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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국삼림수탈과 한국인의 저항

Title
일제의 한국삼림수탈과 한국인의 저항
Authors
강영심
Issue Date
1997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bstract
본연구는 일제의 삼림수탈정책과 시행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수탈의 실상 및 그 식민지적 특징과 일제의 삼림수탈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을 糾明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삼림침탈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러시아로부터 森林伐木利權을 탈취한 직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로서 압록강 . 두만강 유역의 삼림이권을 장악한 일제는 統監府營林廠을 신설하고 벌목이권으로 획득한 삼림수익을 獨占하였으며 이 수익은 이후 줄곧 총독부 官營事業의 주요 수입원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1908년 森林法을 제정하여 기존의 소유관계를 전면 부정하는 한편 삼림소유자가 직접 신고하는 원칙을 도입해 국유림 창출의 극대화를 획책하였다. 그 결과 전국 1,600만 정보 중 80 %이상을 국유림으로 강제 편입시켜 버렸다. 또한 部分林制度를 통해 국유림을 일인 자본과 일인 이민에게 처분함으로써 森林私占의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신고제만으로는 소유의 실상을 파악할 수 없자 일제는 1910년 林籍調査事業를 실시하여 국유, 사유의 개략적인 면적과 林相을 조사하였다. 또한 이를 기초로 작성한 [朝鮮林野整理에 관한 意見書]에서 無主公山이나 입회권 있는 임야는 모두 국유화할 것과 국유림 및 국유산물을 매각하는 수익사업을 수립할 것, 그리고 天然更新의 값싼 조림법을 조림정책으로 택할 것 등의 林政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임정방침은 곧바로 對韓 森林政策의 기본틀로 확정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제는 1911년 6월 朝鮮森林令을 공포하고 국유림 중심의 수탈을 골간으로 하는 식민지 삼림정책을 법적 제도적으로 확립하였다. 이 법을 통해 無主公山의 入會權을 부정하고, 앞서 창출한 국유림 및 그 산물처분을 법제화하는 한편 국유림처분을 위해 造林貸付制度를 신설하였다. 또한 1911년 국유림의 要存, 不要存區分 및 國.民有의 경계확정을 위해 國有林區分調査를 추진하여 118만 정보를 국유림으로 귀속시켰다. 그리하여 국유림은 1910년에 비해 949만 정보로 확대된 반면 민유림은 약 120만 정보가 감소되어 국유림창출의 극대화를 달성하게 되었다. 일제는 이렇게 확대된 국유림을 조림대부제도로 처분하기 시작하였다. 이 제도는 일본재벌이나 伐出資本에게 식민지 삼림을 처분하기 위해 법제화한 것인데 조림목적으로 대부해 주고나서 讓與해 주거나 대부료를 면제하는 등 無償讓與 方法을 채택한 점에서 식민지적 토지처분의 성격을 강하게 띤 제도였다. 이러한 특혜를 통해 東拓을 비롯해 住友合資會社, 三井合名會社 등이 大森林地主로 성장하여 한국 삼림침탈의 선봉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일제는 국유림대부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유권 분쟁을 최소화하고 임야를 식민지적 소유체제로 재편하고자 1917년부터 朝鮮林野調査事業에 착수하였다. 1924년 林野査定을 완결함으로써 국유림을 최종적으로 法認하는 한편, 사유림의 소유관계를 재편함과 동시에 확고부동한 소유권만을 再法認하여 임야권리확보 및 이용에 便宜한 제도가 마련되었다. 그 결과 약 160만정보의 사유림을 강제로 국유화하여 국유림창출의목적도 달성할 수 있었다. 마침내 식민지적 임야소유제가 최종 확립되었고 국유림대량창출을 달성함으로써 식민지 경제수탈을 위한 또 하나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일제는 임야 소유관계와 수탈체제의 정비를 토대로 1926년 朝鮮林政計劃을 입안하고 삼림수탈을 본격화하였다. 林政機關統一, 國有林營林事業개선, 民有林管理개선 등으로 구성된 이 계획의 핵심은 국유림수탈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한편 국유림과 국유임산물의 본격적 처분을 통해 삼림수익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1926년 이후 1938년까지 요존국유림 110만 정보를 要存해제 시킨 후 각종 방법으로 일인들에게 처분해 주었다. 국유삼림산물 처분을 위해 전국 국유림을 대상으로 벌채하였는데 매년 벌채목표액을 초과 달성하여 연간 239만-267만㎥의 벌채량을 기록하였다. 林政計劃에 따른 국유림, 산물처분으로 삼림수익도 대폭 상승하여 1925년 84만원에 머물던 매각대금도 1926년에 117만원으로 증대했으며 이후 200만원을 웃돌게 되었다. 1931년 만주침략 이후 일제의 삼림정책은 전면적 수탈단계로 돌입하면서 大陸兵站基地化戰略과 맞물린 北鮮開拓事業에 착수하였다. 1932년 시작된 이 사업은 원료확보정책의 하나로 개마고원 일대 未利用 森林 220여만 정보를 대대적으로 수탈할 목적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이 계획으로 연간 72만㎥의 목재가 벌채되었으며, 이렇게 수탈된 목재는 만주침략 이후 급증했던 일제의 軍需와 각종 산업용재 및 펄프원료 등으로 공급되어 대륙침략에서 주요한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戰時體制 아래서 일제는 식민지 한국의 인적. 물적 자원의 총동원을 강제하였다. 林政도 軍需..生産擴充을 위한 목재 및 펄프생산의 극대화 원칙으로 재편 강화되었으며 군수물자 조달을 목적한 병참기지로서의 기능도 가일층 강조되었다 특히 철.석탄과 함께 3대 중요 전략물자 중 하나인 木材와 薪炭을 증산하기 위한 각종 통제령과 공출정책들이 감행되었다. 더구나 油脂抽出이 가능한 소나무뿌리, 樹皮, 산머루 등 한국삼림에서 생산 가능한 모든 자원을 송두리채 약탈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강력한 할당공출책에 힘입어 임산물생산은 1937년 1억 3,870만 원에서 1941년에는 3억 4,430만 원으로 3배 이상 급증하였다. 또한 총산업생산량 중 임산물이 점하는 비율도 4.9%에서 7.3%로 높아졌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산증대는 곧 삼림자원의 극단적인 공출을 강행한 결과였다. 즉 1942년 당시의 한국 森林蓄積은 2억 2,412 만㎥로 1910년보다 1/3이나 감소되었는데 이런 삼림벌채는 특히 국유림에서 더욱 극심해 44%로 半減되었으므로 임상이 좋은 국유림수탈이 더욱 극심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일제의 삼림수탈은 국유림, 국유산물수탈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삼림자원보호를 내세워 종래 한국인이 행사했던 無主公山의 入會權을 전면 부정하고 삼림이용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이는 한국인에게서 연료, 비료, 사료의 공급원과 묘터를 빼앗아 감이요, 생존권의 위협이었다. 따라서 한국인의 생존권쟁취를 위한 저항도 점차 커져 갔다. 한국인의 저항은 국유림 강제편입반대, 관제조합화한 森林組合반대, 화전금지책에 대한 화전민의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한국인들은 일제의 국유림 강제편입에 대항해 삼림반환투쟁을 전개하였다. 탄원운동으로 시작하여 시위운동으로, 혹은 폭력을 수반하는 강력한 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일제는 국유화한 삼림을 일인자본에게 처분하는 면적이 늘어감에 따라 최소한의 農耕利用林조차 없는 한국인 농가 역시 전체의 40-50%로 증대하였다. 생존권을 빼앗긴 한국인들은 삼림경찰의 단속 및 구류 등 각종 탄압과 제재에도 불구하고 벌채해야만 하는 형편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造林貸付의 특혜를 통한 일인 임업자본의 불법적인 삼림잠식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에 따른 한국인의 저항도 끊이지 않았다. 반대투쟁은 일본재벌이나 일본인을 대상으로 1920년대 후반에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며 임상이 좋은 함경도. 강원도 등 북부지역에서 많이 발생하였다. 이 투쟁은 대개 탄원에서 시작하여 십 수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나 대다수 결과는 일본자본의 소유로 종결되었다. 간혹 황해도 은율군의 반대투쟁과 같이 유혈투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일제당국도 한국인의 사유임을 부정할 수 없자 한국인의 요구를 일부 인정하였던 사례도 나타났다. 일제가 민유림관리에서 보조적인 기구로서 그 설립을 장려했던 삼림조합이 1926년 林政改編의 삼림조합 보조지원책에 근거한 반강제적인 郡島森林組合 결성추진 이후 관제조합화하였다. 관제조합화한 뒤 삼림조합비의 과중한 부담은 물론 일제의 삼림수탈 행정의 협력조직, 하부기구의 구실로 기능하게 되면서 삼림조합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대투쟁이 격렬해졌다. 특히 1930년에 발발한 端川森林組合 설립 반대투쟁은 강력한 농민투쟁으로 확산되면서 일제의 유혈진압으로 이어지기까지 하였다. 한편 일제가 1911년부터 추진했던 화전금지책은 국유림의 대부,매각 등 경영에 장애로 대두되었던 화전민을 放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또한 삼림을 대부받은 일인 재벌회사도 사업 지역 내의 화전민구축을 감행했으므로 이에 대응한 화전민들의 투쟁은 소극적인 진정이나 탄원운동에서 시작하여 집단적인 항의나 不納同盟 등의 방법으로 진전되었다. 보다 적극적인 투쟁을 위해 火田民同盟을 조직하여 총독부나 재벌회사의 횡포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특히 1929년 甲山郡火田民鬪爭은 영림서 직원들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화전민을 강제 구축하자 신간회의 지원 하에 전국적인 지지를 받아가며 총독부에 대응했던 강력한 반대투쟁이었다. 끝으로 일제시기 자행된 삼림수탈의 결과 한국의 森林蓄積은 1910년 당시에 비해 무려 1/3로 대폭 감소되어 임산자원의 고갈을 초래하였다. 또한 일제 30년간 임산물생산을 위해 벌채한 삼림은 약 967만 정보로 전삼림의 60%에 달했으나 조림이 이루어진 삼림은 벌채량의 1/3에 불과한 300만정보에 그쳤다. 이처럼 극심한 植伐 불균형 현상은 일제의 식민지 자원 수탈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일제 식민지지배로 근대화, 혹은 개발되었다는 선전에도 불구하고 일제 통치기간 동안 일제의 삼림정책에 의한 삼림수탈로 한국의 삼림은 水源조절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황폐해졌음이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植民地近代化論 이란 모두 허구임이 분명하다 하겠다. 일제의 삼림정책과 그 수탈의 실상에서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investigate the actual reality of the forestry exploitation and the various damages caused in the course of forestry explotation pursued by the Japanese Governemnt - General during the colonial days. In order to achieve this, I have analysed the colonial forestry policy and how forestry exploitation had realized in the course of executing the policy after the re-structuring of Korean forest-property system. I also have tried to examine how the Koreans had responded to the Japanese forestry exploitation. Japanese colonial forestry expolitation could be divided into several stages; 1. establishing fundamental basis for forest exploitation during 1905-1910. 2. promulgating exploitation decree and official institution and the period of creating a large national forest during 1911-1931, 3. Massive exploitating period under the wartime control during 1932-1945. I have tried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and the results of forestry policy and exploitation in each period, together with the resistant struggle of the Koreans. The full scale exploitation of forestry had taken place just after the confiscation of timber rights from Russia. After securing forestry interest in Yalu and Tuman river the Japanese Governemnt - General had established Forestry Administration( Younglimchang 營林廠) in charge of forestry exploitation in this area. Younglimchang monopolized the income and it became one of the major income for the Government - General. The first step taken by the Government-General was to transplant Japanese forestry law and forestry administration. In 1908, the Government-General enacted The Forestry Law and abolished ownership of the forest at that time and set a new creteria for public and private ownership thus succeeded in maximzing the national forest scale. This law required that a forest holder, in order to have his ownership rights recognised, should report his name, address, and the name under which his forest was resgistered. Many Koreans, however, failed to report their forest, thus only 2,200,000 chongbo out of 16,000,000 chongbo has been reported which is about 13.8%. This meant nearly 90% of the total forest area were not reported thus automatically incorporated as the National Forest. Some of the forest taken over to the Government-General was sold at a fraction of its worth to the companies under Japanese management, in particular the Oriental Development Company or the Japanese immgrants. The Forest Ownership Survey Law(林籍調査事業) was promulgated, to find out exact ownership conditions of the forest in 1910 and as a result of this survey, the Government - General had grasped the need for stopping the habitual use of forestry which was practised in no-man s forest (無主公山), and to start some profitable business in the national forest along with the basic need for dispensing dispensable national forest. This became the basic structure of the Government-General s forestry policy. In June 1911, the Government-General enacted The Chosen Forestry Law and established the legal and adminstrative system. The basic feature of the Chosen Forestry Law was the exploitation in the national forest through selling and donating the national forest and it s products. Also by abolishing the partial forest system and introducing new planting-loan system the Government-General leased the national forest for planting trees to the planter but however the forest was donated shortly after that. This leasing system was one of the means of dispensing woodland during the colonial period. Shortly after that, the Government-General conducted the National Forest Classification Survey;(國有林區分調査) she classified dispensable and undispensable forest to establish an effective system of national forest management at an early stage and to dispend national forest effectively. Through this survey the national forest gained extra 1,180,000 chongbo whereas the private forest lost 1,200,000 chongbo. The system of planting and loan opened a way for great forest ownership by conceding forest without any charge to those who succeeded in planting trees. Through this priviledge the Oriental Development Company and Mitsui Company became a large forest landowner. In 1917, the Government-General launched The Chosen Forestry Survey (朝鮮林野調査事業) to minimize the property controversy and to restructure the present forest ownership into colonial ownership system. By 1924 they finalized ownership in almost every woodland. They introduced new regislation and address in Korean forest thus acknowledging the national forest by law and they re-structured the private ownership and at the same time only definite ownership were acknowledged thus absorbing nearly 1,600,000 chongbo of private forest. Moreover through successive laws like The Forestry Law (森林法), The Forestry Ownership Survey Business , The Classification of National Forest Business and The Woodland Survey Business colonial forest property system was finallized and succeeded in incorporating large areas of forest to the national forestry, and established another base of the colonial economic exploitation. By June 1926, the Government-General framed The Plan for Chosen Forestry (朝鮮林政計劃). The main characteristics of this plan was to exploit every forest including national and private forest. To achieve this purpose she established a central angency to control all the forestry policy and centralize all the national forestry management agencies. She laid emphasis on profitable business by disposing products from the national forest and selling certain area of national forest. She chose possible diposable forest and by selling, loaning and givng she disposed 1,100,000 chongbo of undispensible forest to the private owners. As a result of this, the Government-General disposed 4,220,000 chongbo leaving only 5,330,000 chongbo as a national forest. The plan for disposing the product of the national forest had exceeded greatly each year that yearly timber production was recorded over 7,800 million 척재. Due to this policy, profit increased greatly, for example, the total profit in 1925 was about 840,000 won but in the year of 1926 it creased to 1,170,000 won, and after 1933 to over 2,000,000 won, and by 1938 to over 7,000,000 won. After invading Manchuria the imperial Japan created another plan to accumulate natural resources called The North Chosen Exploitation Business ,(北鮮開拓事業) and exploited primitive forest in Gaema plateau and the northern part of Chosen. They produced 724,780 ㎥ of timber and they were used in making pulp, industrial necessities, construction materials and other military purposes. After the Sino-Japanese war broke out in 1936, Korea became more like a critical logistic base for Japan and under the pretext of war time economy Japan mobilized every man and material resources. By proclaiming The National Mobilization Law (國家總動員法) and The Natural Resources Mobilization Plan , timber was regarded an important war time resources thus all the national forest was contolled by Forestry Administration ( Younglimsea 營林署), moreover all the national and private forest were began to exploit ruthlessly. The chief characteristics of war time forest policy was to exploit every possible resources. Under the mechanism of over-production, the production greatly increased, e.g. in the year of 1937, the production was about 138,710,000 won, but by 1941 the production tripled to 344,260,000 won. The relative percentage of forestry product had increased from 4.9% to 7.3% in the total national output. As this result co-related with the exploitation of forest, the total area of forest was decreased to 19% by 1942. The Government-General s ruthless incorporation of forest into her own property and exploitation of forest was a big blow to common Koreans who fetched fuel, fertilizer, and fodder from the forest. The resistance movement among fire-field farmers gathered momentum under this circumstances and began to struggle against the enlargement of the national forest and government orientated forest union. The trend of struggle took three forms; to lodge a lawsuit, mass demonstration and a violent riot. About 40 - 50% out of whole famers couldn t secure basic provisions for farming and fuel due to dispension of national forest to private owners. The only direct way to solve this situation was to violate forestry law even though they were subjected to high penalty and severe control by the police officers. Unlawful encroachment of forest through planting-loan system had spread all over the country, thus dispute arose in Pyongyan and Hwanghae province and rest of the country just after the execution of planting-loan system in 1914. The disputed area were from tens of chongbo to several ten thousands of chongbo. According to statistics the number of disputes increased in the 1920 s and slowly decreased in the 1930 s. The Government-General encouraged to establish forestry union, to protect forestry resources and to allot certain amount of expense needed for forestry policy to the union men. This government-orientated union was sponsored by the government-general and by 1932, total 211 forestry union was organized in almost every private forest in Korea. After became semi-government union, high union fees, expense for planting trees, expense in renovating ondol system, and extra fines were too much burden to cope for the poor farmers. Subsequently Koreans needed not to join the forestry union, thus resisted various illegal suppression and government pressure to organize union. Due to the bloody suppression of anti-union struggle in Danchon Forestry Union in 1930, along with various side effects of union, restructuring forestry policy and re-arranging agricultural organization, the Government -General abolished the forestry union in July 1932. Another side effect of the Japanese forestry policy was the mass production of fire-field farmers. The number of fire-field farmers increased sharply, which had the different aspect to that of fire-field famers in Chosen dynasty. In the early stage of colonial period total area for fire-field was about 14,000 chongbo, but by the year of 1938, the area was increased to 110,000 chongbo subsidizing 1520,000 Koreans (1/11th of the whole farming population). This meant that 1,250,000 people became fire-field farmers in the colonial period and we can say that there is a strong co-relationship between the number of fire-field farmers and the colonial policy. The Governemnt-General tried hard to ban the fire-field to protect forest and it s resources. The main prescription for fire-field farmers was expelling them from the forest. Consequently resistence struggle by the fire-field famers began, at the early stage they petitioned to the law but as the movement developed they organised a fire-field farmer alliances to protest or lead a tax-refusal movement. The most prominant resistence struggle led by the fire-field famers was the Hamkyongnamdo Gap San(咸南 甲山郡) in 1929. This struggle was stirred by the Forestry Administration officer who burnt down the houses to get rid of fire-field farmers, but the fire-field farmers sent their representatives to Seoul to resist strongly to the Governemnt-General with the help of public 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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