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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집정시 권력구조에 관한 연구

Title
대원군집정시 권력구조에 관한 연구
Authors
안외순
Issue Date
1996
Department/Major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bstract
한국정치사에 있어서 大院君 執政期(고종1-고종10, 1864-1873년)는 안으로는 勢道政治的 遺産을 淸算하고 밖으로는 資本主義로의 世界秩序 再編에 對應해야만 했던 시기다. 즉 대내적으로는 기존 중세왕조적, 그것도 변형왕조적 통치질서의 변혁을 요구하는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서구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세력의 통상개방 요구에 직면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 하기 위해 大院君 執政期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실패로 끝났다. 때문에 지금까지 대원군집정기의 노력에 대해 진보적이라는 평가와 보수적이라는 평가가 계속되어 왔다. 이 논문은 이러한 쟁점의 대상인 大院君 執政期의 性格에 대해 權力構造 分析을 通해 접근하려는 것이다. 즉 1) 大院君執政期 政治權力의 政治理想과 2) 權力의 主體와 配分, 權力 行使機構 3) 政治權力의 諸基盤 4) 權力에 대한 挑戰과 그 對應은 어떠하였는지를 고찰하였다. 그 분석결과를 要約하면 다음과 같다. 大院君 政權의 政治理想은 ‘王室强化가 곧 國家强化’라고 인식하여 제반 變革의 方向이 中央執權的 王朝秩序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던 ‘鮮初’로의 復歸로 향하고 있었다. 이는 政治體制的으로는 中世 統治秩序 原理로서의 專制王朝體制 再建 및 强化를 의미하였다. 480년 전의 ‘鮮初의 政治社會 및 强力한 專制王朝’를 복구하기 위해 대원군은 그의 모든 정치적 역량을 쏟았고 權力構造도 이를 위해 形成되었다. 權力機構面에서는 세도정치기 외척 통치계급의 지배기구이던 備邊司를 대신하여 政務機構로 議政府를 부활시키고 軍務機關으로 三軍府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기구로 정비되고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인 것은 王室機構인 宗親府였다. 명목만의 王家宗室 禮遇機關이던 宗親府가 사실상 정치참여 기구로 그 변신이 가능했던 동기는 大院君이 유일하게 맡고 있는 공식직함이 宗親府勾管位였다는 점과 세도정치기의 외척세력들을 청산하기 위해 宗親勢力을 支持基盤으로 삼아 王室 爲主의 支配構圖를 摸索한 데 기인한다. 이러한 王室爲主 政策은 文武堂上官의 人事構成에 나타난 權力支配에서도 나타났다. 堂上官職에 璿派·宗親이 12.4%를 차지하여 고위 관직구성에 제1집단이 되는 것은 전에 볼 수 없던 현상이고, 나아가 安東金門에 대해서도 10.08%를 할당하여 기존의 평가와는 달리 세도정치가 정권담당 세력과 連帶·提携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단순한 數値的 평가를 떠나 核心 要職만을 본다면 이들 두 집단에의 의존도는 60%를 넘어서고 있다. 이 시기 권력분배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그 동안 조선의 정치구도상 소외받던 武班의 權益이 强化되었다는 점과 부분적으로 편파적인 붕당 지배구도를 타파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老論이 50%를 넘는지배율을 점하고 있다. 官職交替 實態는 議政團·戶曹·兵曹·軍營大將의 長期在職을제외한 나머지 모든 관직은 평균 재임일 수가 1-2개월 사이이며 大司諫과 大司憲의 경우는 평균 17.2일, 17.9일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관직분배가 단순한 상징적 의미 이상이 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어서 당시의 理念的·經濟的·軍事的·社會的 基盤이 모두 大院君執政期의 政治理想인 專制王朝를 재건 강화하기 위해 기능하는 權力基盤的 側面을 살펴보았다. A 이데올로기的 基盤으로서 ‘斥邪衛正’ 이데올로기는 그 내용상 척사와 위정으로 나뉘어 검토될 수 있었다. 對外次元의 이념인 ‘斥邪’는 대원군 집정 3년 이후 統治者와 儒林 모두에게 있어서 共通의 여타 사상적 모색을 허용치 않는 이념적 무기였다. 그러나 對內次元의 이념인 ‘衛正’은 大院君側은 ‘强力한 王室 構築’이 그 내용인데 반해, 儒林側에서는 ‘內政의 失政을 바로 잡는 것’을 의미하였다. A 財政的 基盤은 稅源擴大를 위한 量田 시행·免稅結 정리·戶布法 실시 및 각종 賦稅와, 當百錢 鑄造·淸錢 輸入流通에 따른 貨幣政策, 還穀과 社倉制에 의한 利子事業과 별도의 대민 기부금(願納錢)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을 통해 상대적으로는 이전보다 재정을 증가시킬 수 있었으나 10년 동안 계속된 각종 土木工事와 두 차례의 戰爭 및 軍備로 軍關係機構를 제외한 전체적인 재정은 여전히 부족하였다. A 軍事的 基盤面에서는 對內的 兵權次元에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對外的 國防次元에서는 다소 未洽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大院君 政權이 文官보다는 武官을 지지세력으로 삼으로 한 것과 親衛機構 强化등으로 兵權 確保는 확고히 할 수 있었으나 國防力 强化次元의 노력은 기구정비와 무기개발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朝鮮의 痼疾的인 軍事力 弱化傾向을 극복하기에는 力不足이었기 대문이다. A 社會的 基盤面에서 볼 때, 大院君은 표면적으로는 당시 양대 기본계급인 兩班과 農民, 그 어느 쪽도 지지기반으로 삼지 않았다. 그는 全州李氏 宗親勢力을 除外하고는 特定官僚와 武將, 下級胥吏, 褓負商, 乾達, 藝能人 등을 個人的?私組織 次元에서 活用하였다. 다만 利害의 本質的 側面에서 專制王朝秩序를 追求한다는 점에서 大院君과 兩班階級은 이해가 일치하였다. 때문에 이상의 네 가지 기반 모두에서 대원군은 양반지지체제의 기본구도를 무너트릴 수 있는 근본 토대는 전혀 파기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재지 양반유림들은 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대원군이 자신들의 이상과 어긋난다고 판단, 비판세력으로 존재하였다. 한편 大院君執政期 權力構造를 단기적으로는 공고화시켰으나 결국은 붕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학을 한 것은 對外關係였다. ① 斥邪衛正 이데올로기 하에 이미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淸國에 대해, 조선을 小中華視하는 태도와 더불어, 消極的인 事大關係를 유지하다가 후기로 들면서 胡狄視하는 傾向을 띄었다. 역시 明治維新을 통해 국체변통을 단행한 日本과도 消極的 交隣關係를 유지하다가 斥倭로 돌아섰다. 그러나 日本은 바로 이 시기에 이전부터 자국의 모순 극복책으로 전개해 오던 征韓論을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시켰다. 한편 西洋과는 집정 초기 2년 동안의 探索期를 거쳐 서양과의 교류가 전제왕조질서 재건이라는 정치이상과 背馳된다는 판단을 내린 大院君이 대외정책의 大網을 斥邪·斥洋으로 방향을 정하고 두 차례의 戰爭까지 불사하였다. 철저한 銷國政策이었고, 이는 조선의 전 계층을 통합시키는 구심점이 되어 유림을 비롯한 대원군의 비판세력조차 무마하였으며 이를 넘어서서 철저한 동일 인식권으로 포섭함으로써 短期的으로는 西洋의 通商要求와 軍事的 侵略이 大院君의 權力을 鞏固化시켰다. ② 한편 12살에 王位에 올라 10년이 지나는 동안 高宗은 이미 成人이 되어 獨自的인 政治 遂行能力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高宗은 고종 9(1872)년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린나이에 황제가 된 淸 皇帝가 叔父인 恭親王의 攝政으로부터 벗어나 親政體制로 轉換한다는 情報를 接하였다. 이로부터 고종은 遣淸回還使들의 召見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청 황제의 親政에 대한 정보를 접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비교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들 遣淸使臣들과의 召見過程에서 고종은 또 西洋에 對해 점점 大院君과 相異한 認識을 형성해갔다. 이러한 대외정세에 대한 인식을 계기로 高宗은 스스로의 親政構圖를 摸索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종이 스스로의 친정 가능성을 2년여에 걸쳐 의식하고 있던 와중에 고종 10년 10월 말 崔益鉉은 대원군을 비판하는 상소를 제출함으로써 이를 실현시키는 契機를 提供했다. 전제왕조질서 수립을 추구하던 대원군 앞에 源泉的인 專制權力의 主體가 제자리를 찾고자 했을 때 대원군 권력은 쉽게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사 전개를 볼 때 이후 근대국가로의 지향 노력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外壓의 성격이 대원군이 집정하던 10년 前과는 그 본질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국가사회의 정치권력이 해당 사회의 변화 욕구를 수용하거나 부응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치명적인 부작용의 영향을 傳統時代인 大院君執政期의 權力構造 속에서 그 一例를 찾아 볼 수 있었다. ; In Korea political history, Daewongun administration was the first contact period between traditional society and modern. At that time the working classes demanded domestically the revolution of existing monarchy governing system and externally there was the request of open-trade of western capitalistic imperialism. I analyze the structure of the political power of Daewongun administration. This paper will show that how the political power had been developed, who gained it, through which apparatus it had been exercised, on which basis it had been standed, what was a challenge and how it had responded. Nominally person is supreme power was a king, Kojong, but truly his real father Hungsun-Daewongun, had exercised it beyond a kind of State Council, Uijongbu, without any official function. The first Daewongun period was from 1864 until 1865, a regency period by Queen mother Joe. The second during which he had monopolized power was from 1866 until 1871. The third had been developed from 1872 until 1873, when was a breaking-in period of royal governing of Kojong. The political ideal of his power was to reconstruct and intensify an monarchy. Considering intensification of royal as that of state, he focused on return toward the early Chosun dynasty when the revolution had been directed to build a centralized authoritarian rule. As for an apparatus of power, he revived State Council, Uijungbu, as an administration committee instead of Bybunsa which had been the ruling apparatus of maternal relative sovereign power. Establishing Three Army Commend, ‘Samgunbu’, as a military apparatus and strengthening the kindred of the king, Chongchinbu, as a royal household apparatus, he formally restored the early Chosun dynasty’s three unit apparatus. But the State Council was nothing but a rename of ‘Bebunsa’ and ‘Samgunbu’ under the name had not been operated substantially until 5 years had passed in Kojong period. On the contrary, the kindred of the king and other royal guards such as Yonghoyoung, Uyoungchung, Kumweyoung had been vivaciously equipped and intensified for 10 years of early administration to drive a policy run for royal family. The division of power in personneling of civil and military servant caused intensification of Sunpa-royal family, solidarity of Andong Kims and training, strengthening of military. The actual condition of change of government post resulted in holding a long term general of State Councilary band, the minister of financies, military, the king’s bodyguards of the military and too much change of other official post. That demonstrated that power of Daewongun was a dictatorship. The basis of power of Daewongun was examined in four parts. The sources of ideology was the rejection of heterodoxy and defense of orthodoxy ‘Chuksa-Wijung’. ‘Chuksa’ worked as a doctrine of foreign policy, which defensed against his misgovern 3 years after he had hold power and had become an ideal arms. So the ruler and the confucians could not be allowed to look for other ideology. Domestic doctrine, ‘Wijung’, was to built a powerful royal family for a ruler, on the other hand confucians thought it meant correcting misgovern. The financial basis of power had been accomplished by several policies, which were measuring a farm, arranging tax-free field, operating textile as a tax, other secondary duties, minting of Dangbaek Coins, importing and circulating of Chung Coins, dong interest-business of exchanging grain and village-ware house, and raising contributions. Relatively finances were increased, but because of all sorts of continuous public works for 10 years, two wars and military preparation, other departments except military-relative apparatus had been still in lack of finances. As for military basis, Daewongun made an effort to intensify naval official over civil one and strengthen a bodyguard system in order to secure domestic military power. But it was not so much successful in consolidating Three Armies commend, strengthening military capacity, and intensifying national defense. He did not took a special class for his back-up basis. As a group supporter, he utilized certain officials, generals, low-class clerk, peddlers, a crowd of scamps and artists as a personal and private system. Through the first two years of groping period, concluding the interchange of them opposed to his political idea, which was reconstruction of an monarchy, he directed and greatly persisted the doctrine of foreign policy toward ‘Chuksa’ ‘Chukyang’, the rejection of western. A policy of seclusion had become a centripetal force which unificated whole classes. It won the confucians and other critical power against him as if they had been identical, with a result that western request of open-trade ad military attract solidified his power for short times. But in 1872 (Kojong 9 year), obtaining information that the emperor of Chinese hold his own power out of regency of his uncle, a king, Kojong who had already prepared to run politics searched for his own political organization. When he made an decision to operate government by himself, Choi-Ik-Hyun offered an chance of manifestating it through critical memorial against Daewongun to the throne. There was no choice but to destroy the power of Daewongun when the original owner of power tried to get its own post. Furthermore destroying it was easier because Daewongun power did not represent majority, nor was operation of power systemited through apparatus, which was characteristic of dictatorship. The nature of Daewongun power was that ruling class cut off the need of revolution from inside and outside toward modern society, maintained and intensified the monarchy. The side effect could be fatal when the power of state could not accept or meet the demand of revolution of society. The model case can be found in the period of Daewongun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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