老論의 政治的 理念과 權力關係를 究明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老論의 政治的 理念은 어떠한 思想的 特質이 있었으며, 老論은 어떠한 權力基盤위에 形成되었는가, 그리고 實際의 政治問題에 있어서 老論의 政治理念과 權力關係는 어떠한 聯關이 있었는가를 밝혀보고자 한다. 朝鮮朝의 朋黨은 政治理念의 實現을 追求하는 政治集團이다. 朋黨史에 대한 旣存硏究에서는 「個人的 對立에 의한 黨爭의 深化」「政治集團間의 聯合」「朋黨間의 黨論對立」혹은 「政策決定過程에서의 利益葛藤」등 주로 朋黨次元에서의 權力現象이 論議되고 있으며, 朋黨의 政治的 理念은 度外視되고 있다. 그러나 朋黨은 理念을 追求하는 政治集團이기 때문에, 朋黨間의 權力關係는 朋黨의 政治的 理念과 聯關하여 論議되어야 한다고 본다. Ⅱ章은 老論의 政治理念을 論議하기 위한 前提로서, 朝鮮朝 朋黨에 대한 槪念規定, 朝鮮朝 前期에 있어서 正統-異端(Orthodoxy-heresy), 및 肅宗朝의 政治的 特性이 무엇이가는 다루었다. 從來의 朋黨槪念은 派閥主義(factionalism)의 立場에서 「黨派」혹은 「政派」등으로 規定되고 있으나, 朝鮮朝의 朋黨은 理念을 追求하는 政治集團이었다. 朱子學的 내지는 儒敎的 價値理念의 實現을 政治的 異想으로 하였으며, 이러한 政治的 目的과 聯關하여 權力을 追求하였다. 朝鮮朝 前期에 있어서 正統-異端(Orthodoxy-heresy)이 鮮初의 斥佛論을 거쳐 退溪에 의해 闢理端 崇正學의 意識으로 成熟되어 갔으며, 특히 王朝交替 王位簒奪 등의 事件을 계기로 政治的 正當性(legitimacy)과 結付되어 權力關係의 變化로 連結되었다. 朋黨이 理念을 追求하는 政治集團이라고 해서 항상 일관되게 理念만을 追求하는 것은 아니다. 老論의 경우, 朝鮮朝 前期의 正統-異端 意識이 後期로 오면서 正統觀念으로 形成되고 이것이 肅宗朝에 있어서 老論의 形成과 聯關되어 老論의 政治理念으로 정착된다. 肅宗朝는 王統과 道統의 領域에서 提起된 問題들이 政治的 正當性과 結付되어 政治集團間의 勢力交替로 連結되고 있었다. 또한 老論의 경우 肅宗朝는 西人에서 分岐(1683)되어 하나의 政治集團을 形成하는 時期였다. 이러한 점에서 肅宗朝를 硏究의 對象으로 하였다. Ⅲ章은 老論의 形成과 關聯하여 老論의 政治的 理念과 權力基盤을 다루었다. 老論의 政治理念의 思想的 特質은 「理의 直」을 哲學的 基礎로 하는 普遍的 規範主義, 實踐論의 次元에서 養心에 근저한 主觀主義, 및 歷史的 實際의 次元에서의 先王의 道를 政治的 異想으로 하는 傳統主義 등이다. 尤庵에 의해 形成된 朱子學的 正統觀念은 西人義 老壯派들에게 受容되어 老論의 形成時에 老論의 政治理念으로 連結되었다. 老論의 權力基盤의 側面에서, 老論은 官職의 占有를 통하여 中央의 權力基盤을 構築하였으며, 血緣 學緣 등을 통해 結束되어 있었다. 老少分黨(1683)에서 肅宗 末(1720)까지 中央堂上官職의 遞職回數를 基準으로 볼 때 老論은 46.0%를 占有하여, 少論의 35.4%나 南人의 18.6%에 비해 優勢하였다. 官職別로 볼 때, 老論은 六曹와 三司 중 司憲府와 司諫院, 그리고 承政院등의 官職에서 높은 比重을 차지하였으며, 年度別 比率은 己巳換局(1689)에서 甲戌獄事(1694)까지의 南人 獨占期(94.9%)를 除外하고는 平均 53.7%로서 少論의 40.4%보다 13% 程度나 優勢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5年 單位別로 보면 老論과 少論間의 先後가 交叉되고 있어서 두 集團間의 權力的 牽制가 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老論의 姓貫構成을 보면 全州 李, 光山 金, 安東 金, 牛峯 李, 淸風 金, 驪興 閔, 龍仁 李 등의 順으로 나타나 있다. 이들의 總數는 37명으로 老論數 88명중 42%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學緣으로는 老論은 栗谷學派이며 특히 尤庵 宋時烈門人이 中樞였다. 尤庵의 文人은 老論 堂上官職者 88명 중 31명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三公, 大提學, 提學 등 2品 以上 高位職에 대한 占有率이 높았다. 이들의 姓貫構成은 주로 全州 李氏, 安東 金氏 등이 多數로 나타났다. Ⅳ章은 政治的 正當性의 問題領域인 王統에 있어서의 老論의 嫡統論을 다루고 있다. 老論의 嫡統論은 王位繼承問題에 있어서 元子定號에 대한 「時機尙早論」, 世子의 生母인 張禧嬪의 治罪에 대한 「逆律論」, 그리고 王位繼承候補者로서 老論이 支持하는 연잉군에 대하여 肅宗으로부터 保護遺託을 받아냄으로써 提起된 「연잉군 保護論」등으로 爭點이 옮겨 가고 있었다. 이 問題는 「時機尙早론」을 提起한 尤庵이 賜死됨으로써 政治問題化 되어 王權과 南人의 聯合을 초래하여 西人과 南人의 급격한 勢力交替로 連結되었으며, 以後 王位繼承問題는 嫡統이 없는 狀態에서 누구를 支持하는가의 問題로서 嫡統論의 意味가 稀薄해지고 老論과 少論의 權力的 葛藤關係로 轉換되었다. 老論의 「逆律論」과 少論의 「世子保護論」의 對立이 있었던 肅宗 27年(1701)의 경우, 老論이 少論보다 15% 程度 優勢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 다음해인 28年에는 前年度에 비해서 老論은 약 12% 增加했는데 반하여 少論은 오히려 14% 程度 減少되고 있다. 官職占有 比率의 增加와 「逆律論」間에 因果關係가 있다고 할 수 는 없지만, 적어도 老論의 權力基盤이 强化되는 有利한 狀況에서「逆律論」이 主張되고 있었다. 특히 丁酉獨對가 있었던 肅宗43年의 경우는 87.5%로 가장 높은 數値로 나타나 있다. Ⅴ章은 政治的 正當性의 또 하나의 問題領域인 道統의 繼承과 老論의 正統論을 다루었다. 斯文亂賊의 問題는 肅宗朝의 경우에 朱子集註를 改註한 朴世堂의 思辨錄으로 問題가 提起되었다. 이미 尤庵에 의하여 孝宗朝부터 윤휴에 대한 斯文亂賊의 論議가 發生하여 禮訟을 계기로 西-南人 間의 政治的 對立이 격심했던 바 있었는데, 그 延長선위에서 尤庵의 死後에도 그 弟子들인 老論에 의해 提起되었던 問題이다. 朴世堂의 경우 爭點은 「異端」「洪水 禽獸같은 禍」,「聖門의 反逆者」등으로 나타났다. 이때는 老論이 執權勢力으로써 이 問題로 인한 勢力變動은 招來하지 않았다. 師生義理의 問題는 尹拯이 尤庵을 背師(1684)한 경우와 時南 兪棨를 背師(1715)한 경우 등 두 차례 일어났는데, 尤庵에 대한 背師에 있어서는 斯文亂賊과 禮訟등의 문제로 尖銳하게 對立하고 있던 尤庵과 윤휴 兩人사이를 오가며 교분을 지속했던 尹宣擧의 去就問題를 尹宣擧의 子 尹 의 尤庵에 대한 背師問題로 連結되면서 老-少論의 對立을 堅固하게 하는 要因으로 作用하였던 것이다. 尹拯을 攻駁했던 老論의 爭點은「師生義理」「背理」「失節」등 이었다. 그리고 尹拯의 時南 대한 背師問題는 禮書인『家禮源流』의 著者가 尹宣擧인가 時南인가에 대한 是非問題에서 始作되었다. 이로 인하여 尹拯의 尤庵에 대한 背師 背師問題가 再論되고 師生義理에 대한 爭點으로 轉換되었다. 결국 尹拯은 두 스승을 背反한 罪人으로 指目되고 削奪官爵되고 先正의 稱이 禁해졌다. 이때 특이한 것은 王과 老論간에「父子師生輕重」에 대한 論爭이 일어났는데, 肅宗과 老論의 논쟁에서「父子師生은 輕重이 없이 모두 重하다」는 老論의 主張이 貫徹되었다. 對外關係의 領域에 있어서 三田渡 碑文의 問題는 朴世堂의 斯文亂賊問題와 함께 提起된 것으로서, 朴世堂이 李景奭의 묘문에 尤庵을 誣辱했다는 것이 그 事端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老少論의 政黨對立이 激化되면서 爭點은 李景奭의 「三田渡碑文」自體에 대한 것으로 轉換되어 갔다. 老論은 尤庵의 春秋大義와 北伐意志에 依據하여 李景奭의 「不義」를 비판했다. 이에 대하여 肅宗은 三田渡 碑文의 內容이 지나쳤으며 宋時烈의 非難이 마땅하였다고 判別하였다. 이러한 肅宗의 決定이 老論에게는 두가지의 政治的 意味를 부여하는 것이었는데, 첫째로는 朴世堂이 李景奭의 墓文에서 尤庵을 誣辱한 것에 대한 老論과 少論間의 對立에서 老論의 立場이 貫徹됨으로써 執權勢力으로서의 老論의 立地가 强化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仁宗朝의 斥和論과 孝宗朝의 北伐論등으로 이어지면서 尤庵에 의하여 구축된 「中華理念」이 肅宗朝에 와서 問題視되었고, 少論과의 對立過程을 통해서 貫徹되었을 뿐만 아니라 王으로부터 再確認을 받음으로써 朝鮮朝 後期의 對外觀으로 定着하게 되었던 것이다. Ⅵ章은 結論으로서, 以上에서 論議된 結果를 要約하였다. 結局 老論의 政治的 理念의 이데올로기적 性格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側面에서 綜合해 볼 수 있다. 첫째, 老論의 政治的 理念은 道를 絶對視함으로써 支配의 主體를 道에 移讓하는 虛僞意識的 性格을 內包하고 있다. 觀念의 世界에서 支配의 主體를 移讓하는 것은 超人格化의 方向과 非人格化의 方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超人格化의 方向은 예컨대 人間의 支配를 神의 支配로 해서 위로 移讓하는가 혹은 人民의 支配로 해서 아래로 移讓하는 등의 方法이 있다. 非人格化는 法의 支配로 移讓하는 방법이다. 老論의 경우는 道라는 非人格化의 방향으로 移讓함으로써 現實的인 黨利黨略的 利益追求의 側面을 隱蔽하고 있다. 따라서 老論이 政治的 異想으로 하는 道의 實現 즉 朱子學的 價値理念에 依據한 道德國家의 現實은 그 自體가 目的이면서 同時에 現實的인 利益을 合理化하는 手段의 機能을 하였다. 둘째, 老論의 政治的 理念이 思想的 側面에서 普遍的 規範主義, 主觀主義的 實踐論, 傳統主義 등의 特質은 보여주고 있지만, 實際의 次元에서는 普遍的 規範主義 傳統主義 등이 內面的으로 聯關되어 강한 敎條主義的 指向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朱子學的 正統-異端의 兩分法的 論理를 價値判斷의 基準으로 하기 때문에, 行動(behavior)의 次元에서 强力한 內容 統合性과 外的 排他性이 共存하는 二重的 性格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理念的 次元에서의 道의 絶對化와, 實際의 次元에서의 敎條主義的 指向 內的인 統合性 外的인 排他性등은 老論의 形成期인 肅宗朝에서 나타난 老論의 政治的 屬性이다. 老論은 道의 絶對化로 王權을 制約하며, 敎條主義 統合性 排他性 등에 의해 强力한 政治集團으로서의 結束力을 强化시켜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老論의 政治的 性格으로 인해서 以後 朝鮮朝 政治史의 方向이 老論의 特定 家門에 의한 이른바 勢道政治로 歸結되어 가고 있었다고 본다. ; The propose of this thesis is to inquire into the political ideology of Noron and the power relations in the period of King Sookjong’s reign. For this purpose, this thesis brings to a light the specific character of the political ideology, and the degree of possession of power, of Noron. The political factions of the Chson Dynasty are the political groups which sought to realize the ideology of reign. Existing studies on the history of political factions argue primarily upon the power phenomena on the level of political factions, such as ‘the coalition among political factions’ of ‘the conflict of interests in the process of policy decision making’, disregarding the political ideology of political factions. However, since political factions are the political groups pursuing ideology, the power relation between political factions should be discussed in connection with the political ideologies of them. Chapter Ⅱdefines the political factions of the Chson Dynasty, the definition of which being the prerequisite for the discussion of the political ideology of Noron, and surveys the historical process through which the ‘orthodoxy-heresy’ in the first half of the Chson Dynasty had ripened into the consciousness of ‘denouncing heresy and worshipping orthodoxy’ by Toe-Gye after the controversy ostracising the Buddhism in the early years of the Chson Dynasty, focusing especially on the aspect of bringing about the change of power relation with the replacement of dynasties and the usurpation of throne in connection with political legitimacy. The political group, which prusues ideology, does not always consistently do it. In case of Noron, the consciousness of orthodoxy-heresy of the first half of the Chson Dynasty became matured into the notion of orthodoxy of the latter half of the same Dynasty, and got established as the political ideology of Noron in the reign of King Sookjong when Noron completed its formative process. Chapter Ⅲ deals with the political ideology and the foundation of power of Noron in relation to the formation of it. The theoreitcal substructure of the notion of orthodoxy of Sung-Confucianism, built up by Woo-Ahm, was based on the philosophical uprightness(Chickdo)and the just and right causes as represented by the history book Choon-Choo(Choon-Choo-Dae-Eui). And Woo-Ahm’s notion of orthodoxy was accepted by the elders of Seoin, and adopted as the political ideology of Noron when it was built up. Noron solidified its foothold upon power in the central politics by possession of government offices, and was united by blood ties and scholarly relations. Chapter Ⅳ investigates the discourses of Noron about succession to the throne by the legitimate Crown Prince as the problem of political legitimacy. The political legitimacy of the royal authority meant the lineal descent of royalty, and , in the latter half of the Chosun Dynasty, ‘the controversy on Ye(courtesy)’converted the problem of legitimacy of the royal authority into a political issue. In the period of King Sookjong’s reign the discourses of Noron about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by the legitimate Crown Prince invited the coalition between the royal authority and Namin, and brought about a sudden shift of power from Seoin to Namin. Thenceforth the debate on succession to the throne had been trasmuted to the power conflict between Noron and Soron as they differed in opinion about whom to support when the legitimate Crown Prince was missing. Chapter Ⅴinquires into the problem of succession to the doctrinal lineage, as another problem of political legitimacy, and the discourses of Noron about orthodoxy. Noron converted the problem of succession to the doctrinal lineage, which is in essence a problem of construing Confucian doctrines, into a problem of political legitimacy in connection with the problems of ‘traitors to the Confucian culture’, ‘faithfulness between master and dsciple’ and ‘offering sacrifice in the Confucian shrine’. And when the Chosun Dynasty was coerced to form a connection with Ch’ing-a barbarian nation- as lord and vassal in consequence of defeat in two Manchu wars, the cultural-ideological notion of the theory of Hwa-yi(Choong-Wha)’was formed, which is a view of the world centering around china-the orthodoxy in succession to the doctrinal lineage, and brought about the contention to send an expedition to conquer the north. In the period of King Sookjong’s reign Noron converted above mentioned view of international order into a political issue. The political power relations before and after these controversies on the doctrinal lineage were in relation with political enmity between Noron and Soron, and Noron could eventually solidify its position as a ruling force through the possession of government offices. Chapter Ⅵ is a conclusion summarizing the results discussed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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