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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대 문인의 의식과 문학 연구

Title
고려 공민왕대 문인의 의식과 문학 연구
Authors
김보경
Issue Date
2002
Department/Major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bstract
본 논문은 공민왕대 문인들의 의식과 문학의 제 양상을 고찰하여 그 문학사적 의의를 규명하고, 이를 통해 고려후기 문학사의 위상을 재정립함을 목적으로 한다. 공민왕대에는 科擧 합격자 수가 급격히 증가해 문학담당층의 양적 확대를 예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적 확대와 더불어 문인들은 座主-門生 관계를 통해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性理學 전수 과정을 통해 이념적 동지로서 결합하고 있었다. 이제 문인들은 명실상부한 학문적 문학적 동류집단을 형성해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고려전기 예·인년 간에 비견되는 문학적 성황을 이루어 내었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공민왕대 문인들은 앞 시기 사상과 문학적 성과를 계승 확대하는 동시에 이후 전개되는 사상사 문학사의 변화적 요소를 싹틔우고, 키워 나가고 있었다. 공민왕대 문인은 대체로 삼 세대로 구분된다. 첫 세대는 성리학 수용 초기의 安珦 또는 白 正의 門人이다. 이 첫 번째 세대는 성리학 도입기 인물과 李穡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다음 두 세대는 다시 각각 앞 세대에 대해 門人 또는 門生의 관계에 있다. 이들은 그 전체적인 추이로 볼 때, 교육제도 및 과거제도의 개편과 일정한 관련을 맺으면서 성리학을 현실 정치과 문학의 이념적 기반으로 적극 수용, 실천해 가고 있었다. 한편으로, 세대 및 개별 수용주체의 입장에 따라서는 朱子學 이외 다른 성리학에 대한 접근 및 이해의 특성을 다양하게 드러내고 있기도 했다. 먼저, 공민왕대 문인들은 心性論이나 修養論만큼은 아니지만, 世界의 本質 및 生成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한 논의를 남겨 놓았다. 이들의 {주역} 수용양상을 살펴 보면 邵雍의 象數易과 程朱의 義理易이 망라되어 있으며, 세계의 본질 및 생성에 대한 이해에서는 程朱의 理論뿐만 아니라 張載의 氣論으로부터도 크게 영향받고 있었다. 심성에 대한 이해에서는 인간의 본성으로 性情이 자주 거론되었다. 이색은 性卽理의 관점을 견지하는 한편 心에 대해서도 깊이 천착했다. 수양론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활발하게 다루어졌다. 백문보는 맹자의 수양방법과 戒·謹·敬·畏를, 이달충은 誠과 敬, {대학}의 단계적 실천방법을 제시했다. 이색은 程朱의 수양론 체계를 받아 들여, 居敬을 통해 中和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 한편, 문인들은 문학의 본질을 言志 로 파악하는 데 기본적으로 합의하면서도, 개인의 성리학적 성숙도와 의식적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른 문학인식의 양상을 보여 주었다. 그 중 가장 선진적인 형태는 白文寶에게서 나타나는데, 그의 주장은 우리 문학사상 제일 먼저 성리학에 입각해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런 제 문인들의 문학인식적 특성이 강화·종합되어 李穡에 이르면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이것이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文以載道論으로 승계 발전되는 것이다. 공민왕대 문인들은 14세기 역사적 전환의 현장 한가운데,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전환점에 처해 있었다. 이들은 經明行修之士를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士의 전범으로 삼아 사 의식을 정비하고, 군주의 역할 및 군주와 신하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도 재조정해 갔다. 그리고 강한 사회적 책임감과 현실참여 의지를 바탕으로, 經世意識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갔다. 한편, 檀君紀元說과 箕子不臣說을 확립, 지속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과 국가의 독자성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이러한 노력은 東土의 자연과 지역의 특수한 고사 및 전설을 문학의 주제나 소재로 끌어 들이고, 자국 역사에서 바람직한 人物群을 찾아 詩化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낙관적인 시대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濟世의 열정을 강하게 표출했으나, 실제 현실에서는 이들이 추구하는 조화의 현실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로부터 出處에 대한 고민이 촉발되었고, 저마다 상이한 대응방식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대응방식의 차이는 세대에 따른 정치적 입장과 성리학적 인식의 차이와 함께 개별 주체의 세계관과 현실인식, 정치의식 등 다양한 측면과 복합적인 관련을 맺으면서 나타났다. 즉, 이들은 세계와 시대와 자기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세대별 주체별 조건에 따라 상이한 대응방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李集 등의 경우를 통해서는 在野的 士大夫의 출현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공민왕대 문인의 문학활동과 문학의 양상을 고찰한 결과,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즉, 문인들 가운데에는 기존의 사대부 개념으로는 포괄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金九容은 고려후기 權門勢族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金方慶 가문의 후손이며, 李齊賢·李仁復·李穡·鄭樞 등은 고려후기의 世族으로 성장한 부류이다. 이에 본 논문은 기존 사대부 가설을 전면적인 재검토하여, 예·인종대에 北宋 사대부에 조응하는 고려 사대부의 출현을 상정하고, 이로부터 사대부가 변화 발전하는 과정을 정리했다. 여말선초 역사주체로서의 사대부는 바로 이러한 고려전기 이래 사대부층의 변화와 발전과정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본 논문은 공민왕대 문인들이 앞 시기 사상과 문학적 성과를 계승 확대하는 동시에 이후 전개되는 사상사 문학사의 변화적 요소를 싹틔우고 키워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상사의 측면에서 볼 때, 고려후기 유학은 고려전기로부터 축적되어 온 유학사상을 내면적으로 계승 극복하는 가운데 원간섭기에 본격적으로 성리학이 수용됨으로써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공민왕대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앞 시기의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동시에 이후 고려말기에서 조선시대에 나타나는 사상의 새로운 국면을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었다. 문학사의 측면에서 이들의 문학 본질 및 효용에 대한 인식은 文以載道論으로 추향해 나아가는 도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문인들의 출처인식과 대응방식을 통해 자연인식의 발현양상과 함께 재야적 사대부의 출현 단서를 찾아 낼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성과이다. 또한, 이러한 발전적인 사상진로와 함께 당시 문인들이 보여 주고 있던 다양한 사상적 모색이 갖는 의미도 대단히 중요하다. 邵雍의 象數易과 程朱의 義理易이 망라되어 있으며 程朱의 理論뿐만 아니라 張載의 氣論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한편, 白文寶의 글에 보이는 虞集이 草廬學派로서 朱陸和會의 입장이었다는 점과 李穡이 심성론을 전개하면서 心에 크게 천착해 있었다는 점 등은, 당시 元 유학계에 상산학과 주자학이 병존하고 있었다는 정황과 연결지어 볼 때, 고려 성리학의 성격을 주자학으로 일괄 규정하는 데 주저하게 만든다. 이들은 성리학을 받아 들이고 주자학을 지향해 가고 있었으나, 그것이 이들을 지배한 유일한 사상체계는 아니었다. 이와 같이 공민왕대 문인들과 그 문학 및 사상이 보여 주고 있는 발전적인 진로와 함께 이들이 시도하고 있었던 다양한 사상적 모색은, 고려후기 문학사 및 사상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 This thesis intends to examine the significance of the reign of King Gong-min for a literary history, and reestablish its phase for the literary history of the late period of Coryea, through study of its the literary men s consciousness and several literary aspects. The reign of King Gong-min saw a steep increase in the successful candidates for the state examination, which forecasted an enlargement of literary men base. Together with this, those literary men were intensifying their bonds through the examiner-pupil relationship, while combining themselves as ideological comrades during the instruction of 性理學(Sunglihak). Now that they had built up the firm academic and literary fellowship to interchange intimately, they achieved literary prosperity comparable to that of Yae·In during the early time of Coryea. Based on such a background, they were not only succeeding to literary effects of the previous period but also sprouting and growing factors of change in literary and ideological history, which would develop thereafter. The literary men under the reign of King Gong-min are divided into three generations in general. The first generation is the pupils of Ann Hyang or Baek YiJung during the early acceptance and apprehension of Sunglihak. It places itself between Sunglihak s introducers and Yi Saek. Each of the next two finds itself as pupils of the former one. On the whole, they were on the road to active acceptance and practice of Sunglihak as an ideological base for practical politics and literature, in a regular connection with the reformations of educational system. Meanwhile, according to generational or individual receiver s standpoint, they also showed different qualities of approach to other Sunglihak than Joojahak Firstly, the literary men under the reign of King Gong-min left remarkable discussion about the essence and generation of universe, though not so much as about 心性論(mentalism) or 修養論(culturism). On looking at their aspects of accepting {周易(the Book of Changes)}, we can find them covering 邵雍(So-Ong) s 象數學(Sangsuhak) and 程朱(JungJoo) s 義理學(Uirihak). And for the understanding of the essence and generation of universe, they were greatly influenced by 張載(JangJae) s 氣論(Kiron) as well as 程朱(JungJoo) s 理論(Yiron). As for the understanding of mentality, nature was often an issue referring to human nature. Yi Saek sought for 心(Heart) deeply, maintaining the viewpoint of 性卽理( nature-is-principle ) at the same time. Culturism was the most briskly discussed issue. Baek MoonBo suggested Maeng-Ja s way of culture and 戒·謹·敬·畏(caution, restraint, respect and awe), while Yi Dal-Choong suggested the gradual practice of 誠(Sung), 敬(Kyung) and {大學(the Great Learning)}. Yi Saek, who had accepted JungJoo s culturism system, suggested the way to 中和(neutralization) through 居敬(Keokyung). By the way, those literary men showed slightly different cognition of literature, according to personal mental characteristics and maturity in Sunglihak. Its most advanced form can be found in Baek MoonBo, whose opinion is of important meaning in the fact that it clearly offered a new direction for literature, based on Sunglihak for the first time in our literary history. These various cognitive characteristics of literature intensified and put together to reach Yi Saek, who systemizes it, and then developed into 文以載道論(MunYiJaedoron) at the end of Coryea and beginning of Chosun. The literary men under the reign of King Gong-min were at the turing point between the old times and new, at the middle site of historical transition in 14th century. They made a model of 經明行修之士(a gentleman KyungMyungSooHaeng) for new age 士(gentleman), to consolidate the gentlemanship, and modified their understanding of the sovereign s role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overeign and subject. They also practiced 經世意識(consciousness of administering the world) based on strong responsibility for society and will of commitment. On the other hand, they declared home and abroad, the nation s identity and individuality, by establishing and emphasizing 檀君紀元說(the Tangoon-era doxy) and 箕子不臣說(a view of Kija as anything but a subject). These efforts came to employ local ancient stories or legends and the nature of 東土(Eastland) as subject/material for literature, and find some desirable men to poetize out of our own history. Basically they had optimistic sense of the time and claimed to save the world. But in reality, the actual harmony they sought for was not so easy. From here was stirred the anguish about 出處(going out), and the ways of response varied. The difference among ways of response had complex relationship not only with each generation s political position and understanding of Sunglihak but individual view of world, reality and politics. In other words, they are showing different ways of response according to their states, worrying about the world, about the times and about their realities. In particular from Yi Jip, we can find leads to the emergence of 士大夫(Sadaebu) out of power. After studying the literary activities and trends during the reign of King Gong-min as stated above, I could catch an important fact. That is, there were a majority of literary men who didn t consist of the existing concept of Sadaebu. For example, Kim KuYong is an offspring of Kim Bang-Kyung family, the typical power clan during the late period of Coryea. Yi JaeHyun, Yi InBok, Yi Saek and Jung Choo are those who grew to raise power family of the late period of Coryea. So this thesis reviewed totally the existing Sadaebu assumption and brought up into discussion the emergence of Coryea Sadaebu (corresponding to Song Sadaebu), from which I stretched out the process of transformation and development of Sadaebu. It is in the process of transformation and development from the first half of Coryea onward, that Sadaebu, as the historical subject at the end of Coryeaand the beginning of the Chosun, should be understood, I think. Meanwhile, this thesis could see that the literary men under the reign of King Gong-min were succeeding to the literary and ideological results of their previous period, as well as sprouting and growing factors of change in literary and ideological history, which would develop thereafter. Taken a side view from ideological history, the late Coryea Confucianism, as it inherited and overcame the accumulation of Confucianism since the early Coryea, achieved a breakthrough by the serious acceptance of Sunglihak during 元干涉期(the intervention of Won). Based on this, the perod of King Gong-min was already preparing for new phases of ideology which were to appear between the end of Coryea and the beginning of Chosun. For the literary history, it is remarkable that their notion about essence and utility of literature shows the route toward 文以載道論(MunYiJaedoron). Another result is that I could find a lead to the coming of Sadaebu out of power together with their notion of the nature, by way of the response and 出處認識(consciousness of going-out) of those literary men. Along with that, it is also very important what their various idealogical grope meant. They covered 邵雍(So-Ong) s 象數學(Sangsuhak) and JungJoo s 義理學(Uirihak), inspired not only by 張載(Jang Jae) s 氣論(Kiron) as well as 程朱(JungJoo) s 理論(Yiron). However, it might be somewhat hasty to define the quality of Coryea Sunglihak as Joojahak, considering the follows; Woo Jip, as a member of the 草廬學派(Cho-Ryea school), stood for 朱陸和會(compromise between Joo and Yook), like BaekMoonBo wrote; Yi Saek greatly stuck to 心(heart) developing his mentalism; at that time there coexisted Sangsanhak and Joojahak at the Confucian world in 元(Won). Accepting Sunglihak, they were moving toward Joojahak, but which was not the only system of thought dominating them. Like above, the prospering process that the literary men during the reign of King Gong-min took, and their various attempt in literature and idea can give a big hint on understanding the literary and ideological history of the late Coryea, I 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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