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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주의의 발생양식과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 : 민족주의의 사상과 역사적 전개의 분리적 검토를 통한 통합적 이해의 시도

Title
한국민족주의의 발생양식과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 : 민족주의의 사상과 역사적 전개의 분리적 검토를 통한 통합적 이해의 시도
Authors
김혜승
Issue Date
1990
Department/Major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bstract
이 논문은 한국 민족주의의 발생양식과 전개과정에 있어서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럼으로써 한국 민족주의가 각 단계에서 나타내는 특징과 그 역사적 의의를 보려는 것이다. 한국 민족주의는 조선조가 처한 당시 사회경제적 상황과 대외적 관계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나온 실천적 대안으로서 실학파에 의한 사상화의 단계, 대원군에 의한 정책화의 단계, 동학농민에 의한 운동화의 단계를 거치며 형성되고 있었다. 한국 민족주의는 그 발생을 위해서 우선 대내적 과제인식이 요구되었다. 즉, 조선조가 처한 당시 사회 경제적 상화광 대외적관계에 대한 비판의식 그리고 여기에서 예측되는 조건조가 처하게 될 역사적 도정에 대한 우려에서 나온 실천적 대안으로서 대두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 민족주의에 있어서 이 같은 과정은 실학파에 의한 사상화의 단계, 대원군에 의한 정책화의 단계, 동학농민에 의한 운동화의 단계를 거치며 형성되고 있었다. 실학자들의 세계인식 즉 화이적 보편세계로부터 조선조의 개체성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한국 민족주의는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 학자들의 세계인식은 민본주의적 지향위에서 국가 또는 국민전체를 위한 정치적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공리적 사고방법에 의한 대내적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실학파의 이와같은 민족주의 사상은 현실적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민족주의적 정책대안으로까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정책적 대안은 실천되지 못하고, 역사적인 전개의 과제를 맡아야 했던 집권층에 의해, 실학자는 서학과 함께 탄압의 역사를 맞이하였다. 이로써 민족주의 사상을 형성하였던 실학자는 학파로서 단절된 채, 한국 민족주의는 그 사상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전개되지 못하고 좌절되고 만다. 실학파에 의한 민족주의 사상의 형성은 조선조가 민족주의로서 전개시켜야 할 대내적 대외적 과제의 종합적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과 함께 그 발생에 있어서 내재적 계기에 의한 자각의 과정이라는 특징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집권층에 의한 실학파의 탄압은 조선조가 이후 맞이할 제국주의적 대외 환경에 비추어 세력균형에 대한 대응책을 내제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의 상실이다. 이 점에서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좌절의 시작이었다. 이 좌절은 제국주의적 서양열강의 극동으로의 세력균형 확대에 따라, 침략적인 외세의 충격과 만남으로써 심각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한국 민족주의는 주체적 과제인식과 그 실현이라는 주관적 단계를 열강의 정책과 행동에 대한 대응이라는 객관적 상황속에서 수행되어야 하는 역사적 단계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당시 집권자인 대원군은 위정척사적 쇄국양이정책이라기 보다는 강력한 반침략적 저항정책으로 대내적으로는 민본주의적 사고에서 나올 수 잇는 내정개혁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의 내적개혁정책은 평등성을 지향하며 민의 역량의 확대에 기초하여 국가의 역량을 확대시키는 과정이었다. 대외관계에서 그의 강력한 저항정책은 조선조에 대한 핵심적이 이해관계가 없는 서양열강에서는 더 이상 한국을 개국시킬 의욕을 갖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중앙집권적 체제의 정비와 함게 내정개혁정책의 전개가 실효를 나타내기 시작할 때, 대원군은 정권경쟁에서 밀려나며 이에 따라 그의 민족주의 정책도 좌절된다. 대원군의 민족주의적 정책의 좌절은 내정개혁정책의 중단뿐 만 아니라 민씨정권에 의해 정한론이 우세한 일본과의 수교라는 대외정책상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점점 심화되어 가는 외세의 침략 속에서 가장 광범위한 민중적 기반을 갖는 농민운동의 형채로 다시 전개됐다. 동학은 보국안민과 천인일여라는 국가와 민에 대한 관심의 기반위에서 대외적으로 자주독립의 지향과 대내적으로 평등사상의 지향을 가지고 교세를 확대해갔다. 이러한 동학사상 및 조직은, 조선조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반영시키며 임술민란이래 지속되어온 농민운동의 흐름과 결합되어 동학농민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승화게 된다. 그러나 집권층의 민씨척족은 동학농민의 개혁요구를 실천하는 대신 외세를 끌어들였으며 외세에 의한 침략과정에서 집권한 개화파와 일본군의 양면공격에 의해 동학농민의 민족주의운동은 좌절된다. 이미 한반도의 침략이 구체화된 단계였음에 비추어 주권을 유지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의 상실인 것이다. 이후 식민통치 하에서 한국 민족주의는 좌절하지 않고 1910년대 3.1운동에서 거국적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중의 민족적 역량을 확인함으로써 민족주의 운동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는 러시아 정부와 코민테른이라는 대외적 지원세력으로부터 정신적 물질적 후원을 받으며 국제적 연계속에 그 사상과 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따라 1920년대에는 노동, 농민운동 등 부문별 운동을 심화시키면서 총체적으로 민족주의 운동으로 결집화한다. 그 이론적 뒷받침은 반봉건, 반식민으로서 이전의 민족주의과제 내용과 그 흐름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다만 식민지 하라는 역사와도 관련돼 민족주의 운동이 해외로 확산돼 보다 광범위하게 결집된다는 특성이 나타나고 있었다. ; This is a study on the origination and development of Korean nationalism, thus showing its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s in various stages in Korean history. It may be fair to say that in the late Choson Dynasty Korean nationalism had been invariably manifested as critical and practical alternatives to meet the socio-economic situation and foreign relations of the time. It had been gradually developed and eventually took the shape of through the three stages-first, conceptualization of nationalistic ideas by Shilhak (True Learning) group, secondly, policy formulation by the Taewongun, and finally, popularization by the Tonghak movement. Modern Korean nationalism was originated by the effort of the Shilhak scholars who tried to feature the individualistic character of Korean nation vis-a-vis the China-centered world outlook. The world outlook held by this group of scholars was in line with their utilitarian way of thinking which amied, among other things, as the strengthening of the nation and the enrichment of the people. This attitude on the part of the Shilhak scholars naturally led to specific policy recommendations of naionalistic nature in order to tackle the socio-economic and foreign problems of the time. Their recommendations, were however not put into practice and the Shilhak scholars were persecuted together with Sohak (Western Learning) by the Government. Thus, Shilhak group, in spite of its role to initiate modern Korean nationalism, was nipped in the bud. The significance of this group lies in the fact that modern Korean nationalism was originated in the process of its recognition of the pressing matters for the country and these scholars suggested various policy recommendations to overcome these problems. The persecution of the Shilhak scholars by conservative government officials was in this sense a tragedy, thus leaving the country drifting in the wake of impending encroachment by western imperialist powers. The failure of the Korean nation as a whole in taking steps for reform recommended by the Shilhak scholars aggrevated the situation as the country became more and more embroiling with western expansionism in the latter part of the last century. By this time, the country had to adjust itself to the newly emerging situation in which imperialist powers sought their own political and economic interest vis-a-vis Korea. The policies of the Taewongun who was in power at the time were to firmly repulse any sort of compromise with the western powers under the banner of ‘closing the country and expulsing barbarians’ while renovating governmental structure and implementing measures to enrich the people. His domestic policies were in fact aimed at expanding the capability of the nation based on equalitarian treatment of the people of all strata in Korean society. His foreign policy to resist any sorts of foreign attempts led western powers (which had not vital interest in the Korean peninsula by that time) to abandon their design to open Korea. By the time when reform measures taken by the Taewongun on domestic scene began to bear fruit, however he lost power in the government, thus his nationalistic policies being frustrated. Negotiations for diplomatic normalization with the Japanese government ( in which the idea of ‘conquering Korea’ were prevailing) by the opposition party, headed by Queen Min, were started as soon as this Min chique took power, and Taewongun’s policies, domestic as well as foreign, were totally discarded. In the last decade of the nineteenth century, Korean nationalism had been transformed into a mass movement based on peasants which formed the largest bulk of society. The Tonghak (Eastern Learning) started in the 1860s with the ideas of ‘building up the nation and providing for the welfare of the people’ and ‘conformity of heaven and man’, and later adopted the stance of national independence in the face foreign encroachment and equality amongst people of all social classes. In this way Tonghak ideology and organization were developed in the direction of peasant nationalism by combining with the peasant movement which had been in full swing since the Imsul Peasant Rebellion (1860). Instead of accomodating and implementing demands of the Tonghak, the Min clique tried to crush to Tonghak movement with the help of foreign powers, and this peasant-based mass nationalist movement was frustrated by the combined attack of Japanese troops and Progressive Party which joined the conservative government. This implies that Korean nation lost the last opportunity to maintain national independence in the fact of foreign expansionism. After the annexation of the country by Japan is 1910, Korean nationalism was once again erupted in 1919 in the form of nationwide mass demonstrations against Japanese colonialism. The March First Movement was in the sense not only the culmination of anticolonialism but also a starting point of new of Korean nationalism. One branch of Korean nationalism began to show internationaltinge by accepting help provided by the new Soviet government and Comintern. In the 1920s, labor and peasant movement became leading elements in the domestic scene. This new trend was not entirely out of the context of Korean nationalism: the mission which this ideologically-oriented nationalism had in mind was almost the same as its predecessors had tried; what was different were a new situation of a alien rule of the country and the movement was becoming more broadly based on the ma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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