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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처용가의 전승과정 연구

Title
고려 처용가의 전승과정 연구
Authors
김수경
Issue Date
1995
Department/Major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Doctor
Abstract
This thesis aims to analyse the characteristics of Koryogayo(高麗歌謠) “Cheoyong-ga”(處容歌) in (樂學軌範), and to demonstrate hoe it had been transmitted form the Silla Dynasty to the Yi Dynasty. For the purpose, I collected wide viriety of hard facts to pursue the followings: 1) the analysis of the emergence and subsequent development of Koryogayo “Cheoyong-ga”; 2) the understanding of meaning of the song; and 3) the search for essential elements that enabled transmission of the song through the long period. The structure of the thesis is as follows. After an introductory chapter; Chapter 2 focuses on the history of the transmission of Koryokayo “Cheoyong-ga”. First, I descried how a 8-kuche Hyang-ga(8句體 鄕歌) “Cheoyong-ga”. Had been changed to Koryokayo “Cheoyong-ga” through the Koryo Dynasty. I demonstrate that the song, which had been a local song in Kaeunpo(開橒浦) area. Become a member of the royal songs through Palkwan-hoe(八關會), Yeondeng -hoe(燃燈會)and Narae(儺禮) in the early Koryo Dynasty, and that the song changed its form and characters to accommodate the new situation. I also show that Koryokayo “Cheoyong-ga” was the combination of song and dance and that its true motive was for magic, not for the content of sexuality. Then, I analyse how the song had changed its characters in the early Yi Dynasty. Under the influence of Confucianism, Koryokayo “Cheoyong-ga” was transformed to accommodate the Chinese style ritual of driving off the evil of measles. It was changed into “Cheoyong-Junjae”(處容呈才) during the King Sejong’s period and later extended to “Hak-Yeonwhadae-Cheoyongmuhapseol”(鶴蓮花處容舞合設) in . Chapter 3 analyses the structure and the content of Koryokayo “Cheoyong-ga” in . I prove that the song has poetic function while keeping the basic character of magic song, and that it played a central role in “Hak-Yeonwhadae-Cheoyongmuhapseol”. It is also important to mote that “hapseol” has been very useful for the royal festival and that it became the main reason to continue “Cheoyong” song and dance as a part of “hapseol”. In Chapter 4, I examin how “Cheoyong” song and dance lost its traditional role, the role of “byuksa”(僻邪), after it was included in , and how it changed into a simple royal dance except song. I also study “Japcheoyong”(雜處容), another Cheoyong song, in (時用鄕樂譜) to show that most magic songs in the royal court gradually lost its character of “byuksa” and became festival songs for pleasure. Chapter 5 investigates the basic ingredients of Koryokayo “Cheoyong-ga” which enable the song to be transmitted though the long period. First, I argue the its openess, contrary to the traditional rigidness of magic songs, allowed to employ other functions. Like that of festival songs, and that, therefore, it could survive even in the very hostile environment of the early Yi Dynasty. Second, since it was the combination of song and dance and worked very well from the beginning, the song, unlike “Abak”(牙拍) or “Muko”(舞鼓), had better chance to survive . Third, the combination of two characters, ritual and festival, also served the continuation of the song through the long period. This study may be meaningful, since 1) it is first attempt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magic song from the point of literature, by analyzing Koryokayo “Cheoyong-ga” which had long been neglected by scholars, 2) it demonstrated how a 8-kuche Hyang0ga “Cheoyong-ga” had been transformed into Koryokayo “Cheoyong-ga” through the Koryo Dynasty in detail, 3) it proves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song and dance in Koryokayo “Cheoyong-ga”, and its importance in the transmission. And 4) it examines the basic elements which served the transmission of the song. ; 이 논문은 <악학궤범> 에 가사가 전해지는 고려 처용가의 작품적 성격을 규명하고, 아울러 고려 처용가가 신라대의 향가 처용가로부터 비롯되어 고려와 조선조에 이르기 까지 전승된 과정과 그 의미를 고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연구의 방향으로는 실증적인 자료를 가능한 한 널리 확보하여 구체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고려 처용가의 형성과 변모 과정을 밝히며, 노래말 자체 뿐 아니라 노래와 향유, 전승된 연행상황을 고려하요 작품의 총체적 의미를 파악하고, 전승의 본질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요소들을 밝혀 냄으로써 지금까지의 고려 처용가에 관한 논의를 확충하고 보완한다는 데에 논의 전개의 중심을 두었다. 논의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Ⅱ장에서는 고려 처용가의 형성과정에 대해 살펴본 바, 신라와 고려와 조선이라는 시대적 구분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먼저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조가 ” 의 기록을 통해 8구체 향가 처용가 및 처용설화의 내용이 후대에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소로서 벽사적인 기능과 그것이 가무로써 연행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처용랑망해사조” 의 내용은 ①개운포 지방의 지명유래담이 ②첩문민속의 벽사신 처용의 신화와 결합, 개운포의 벽사신 설화로 변모하고, ③이는 다시 불교적인 외피를 입고 망해사연기설화로 변모하여, 여기에 ④헌강왕대의 역사적 사실이 덧붙여져 형성,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설화의 핵심 은 결국 ②부분이며, 처용설화는 역질을 물리쳐 결국은 벽사의 기능을 하게된 구역신 처용의 유래담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처용설화 안에 포함된 향가 처용가도 역신을 물리치는 주술적인 노래로 파악해야 할 것이며, 이때 처용의 가무는 “처용랑망해사조” 전반에서 발견되는 四神舞와 더불어 가무가 갖는 주술적 기능과 그 전승에 관한 당대 및 후대의 정보를 알려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신라대 향가 처용가가 고려시대를 거쳐 현존하는 고려 처용가로 형성되는 과정은 연행상황과 연행방식, 그리고 궁중악으로의 상승에 따른 양식상의 변모라는 측면에서 각각 추적해 보았다. 먼저 연행상황의 측면에서는 벽사적 기능이라는 측면으로 볼때에 나례와의 상관성이 가장 확실하나, 처용가무가 나례에서 의식적인 구나부가 아닌 연희적인 잡희부에서 연행되었다는 점을 볼 때, 이러한 백희 또는 잡기를 통해 팔관회가 연등회에서도 연행되었을 가능성을 추적해 보았다. 이 과정에서 처용가무가 팔관회에 유입될 수 있었던 근거로 팔관회가 요구하는 仙風의 계승에 처용가무의 특성이 부합되었다는 점, 팔관회의 백희가 가진 제의적인 성격과 처용가의 제의적인 특성이 상통했다는 점, 팔관회에서 지속적으로 연행된 가면회의 전통과 처용가무가 일치했다는 점을 들었다. 한편 처용가무가 연등회의 “산대잡극”에 유입된 것은 백희가 규모면에서나 레퍼토리의 면에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정비된 고려말의 현상으로 보았고, 그것은 벽사의 기능을 고려한 선택이라기 보다는 연희적인 목적에서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연행방식의 측면에서는 기록에 나타난 “처용의” 또는 “처용무”의 개념을 파악하고. 아울러 “신라 처용가를 들으니 성조가 비장하여 마음에 느껴지는 바가 있다”고 한 이승인의 시를 통해, 선행연구에서 보여주었던 우려와는 달리 단순한 놀이거나 춤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노래-춤-음악이 함께 연행된 형태라는 것을 밝혔다. 이러한 처용가무는 궁중의 속악가사로 채택됨에 따라 재편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당시 궁중에서 성행하였던 당악정재의 영향으로 노랫말과 구성, 무복 등의 양식을 정비했다는 점을 살펴 보았다. 다음으로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처용가도 넓은 범주의 고려가요에 포함되는 만큼 선초 구악정리의 입장과 상황을 살펴 처용가가 조선초기에 수용될 수 있었던 근거를 파악하였다. 또한 고려대의 연등회, 팔관회는 폐지되었지만 유교주의에 입각한 중국식 구나의식으로서 ‘나례’가 확대됨에 따라 벽사기능을 가진 처용가무도 나례 뒤에 벌어지는 공연의 하나로 아울러 확대 전승될 수 있었음을 고찰하였다. 한편 조선초까지는 백희의 하나로 존재했던 처용가무가 정재로서 정비되어 왕립음악기관 소속의 무인에 의해 연행되었던 것은 향악정재가 크게 발달되었던 세종대임을 밝히고, 이 당시 궁중 악무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기 위해 오방처용무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추척해 보았다. 이렇게 처용가무는 세종대에 ‘처용정재’로 일단 정비된 뒤, 성종대 편찬된 <악학궤범> 에는 “학연화대저용무합설” 이라는 매우 규모가 큰 공연으로 편성되어 있다. “학연화대저용무합설” 에는 처용무를 중심으로 학무와 연화대무가 함께 공연될 뿐 아니라 처용가를 비롯하여 봉황음, 정과정, 정음, 북전, 연산회상, 미타찬, 본사찬, 관음찬 등 다수의 노래가 포함되어 잇는데, 이렇게 변화된 데에는 나례 뒤의 공연이라는 벽사적 기능을 중신으로, 궁중악으로서 갖추어야 할 송도적 기능과 볼거리로서의 연희적 측면 등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라고 파악하였다. Ⅲ장은 <악학궤범>의 “학연화대처용무합설” 에 수록된 처용가에 관한 본격적인 작품론이 이루어진 곳이다. 먼저 작품의 구조분석을 통해 고려 처용가가 서사-처용의 모습 찬양-처용의 위엄과 능력 찬양-열병신에 대한 위협-발원 등 5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어있음 살펴 보았다. 이렇게 볼 때 고려 처용가는 구조상 처용을 불러 모시고, 모습과 덕을 찬양함으로써 즐겁게 만들고, 과거로부터의 풍습을 통해 위엄과 능력을 칭송하며, 역신을 퇴치하는 呪語를 발함으로써 위협하고, 역신을 구축하고자 하는 간절한 발원을 드리는 것으로 매듭을 짓는 내용으로 일반적인 무가의 실상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볼 우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가로서의 본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아울러 굿의 형태와 전개를 나타내고 있음을 밝히고, 이렇게 실제적인 굿의 절차를 반영하되 그것을 압축, 재구성하여 한편의 시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처용가만의 특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역신을 구축한다는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는 면에서, 일반적인 무가의 양태를 벗어나 문학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고려 처용가는 노랫말이 매우 길 뿐 아니라 그 안에 8구체 향가까지 삽입되어 있어 노래의 구성방식상 몇 개의 노래가 결합된 편장의 구성을 취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악곡의 축면에서 살펴볼 때 장이 나뉘어지지 않는 통정형식이며, 시상도 일관되개 전개되고 있어 만전춘의 경우처럼 서로 다른 노래들이 결합되어 한편의 작품을 이루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았다. 더욱이 ‘전강-부엽-중엽-부엽-소엽-후강-부엽-중엽-부욥-소엽-대엽-부엽-중엽-부엽-소엽’이라는 강엽구조를 두번 반복하여 배열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어, 오히려 노랫말이 너무 길기 때문에 같은 곡을 두번 반복함으로써 긴 노랫말을 모두 담으려 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처용가가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이라는 대규모의 공연 가운데에 불려진 것을 볼 때 “합설”의 전체적인 구성과 그 안에서 처용가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파악하는 것도 처용가의 작품적 성격을 밝히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 결과, “합설”의 전체적인 구조에서 처용가가 중심적인 위치와 기능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연행방식의 측면에서 확인하였다. 즉 “합설”은 세말나례 뒤에 벌어지는 공식적인 행사인 만큼 벽사진경의 기능이 우선되며 따라서 벽사기능을 나타내는 처용가와 처용무가 중심이 되고, 여기에 궁중악으로서의 공도적 요소를 갖추기 위해 북전이나 봉황음 등의 노래가 첨가되었으며, 또한 응과 분위기를 돋구기 위해 정읍이나 정과정 같은 향악곡들도 삽입된 사실을 밝혔다. 춤의 측면에서는 볼거리로서의 연희적인 특성을 극대화 하기 위해 공연성이 강한 학무와 연화대무를 처용무와 함께 연행하도록 구성했으며, 앞부분에서 흥과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구나의식이 갖는 의례적 특성을 살리기 위해, 미타찬이나 본사찬 같은 불교적 노래로 끝을 맺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와 같이 “합설”의 양식과 구성요소가 벽사적 기능을 중심으로 연희적인 기능과 송도적인 기능까지 아울러 갖추고 있음을 살펴, 이 같은 복합적인 특성이 이후 처용가무가 시속적으로 전승될 수 있었던 긴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Ⅳ장에서는 <악학궤범>이후 처용가무가 변모되어가는 양상을 임병양란을 중심으로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임병양란 이전인 연산-중종대에는 신하들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나례와 처용가무가 지속적으로 연행이 되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나례가 점차 벽사적인 의례에서 연희화됨에 따라 처용가무도 벽사적인 기능보다는 놀이로서 인식되는 변화를 살펴 볼 수 있었다. 아울러 <시용향악보> 소재 “잡처용” 과의 관련을 통해 이 노래가 이미 처용 및 처용가사에 관한 인식이 속화된 이후에 민간의 무가를 개편한 작품이며, 잡처용을 포함한 <시용향악보>소재 무가류시가들이 민간의 무가를 채용, 벽사의 목적보다는 송도나 연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노래들이라는 점을 밝혔다. 임병양란 이후에는 처용가무의 연행상황인 나례가 완전히 잡희로 변함에 따라 처용가무 자체도 벽사적 기능을 잃게 되거, 결국 나례가 폐지됨에 따라 함께 폐지되었다가 숙종대에 다시 연희악의 하나로서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처용가무에서 노랫말이 탈락되는 사장 큰 이유가 벽사기능의 소멸이라는 기능적 측면에 있음을 파악하고, 아울러 고종때 편찬된 <악학궤범>의 “합설”을 비교하여 변화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Ⅴ장은 고려 처용가가 고려-조선에 이르는 오랜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전승될 수 있었던 본질적인 요소를 구명해보고자 한 곳이다. 그 결과 우선 문학적인 측면에서는, 작품구조상 무가의 완강한 틀에서 벗어난 개방적인 특성을 갖춘만큼 그 개방성을 통해 연희적인 요소나 송도적 요소 등 다른 기능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따라서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변모될 수 있었던 여지가 있었기 때문으로 파악하였다. 두 번째로 가무의 종합예술적 측면에서 볼 때, 처용가와 처용무는 발생부터 춤과 노래가 함께 이루어졌고 <아박> 이나 <무고> 등 다른 정재와는 달리 춤과 노래가 상호의존적, 유기적 관계로 결속되어 있어 이것이 강한 전승력을 가지고 지속될 수 있었던 힘의 하나로 작용했던 것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연행적 측면에서는 굿으로부터 비롯되어 상호 공존하고 있는 제의성과 연희성의 두 요소가 시대적 변화의 요구에 따라 상호 부침을 거듭하면서 처용가무가 지속적으로 연행될 수 있었던 요체로서 작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일반적으로 나례와 같은 의례자체도 제의성과 연희성을 함께 가지고 있으나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제의적 성격에서 연희적 성격으로 변모하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지금은 세시풍속이나 놀이의 형태로 남아있는 많은 민속들이 그 출발은 제의였음을 상기할 때, 처용가무의 이와 같은 특성과 변모양상은 문학사 뿐 아니라 예술사와 풍속사적인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이 논의는 그 동안 고려가요 연구에서 제의되어왔던 고려 처용가에 관한 본격적인 작품론을 시도함으로써 무가계 가요와 문학적 특성을 살폈다는 점, 향가 처용가에서 고려 처용가로 변화되는 구체적 과정을 추적했다는 점, 노래 뿐만 아니라 춤과 음악이 함께 편성된 ‘정재’라는 면에서 연행과 관련된 존재 양상을 밝혔다는 점,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될 수 있었던 본질적인 요인을 규명했다는 점 등에서 의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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