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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한국여성사회사 연구

Title
일제하 한국여성사회사 연구
Authors
신영숙
Issue Date
1989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bstract
1920년,30년대는 일제식민지 시기의 재편기였다. 1919년의 3x1운동에 큰 충격을 받은 일제는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일정하게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활동을 보장하여 식민지 회유정책으로 전환한다.. 동시에 문화와 교육방면에 ‘내선일체’, ‘일선동조론’을 강화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은폐 x호도하고 있다. 그 반면 경제면에서 일제는 산미증식, 남면북양 등으로 미곡과 원료 수탈은 물론 ‘회사령’을 철폐하여 조선인에게도 회사설립과 기업활동을 어렵잖게 권장하면서 일본자본의 유입과 조선인 노동력 수탈, 그리고 상품시장 확대등으로 식민지 자본주의의 팽창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그것은 물론 식민지 조선인의 생활향상, 즉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일본국내 잉여자본의 조선에 진출로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에 전면적으로 예속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1920년, 30년대는 일제 독점자본의 조선진출이 본격화되고 1929년 세계적 경제공항을 전후하여 일정한 감퇴현상을 보이기는 하나 곧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 병참기지화로서 식민지 자본주의 경제는 팽창해 나간다. 산업구조 자체는 소비생산 중심의 경공업 체제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점차 변화해가지만 식민지 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 억압x수탈체제는 계속 강화되어갔다. 즉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는 그 자체가 파행적 구조로서 식민지국의 경제발전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미곡, 면작, 잠업 등이 크게 증진되었다. 해도 한국인은 초근목피로 간신히 연명하여야 했고 기아와 한기에 죽어가거나 만주, 일본 등지로 유이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같은 식민지 사회하에서 한국 여성들의 삶은 어떠하였던가. 어떠한 곤경 속에서도 한국 여성들은 참고 이겨 생존해왔다. 어쩌면 그것이 자랑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엄청난 고통과 비참한 생활을 인고하여 온, 한 많은 그런 삶이었다. 본 고에서는 바로 그러한 여성들의 생활과 투쟁을 자료가 허락하는 대로 살펴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남성과 더불어 여성도 역사의 주체로서 인간이었음을 인식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바로 오늘의 한국여성, 그리고 앞으로의 한국 여성들이 당면한 한국사회 민주화 문제, 그리고 분단체제의 극복이자 민족의 과제인 통일을 하루라도 앞당기는데 야성운동이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작은 초석이 될 수 있을까 기대해본다. 각 장의 구체적인 내용을 요약해보자. 제 1장 서론에서는 지금까지 한국여성사 연구성과에 기초하면서, 현재의 여성학 이론과 사회사 연구방법론을 일정하게 수렴, 원용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1920x30년대 여성사회를 구체적으로 고찰하고자 함을 밝혔다. 즉 그것은 식민지 자본주의 가부장제하에서의 여성억압 문제인 민족적, 계급적, 성적 차별 불평등 문제를 당시 사회구조 속에서 약사적으로 고찰하기 위한 연구시각, 대상, 범위 등을 논하였다. 2장에서는 일제하의 식민지 교육과 여성교육, 그리고 농업x공업의 식민지 사회경제구조를 살펴봄으로써 1920x30년대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반을 고찰하였다. 그것은 곧 신여성, 직업여성 그리고 농민여성, 노동여성 등의 광범한 민중 여성들의 생활을 당시 사회구조 속에서 보고자 한 대문이다. 그것은 아직 엄격한 이론적 틀에 의한 분석이 못되고 있지만 그것은 다음 단계의 작업으로 미룬다. 다음 3장에서는 신여성의 사회인식을 교육과 직업 그리고 연애x결혼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실제 그들의 결혼 생활을 고찰하였다. 원칙적으로 신여성이란 역사발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든 노동여성을 포함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대체로 신교육을 받은 지식 여성들을 의미한다. 글서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똑바로 바라보고 그들의 삶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해결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성을 의미하여 도한 자유주의계, 사회주의계 여성을 다 포괄한다. 그러나 그들 신여성이 받은 신교육이 그들이 똑바로 그 사회를 직시하고 문제를 인식하는 데에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들을 앞서 지도해줄만한 남성들조차 그 노력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절실하게 생각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렇지 않다 해도 그것은 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사회, 국가, 민족문제 등에 의하여 언제나 뒤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선각자인 일부 신여성들은 자신들의 물론 다른 여성들을 일깨우고 지도해나가는데 기여하였다. 그들의 시대적 한계성을 인정한다해도 그들의 사회적 역할은 충분히 수행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또한 그들의 결혼관과 결혼생활은 이전과 사뭇 다른점이 있다. 즉 1920년은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사회주의 사상이 일본을 거쳐 한국에 점차적으로 수용되는 시기였으며,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이 다같이 식민지 한국의 지배적인 사상 동향이 되고 거기에 따르는 여성들의 연애, 결혼관도 전통적인 구습을 적극적으로 타파하고 가족제도도 급진적으로 변화해가는 일면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전통의 인습을 깨는데에 주력하다보니 반작용도 심하게 나타나고 더 큰 혼란에도 빠지게 되어 과도기적 현상를 심각하게 노출하기도 한다. 즉, 종래의 강제결혼, 이혼은 물론 지나친 자유연애, 결혼관으로 오히려 그 피해를 여성들이 짊어지지 않을 수 없는 모순에 바지기도 한다. 즉 잇따른 정사, 간통이 자행되고 제이부인이라는 이름으로 첩이 되는 경우는 물론 자신들이 원하는 결혼상대를 구하지 못하여 독신이 되거나 동성연애 끝에 동반자살하는 예도 없지 않았다. 실로 1920년대는 여성들의 자살, 이혼, 살인, 절도 등 여성범죄가 하루에도 10여건에 가까울 만큼 등장하고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여성들은 그 시대의 혼란에 가장 큰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30년대 후반으로 가며 점차 자유연애, 결혼이 정착하고 행복한 가정을 그 나름대로 꾸려나갈 수 있던 것도 신여성의 한 사회적 역할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스스로 잘못된 연애, 결혼관, 결혼조건과 제도 등은 스스로 반성하고 현실적으로 개선해 나갔다. 대체로 소가족제의 안일함에 안주하여 사회의 곤란을 체념 회피하는 경향마저 없지 않았으나 일단 자신들의 책임하에 연애, 결혼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간 것은 한 인간으로서 주체성을 살리고자 한데 의의가 있다. 한편 사회주의계 신여성은 결혼생활이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에서의 노력을 신 연애론에 입각하여 몸소 실천하였다고 할 수 있다. 4장에서는 1920x30년대 여성들이 직업활동을 통하여 어떻게 자신들을 실현시키고 사회일원으로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가를 보았다. 선진적 직업여성들은 의사, 교사, 기자, 문인은 물론 각종 사무직과 서어비스직에 종사하면서 가정의 굴레를 벗어나 참 사회인으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것이 비록 식민지 사회하에서 가족생계를 위한 생활수단으로 피할 수 없이 행하였거나 민족적 차별, 성적 불평등한 대우를 감수하면서 하였거나 간에 여성들은 사회의 문제나 자신의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그들의 선진적 활동이야말로 보다 많은 여성들의 직업진출의 기반을 마련해주었고 실제 당시 여성운동가들은 의사, 교사, 기자 등에서 대부분 배출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장에서는 농촌여성들이 일제 식민지 농업사회에서 얼마나 노동하고 그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가를 설명한다. 그들이야말로 당시 사회 최저변에서 일하고 또 일한다. 그러나 가장 어렵고 힘든 삶을 죽지 못해 영위하는 것이 그 사회를 그나마 유지해간 힘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지 않고도 전신으로 느낀다. 설명할 수 없어도 그들은 너무나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에 보다 배우기를 열망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어떤 고통도 감수하고라도 자식은 공부를 시키겠다는 교육열에 불탔고, 결코 절망하지 않고 꿋꿋이 일어나 미래를 그리며 산다. 그들의 그 같은 수고와 고통이 바로 미래사회 창조의 원동력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들은 생각할 겨를 조차 없어도 바람직한 인간의 삶이 무엇인가를 아는 여성들이었다 하겠다. 그러나 아직 농민여성의 계급 의식이라던가 조직적 직접 투쟁으로까지 성장하지는 못한 것 같다. 끝으로 6장에서 일제하의 노동 여성들의 삶과 적극적인 투쟁의 모습을 본다.그들은 결코 일반 노동 여성이라 할 만큼 다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12,3세의 유년 여공에서 40세 전후 기혼여성에 이르기까지 생산직, 특히 섬유, 고무, 정미공업 등에 종사하는 공업노동여성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더구나 그들의 투철한 투쟁의식은 당시 남성노동자 못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지극히 열악한 노동조건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다가 인간이하의 모욕적인 대우 등은 참으로 참기 어려운 굴욕의 상태였다. 그들은 최악의 상태로 병사하기도 하고, 동맹파업, 아사동맹, 태업 등을 전개하기도 하고 해고, 실직, 재취업 등 전전긍긍 하면서 실로 근대적 산업역군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너무나 큰 대가의 희생을 치루었지만 그들 노동여성들이야말로 한국민족과 역사를 지켜온 최후의 보루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들의 생존권투쟁이 아직은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한 듯하고 산발적, 감정적인 차원에 머문 예가 허다했다 하겠다. 결국 1920,30년대 한국여성은 지식층 여성, 노동여성 모두가 교육유무에 관계없이 개인의 발전은 물론 한국사회, 민족, 여성의 문제에 눈뜨고, 계급성에 따르는 일정한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가능한 문제해결에 헌신적으로 투신하였음에 틀림없다. ; In this study, I have investigated Korean women’s social recognition in the 1920s and ‘30s when they were in a society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They managed to lives of suffering and patience in the poorest living condition. They got along, however, perseveringly without any frustration to become a foundation stone upon which history proceeds. But since they had been just liberated from family confinement, they were too weak and few to struggle against strong feudal paternalism and capitalistic exploitation of Japanese government though they were modern girls. Therefore, their burden was infinitely various and when they didn’t overcome certain extraordinary suffering, they frequently committed suicide or crime. At the same time, they not only escaped from reality but also renounced and even debased themselves. But the most serious thing was hardship of life. Their problems of education, marriage and occupation started from economical problems and the substantial solutions to those problems were impossible unless they broke away from the convention of sexual discrimination and the colonial structure. Meanwhile, those women who followed and even supported Japanese rule beyond simple adaptation to ruling system, though they were very few, or women of the leisure class who lived upon the system like a parasite can not be but accused with severe criticism. Nevertheless, most modern girls of a leading spirit, guiding office girls farmer-labour women deboted themselves to solve social or feminine problems through consistent living though they couldn’t often overcome their own limitations. In a real sense, many women leaders of movement have come out from the activities of modern girls and office women. And the movements of farmer-labour women are based upon their own experience of living. Therefore, this movement of them indeed will have to be recognized its significant value and establish its position correctly in our society. To say consequently, I point out those women’s limitions which they couldn’t overcome. Firstly, the woman’s education or the problem of woman’s social consciousness. The woman’s education was required from the necessities of training children as a human resource for carrying out the modernizing policies of enrich and strengthen the country and to increase and promote the industry in the time of civillization, i.e., during Dae-han empire days. In other words, the woman’s education was forced to reinforce various exploiting system in the society ruled by Japanese. That is, woman herself was required as not only a fine labour resource but also a comforter and maternal protect for men on the ground of the idea of a wise mother and good wife. As for the quality of education, being based upon Japanese and American education, it could not get out of such boundaries as colonialism, liberalism and missionzing Christianity. Secondly, women’s love affairs and married lives fell into transitional confusion so extremely that all sorts of crimes as well as family troubles occurred, and in case of subsiding, women escaped to the idleness of home. This was swayed by the hardships of life and caused by feudal consciousness of sex. Namely, they tried to live peacefully escaped from all the difficult hardships and suffering in society if a little place to lean upon had been found. But A few new women tried to live rightly for the national society trough their daily lives. Thirdly, woman’s participation in a job or productive activities was only at or below the passive lebel as a flower in an office, so the labour quality of farmer-labour woman couldn’t be but extorted completely. Therefore, not a few women suffered from various diseases to due without any compensation, and it is not too much to say that they were compelled to live a life worse than death. I wonder that their unability to free themselves from such yokes was obviously due to the social limitations of that time. I can only strict scientific analyses are required for the fact that the above miserable results happened under the severe ruling system of Japan, especially the millitary Fascist system of the late 1930s, and that those conditions have not consisted a revolutionary momentum till now. From this view point, this study needs further complements on such iss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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