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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말기 여성운동의 성격연구

Title
대한제국말기 여성운동의 성격연구
Authors
정경숙
Issue Date
1989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bstract
This study investigated the character and limitation of women movement developed under the increasing crisis consciousness after the conclusion of a treaty of Eul Sa(乙巳條約). The object period is from 1905 to 1910. This time was when the colonization maneuvering on Dae-Han Empire by Japan had undisguized and was a violent movement time which the activity of Enlightment Societies’s Member based on the Min Jog Ja Gang Theory(民族自强論) against it lively developed. In the opposite dynamic structure between the maneuvering and the confrontation. Dae-Han Empire, half voluntarily on one hand and half another intention on the other hand, had transformed into the modern society system. Therefore in the course of transformation into the modern society, the role of women could not help changing. The general situation in Dae-Han Empire period urged a awakening which at that time the national crisis solution which that day demanded could not be gotten with only the shape of traditional women. It was Chan Yang Hoe(贊襄會) to respond promptly to, such a modern call. Chan Yang Hoe issued “Women school establishment reporting”. The three rights of this reporting as follows; First, the women have a right that can take part in the national movement line carrying the civilization policy. Second, women as well as men have a right to occupy jobs. Third, women have right to receive the benefit of education with men together equally, and they have an independent personality. This reporting can be seen as the start of the modern Korean movement have reflected the spirit and object of women’s right movement in the modern western society. This is mean that they are female suffrage *the right to vote), the employment right and the education right. Thus the mature aspect possibly emerged in the early women movement had been influenced on the fact that Donglib Shin Mun widened the heaven human rights, and provided the spiritual and theoretical base in the formation of modern civil society. Out of this, the women’s movement in Korea from the beginning had the theoretical basis of liberal women movement theory and could take part in the recovery movement line of national power(국권회복운동) under the protection of a series of patriotic enlightment activists. Further, they enabled women to step in the society advance of social practice in the women movement. They recognized that such an advance was this very role that the society at that time needed women to do. The first aspect of society advance by women was emerged as trying to take gradually the leadership of women enlightment activity by organizing the group consisted of women only from men who had leaded the early women enlightment movement. In the late Dae-Han Empire, the women’s movement teams were categorized into the three types greatly. The teams of first type were Yoja Gyo Yuk Hoe(여자교육회). Booin Hak Hoe(부인학회) formed by men. The groups of second type were Jin Myong booin Hoe(진명부인회) and Kimhae Booin Hoe(김해부인회) organized by women with foresights. The teams of third type were Dae-Han Booin Hoe and Dae-Han Yoja Heung Hak Hoe(대한여자흥학회) supported by the Royal family. At an early age, in the early of Dae-Han Empire Donglib Shin Mun and Donglib Hyub Hoe enabled women to realized the concept of modern women right. By means of them, Chan Yang Hoe, the first women group was formed with encouragement and inspiration. Such a historical experience, even in the women societies in the late Dae-Han Empire, defined the character to enable assistant society which was consisted of men or men to lead the activities of women groups. But it was a necessary tide that the leadership in the groups had transited into the women’s hand gradually. However, all the uncoquested limitation of thought preserved. That is to say, the thought about women of patriotic enlightment activists could not be escaped eventually in the trend of Dong Che Seo Young(동체서용). Thus such a trend, as it is, transited into the activity and thinking of women groups. The patriotic enlightment activists expected women to have the traditional female virtues at the same time learning the basis of modern study and science knowledge in the modern school suitable to the conditions. Their ideals insisted men and women’s equality in policy, economics, and education but the specific practice they emphasized on the roles of female virtues in home only. for them, what women were needed was to foster the quality of nurse, a housewife and an assistant of home. The standing persistence of Dong Che Seo Young in the view of women represented one of thoughtful limitations through-out the patriotic enlightment activity. The limitation of patriotic enlightment activists had arised consequently the limitation of women’s movement in women groups. Moreover, they enable a wise mother and good wife(현모양처) type by Japan in lady education to transit into Korea and provided the foundation of Japanese colonial education policy for suave and foolish colonial civil. In this thoughtful limitation, above mentioned, Jin Myong Booin Hoe and Yoja Gyo Yuk Hoe were appointed as representative women groups leading the development of women movement. These two women groups had a very different character each other in the phases of activity, social status and thought. Therefore this study will focus on Jun Mynog Booin Hoe and Yoja Gyo Yuk Hoe to examine the nature and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women’s movement in the patriotic enlightment period. The method is to reveal their demands by drawing the opportunity of women movement development in the direct, personal, and essential aspect by use of primary material such as daily newspaper, magazine, a collection of works, and lineage and to analyze the method theory and thought of the movement through the activity. ; 본고는 을사조약 체결이후 고조되어가는 위기의식하에서 전개된 여성운동의 특징과 그 문제점을 고찰한 것이다. 대상시기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일제가 총독부권력을 통해서 대한제국에대한 식민지화 책동을 노골화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민족자강론을 이론적 기반으로하는 계몽운동가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격동기였다. 이러한 침략과 민족적 대음이라는 대립적 역학구조하에서 대한제국은 외형상 근대적 사회체제로 전이하여 갔다. 근대적 사회체제로의 전이과정에서 여성의 역할도 변모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의 제반 시대적 상황은 전총적인 여성상으로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민족적 과제인 국난타개와 시대적 조류에 유효하게 대처할 수 없다는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러한 근대적 요구에 기민하게 대처하였던 것은 찬양회였다. 찬양회는 ‘여학교 설치통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통문에서 주장하는 여성의 권리는 세가지이다. 첫째 문명개화정치를 수행하는 민족운동의 대열에 여성도 참여할 권리가 있다. 둘째, 남성과 마찬가지로 직업을 가질 권리가 있다. 셋째,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의 혜택을 받음으로써 독립된 인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근대 여성운동의 시발로 볼 수 있는 이 통문은 근대 서구 여권운동의 정신과 목표가 반영되어 있다. 즉 여성의 참정권x직업권x교육권 등이 그것이다. 초기 여성운동에서 잃듯이 성숙된 면모가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독립신문]이 천부인권론을 보급시켜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의 정신적x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준 것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한국의 여성운동은 처음부터 자유주의 여성운동이론에 이론적 기초를 갖고, 일련의 애국계몽운동가의 비호하에서 국권회복운동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나아가서 이들은 여성운동의 사회적 실천인 사회진출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그것이 바로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바의 역할이라고 자각하였다. 여성의 사회진출의 첫 양상은 여성들로 구성된 단체를 조직함으로서 초기 여성계몽운동을 주도하였던 남성들로부터 여성계몽활동의 주도권을 점차적으로 이양받아 장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제국말기 여성운동단체는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는 남자들에게 의하여 주도된 여자교육회x부인학회 등이 그것이다. 둘째는, 선각적인 여성들에 의하여 주도된 진명부인회와 김해부인회 등이 있으며, 셋째는 대한부인회와 대한여자흥학회처럼 황실의 지원에 의하여 주도된 것이다. 일찍이 대한제국 초기에 여성에게 근대적 여권의 개념을 자각시킨 것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이었고 이들에 의하여 고무x격려되어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가 조직되었다. 그러한 역사적 경험이 대한제국 말기의 여성단체에 있어서 조차 남성 혹은 남성들로 구성된 찬무소가 여성단체활동을 주도하도록 성격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점 차 단체내의 주도권이 점차 여성에게로 이양되어가는 추세로 전이되어 갔던 것은 필연적 양상이었다. 그러나 사상적 한계는 극복되지 못한 채 온존되었다. 즉 애국계몽 운동가들의 대여성관이 남성주도적 경향성에서 끝내 탈피하지 못하였고, 그러한 경향성이 여성단체의 활동과 사상에 그대로 이식된 것이다. 애국계몽운동가들은 여성에게 근대적인 학교에 나아가 시세에 적합한 과학지식과 근대적 학문의 기초를 익히되 전통적인 부덕을 갖출 것을 기대하였다. 그들의 이상은 정치x경제x교육 등에 있어서 남녀동등을 주장하였으나 구체적 실천에서는 남주여종(男主女從)과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만 강조하였다. 여성에게 교육이 필요한 것은 장래의 국민이 될 아이의 양육자이며, 가정의 주부이며, 가장의 내조자로서의 여성의 육성이었다. 이처럼 대여성관에 있어서의 남성주도적 입장을 고수하였던 것은 애국계몽운동의 사상적 한계의 일면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애국계몽가의 한계성이 여성단체의 여성운동에 투영되어 그 한계성을 답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현모양처주의 여성교육의 일정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로써 식민지 주민을 위한 일제의 식민지교육정책 시행의 초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상의 사상적 한계속에서 대한제국 말기 여성운동의 전개를 주도한 대표적 여성단체로서 진명부인회와 여자교육회가 주목된다. 이 두개의 여성단체는 신분구성과 활동, 그리고 사상면에서 상이하게 구별되는 특징을 지녔다. 본고는 이들 진명부인회와 여자교육회에 초점을 맞추어서 당시의 일간지와 잡지, 문집류 그리고 족보 등의 일차 자료를 이용하여 당시 여성단체의 구성원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이고 본질적인 여성운동 전개의 계기를 추출하여 그들의 요구를 제시하고, 활동을 통하여 운동의 방법론과 사상을 분석함으로서 애국계몽기 여성의 여성운동의 성격과 그 역사적 의의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진명부인회는 여성들에 의하여 조직되고 여성들에 의하여 운영된 최초의 여성단체이다. 그 구성원 대부분은 여자교육회 등에서 단체활동을 한 경험을 살려 보다 확실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의 독자적인 여성단체를 운영하고자 단체를 조직한 것이다. 진명부인회의 발기인들이 여자교육회를 이탈하여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게 된 동기는 첫째 신분상의 격차로 인한 괴리감. 둘째 여자교육회의 민족운동에 대한 외면, 셋째 여성교육관의 차이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즉 남편의 직함만으로 단체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부실여성(副室女性)들은 황실 측근의 이지용부인 이옥경 등 고관현직의 정실이 등장함에 따라 단체로부터 소외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한 고관현직의 친일여성들은 친일적 가정환경으로 말미암아 일본화=서구화되었다. 뿐 아니라 그들이 전개하는 민족현실과 유리된 단체운영 및 여성운동은 친일적 행위와 무관하지 않게 전개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친일적인 여자교육회와 양립되어 활동을 전개한 민족주의적인 여성들로 구성된 진명부인회는 그들과 대립적인 사상과 여성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통감부권력의 이간책동에 의해 여자교육회를 친일화의 방향으로 유도하여 민족계 언론으로부터 지탄받도록 획책하였으며, 한편 새로이 민족언론지의 성원을 받기 시작한 진명부인회의 활동을 방관하지 않았다. 특히 진명부인회는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해 오던 여성들의 단체이었다. 물론 진명부인회 자체내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진명부인회가 주력한 사업의 하나가 자강론에 입각한 민족교육운동이었다. 그 일환으로서 광동학교와 양규의숙을 지원하였으며, 여성계몽을 표방한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한 일련의 민족주의운동은 돌연히 신소당의 회장직 사임과 함께 점차적으로 종식되었다. 그것은 일제의 국채보상운동을 해소시키기 위한 책동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진명부인회보다 앞서 1906년 5월에 조직된 여자교육회의 조직은 본회와 대외업무 및 회계x재정을 담당하는 찬무소, 그리고 교육기관의 삼원적 체계가 그 특징이다. 그러나 조직구성원의 변화에 따라 운영의 중심체가 바뀌었다. 그것은 대체로 3기로 나뉜다. 제1기는 1906년 6월 ~ 1907년 2월로 창단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여자교육회가 양규의숙을 후원하는 여성교육단체의 필요성에 대응하여 조직되었다는 특성대문에 양규의숙을 조직하고 여자교육회를 발기한 사람들로 구성된 찬무소원들에 의해 회운영이 주도되었다. 회의 구성은 교육과x위생과x여공과의 삼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이 단체결성의 목적이 육영사업에 있었으므로 교육과가 그 중심체가 되었으며, 교육기관 보조와 아울러 잦은 통상회를 개최하여 단체운영 및 조직훈련을 하였으며 이것은 여성의 정치참여의 배제라는 시대적 한계상황 속에서나마 정치, 조직, 사회적응훈련의 효과를 가져왔을 것으로 보이며, 여성의 사회적 경험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한 의식개혁을 목적으로 토론회를 한달에 2회 가졌다. 제2기는 단체의 활성화를 목적으로 이옥경을 총재로 추대, 총재중심체제로 전환하였다. 이옥경은 종친 이지용의 부인으로서 그의 남편이 을사조약에 협조한 오적 중 일인인 만큼, 그리고 현직 내부대신이라는 고위직인사이므로 여자교육회 총재로의 추대는 여자교육회의 변질을 뜻하였다. 이로써 초창기에 활약하던 의욕적 여성운동가 및 신분적 한계를 느낀 부실층 여성들이 여자교육회를 탈퇴, 국채보상운동 단체조직 및 진명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그 이후 여자교육회는 제1기에 기획한 제사업을 실현시키기 위한 대정부 활약과 아울러 정부의 재정적 후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정미7조약 체결을 전후한 시기로서 위기의식이 고조된 애국적 인사들에 의한 항일의병운동x국채보상운동x을사오적에 대한 암살시도 등이 기획되고 있었으나 이들은 민족운동은 외면한 채 민족현실과 유리된 순수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회운영의 주도권은 이옥경에게 편재되기는 하였으나, 한편 찬무소원의 여성운동이념이 이옥경에게 큰 영향을 끼쳐 이후 이옥경의 활약에 많은 자극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3기는 강윤희 등의 서북학회원에 의한 교육기구의 쟁탈전에 의한 단체의 명예가 실추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단체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이것은 여성의 단체운영능력에 대한 불신으로 당시 애국적 계몽운동가들의 사상적 한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교육회는 끝내 투쟁하여 명예를 회복하고 여자보학원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약화된 찬무소와 유대감을 상실한 보학원유지회 등 모순되기는 하나 여자교육회의 전형적 특징인 삼원체제가 붕괴되고, 오랫동안의 강력한 후원인이었던 이옥경의 냉담은 단체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단체를 조직하여 정치적 능력을 성장시키고, 교육활동을 통하여 여성인재를 육성하며 또한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여성지도자를 양성시킨 것은 후기여성운동의 맹아적 존재로서 그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진명부인회와 여자교육회의 활동과 사상을 볼 때 명백하게 애국계몽운동과 연계되어 여성운동과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대한제국기 여성단체의 활동은 애국계몽운동과 일직선상에서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 애국계몽운동과 완전 일치한다면 여성운동x여성해방운동으로서의 성격은 포기해야 된다. 그러나 진명부인회와 여자교육회는 여성의 경제력 향상과 자립을 위한 제반사업을 기획하는 등의 고유의 활동을 전개하여 여타 애국계몽단체와는 운동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났다. 이에 여성운동단체의 활동을 여성해방운동 내지 여성지위향상운동이라는 기존가치에 대한 혁신운동적 차원에서 고찰되어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물론 이에 대한 평가가 전무하였던 것은 아니다. 초기 여성사연구가 긍정적 평가에 치우쳤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부각시키지 못하고, 일괄적으로 북촌양반 부녀자들의 부르죠아적 사회개혁운동으로 규정하였을 뿐아니라 대한제국기에 전개된 전반적인 여성단체를 단순한 민족운동, 자강운동, 항일운동으로 평가하여 여성운동단체로써의 성격을 간과시켰던 과오에 다소의 수정을 가할 수 있었다. 즉 대한제국기의 여성운동은 인간해방을 위한 여성해방x신분해방적 차원에서의 여성해방운동이라는 혁명적 성격을 지녔다. 그것은 그들이 처하였던 전통적x봉건적 사회에서의 사회적 신분의 여하에 따라 달리 표출되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대한제국기 전개된 여성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성운동가 내지 여성운동을 후원한 남성 훼미니스트인 진학신x진학주, 그리고 권중현의 가계 분석을 통하여 그들이 여성운동을 전개하게 된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여성운동이 사회적 운동으로 표출되게 된 연유를 살펴보았다. 또한 대한제국기 여성운동의 시대적 한계성으로 말미암은 봉건적 한계도 적지 않다. 당시 일반사회단체가 당시 집권한 친일정권에 대한 반체제적 성격의 교육구국x자강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탄압책으로 말미암은 단순 교육운동x계몽운동단체로 전락의 길을 채택, 민족운동으로써의 성격을 상실하여갔듯이 여성운동단체도 마찬가지였다. 즉 여성운동단체는 애국계몽단체의 일환으로써 교육구국운동과 아울러 여성해방을 위한 여성의 실력 내지 경제력 행상을 통한 여성실력양성운동이라는 이중의 부담이 있었다. 당시 여성들은 사회적 훈련의 부족이라는 여건의 한계성으로 말미암아 사회비판의 논리가 정립되지 못한 데다가 단체조직능력 부족 내지 권력담당계층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남성 의존도가 클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권력의존적으로 흘러 친일노선의 세력과의 결합이 불가피하였고 대남성 의존도가 컸기 때문에 단체의 조직이 남성중심적이었고 남성의 보수적 여성관에 휩쓸리게 되었다. 즉 여성운동은 남성의 사회개혁운동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 고유의 영역이 있음을 간과하였던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대한제국기 여성운동이 여성해방운동의 측면을 간과하였기 때문에 여성해방운동의 철저를 기하지 못하였다는 시대적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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