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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성리학적 군주론 연구

Title
조선후기 성리학적 군주론 연구
Authors
소진형
Issue Date
2002
Department/Major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이 연구는 성리학 이론의 모순이 조선후기 왕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는 전제하에 정조의 『大學』해석을 중심으로 정조의 군주관과 왕권강화논리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최근 조선후기에 대한 연구들이 국사학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의 “탕평”정치에 대한 정치사연구는 조선후기의 정치사의 역동적인 정치변동, 이념의 대립을 찾아내고 재조명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正祖時代는 조선의 문화전성기로 규정, 蕩平政治를 기반으로 하는 강력한 왕권이 국가의 통합력을 강화시켰을 뿐 아니라 문화국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한 조선문화의 난숙기이자 상공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실학과 북학이라는 변화논리가 나타나는 시기로 규정되면서 주목되고 있다. 그래서 정조시대의 학문적 경향이나 정조 왕권강화의 배경이 되는 초계문신제나 규장각에 대한 연구들, 세계인식, 지리, 군편성, 학술사업, 서학정책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또 많은 연구성과의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정조가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데에는 대부분의 연구가 일치하고 있으나 아직 정조의 정치적 성향이나 통치철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져 있지 않다. 정조의 경우 다른 군주들과 달리 사림들이 담지하고 있다고 여겨진 성리학적 도통을 군주자신이 가져와 왕통과 도통을 일치시키려 했다는 점이 여러 연구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그 내용이 어떠했다는 것은 연구되지 않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둘 때, 정조의 저술과 언술들을 기반으로 그의 정치관이 어떤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성리학을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면, 전제적 왕권을 제약하고 수신군주론을 주장했던 성리학의 이론과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정조가 성리학을 재해석하되 성리학의 군주론의 범위를 상식적으로 넘어서지 않으면서 재해석하는가가 관건이 된다. 정조는 성리학이 절대적 왕권을 반대하면서도 군주의 절대적 지위를 인정하는 것을 이용, 특히 이기성정론을 재해석함으로써 군권강화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정조는 자신이 君師가 되어 왕통과 도통을 일치시키고 성인의 정치를 이루겠다고 주장할 때 군주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조가 군주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후기의 시대적 맥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정조와 같은 식의 군주에 대한 해석은 조선성리학자들의 군신공치론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이상적 정치상은 唐虞時代와 같은 大同社會이지만, 성리학은 세습왕조를 인정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小康을 추구한다. 그래서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정치체제는 군신공치체제이다. 이미 세습왕조에서는 군주가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군주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신하가 군주를 대신해서 정치를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에서는-특히 16세기 이후 사림들의 정계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군신공치에 대한 인식이 일반화되면서 수신군주론을 비롯한 성리학 이론은 군주들이 전제권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제약하는 이론적 기제로 이용되었고 君臣共治는 당연한 정치체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조선후기 당쟁이 심화되면서 사림들이 군주에 대한 그들의 학문적 우월성을 주장하기 어렵게 되었다. 아무리 군신공치라고 하더라도 관료를 등용하는 용사권은 군주에게 귀속되어 있었으므로 정파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주의 시비판단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붕당들이 정권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은 군주가 어떤 당이 올바른 정치관을 가지고 정치를 할 수 있는 당인지의 판별,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조선후기 군주들, 특히 숙종, 영조, 정조는 당시의 붕당의 위기를 이용, 군주중심의 정치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사림들과 군주, 또 사림 내부에서 어떤 정치체제가, 또 어떤 정국운영방식이 경쟁으로 과열되어 있는 정국을 안정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올바른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군주중심의 탕평정국은 일시적으로 환국이라는 파행적 현상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시비충역을 밝히지 않고 여러 당들의 인재들을 조제보합해서 쓰는 것이므로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나 당들이 서로 시비충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自黨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적인 것이라고 보고 정치가 公이 되기 위해서는 군주가 정치의 중심에서 다스려야 한다고 보는 주장들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숙종대에 박세채에 의해 제창된 군주중심의 탕평소이다. 탕평소는 사대부정치체제의 한계를 지적하고 정국운영이 군주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숙종은 갑술환국이후 탕평정국을 표방하고 일진일퇴식의 일당전제식 정국운영에서 군주중심의 탕평정국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것이 조선후기 군주중심 탕평정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탕평정국은 영조대에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영조는 즉위 직후 영조의 왕위 계승에 반대해서 일어난 戊申亂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해준 노론중심의 정국운영이 아니라 무신란에 가담했던 소론, 남인까지 조제, 출사해 조제보합식 탕평정국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것은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노론만의 정국이 운영될 경우 왕권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당시 각 당의 緩論을 중심으로 탕평당을 구성하고 정국운영을 해나갔다. 이러한 영조의 정치운영방식은 특히 노론들에 의해 강한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인 영조가 어떤 논리로 탕평을 정당화하는가이다. 군주중심의 탕평은 당시 상황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 탕평이 일시적인 미봉책인가 궁극적인 정치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는가의 여부였다. 특히 탕평정치가 군주의 권력강화의 기반이 되는 것이 명백해지면서 도통을 잇고 있지 않은 군주가 도통을 가지고 있는 사림보다 학문적으로 우월하며 정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는가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영조의 경우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강압적인 처벌이나 충을 효에 비유, 군신의리를 부자의리로 강요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러한 영조의 대응방식은 사림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했다. 정조는 이와달리 왕권강화를 성리학 이론을 재해석함으로써 정당화하고자 했다. 정조는 성리학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치는 도통과 왕통이 일치되는 것, 그리고 성리학의 이기론이 기의 운명적 요소, 즉 사회적 지위나 타고 태어나는 환경을 인정, 군주의 절대적 지위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적극적으로 군주중심의 논리로 전환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성리학자들이 군주의 수신을 강조하면서 수사적으로 “요순의 정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 군주의 행위를 제약하는 것을 역으로 자신이 “요순의 정치를 이루겠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권력행사의 명분을 얻었다. 또 정조는 자신이 수신군주론을 강조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면 성리학에서는 세습군주제를 부정하지 않고, 이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군주의 자득과 수신을 기반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군주가 도덕적 교화를 정치적 이상으로 삼을 때 왕권이 확고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리학자들의 이와같은 논리는 실제 정치에 적용되었을 때 왕권행사에 대한 제약논리로 작용했다. 군주가 정책결정을 할 때 그것이 진정한 수신의 결과인지, 제대로 된 시비판단의 결과인지에 대해 사대부들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성리학적 정치체제에서는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적 정치체제에서는 군주의 정책결정에 사대부들이 반대할 때 그 결정을 관철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런데 역으로 군주가 자신 스스로 수신군주가 되겠다고 주장하고 사대부들보다 학문적 우월성을 강조하며 왕권을 강화하고자 할 때, 이러한 군주의 자세는 성리학에서 이상적인 군주상에 가깝기 때문에 군주의 기본 입장에 대해 사대부들이 반대하기는 어려웠다. 정조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군주의 권력행사를 성리학의 이기성정론을 통해서 정당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조는 『大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 초점을 첫째, 『대학』은 누가 공부하는 학문인가, 둘째, 『대학』 序文에서 보이는 性은 어떤 의미이며 성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셋째, 明明德, 新民의 의미는 정확하게 무엇이며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주체 즉 정치와 교화의 주체는 누구인가에 맞춘다. 정조에 의하면 性은 기질적인 요소 특히 사회적 지위와 연관이 깊은 개념이다. 그렇다면 격물치지해서 세계의 이치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늘이 부여한 性의 의미를 깨달아 그것을 다한다는 것은 진리로서의 五常의 의미를 깨닫고 사회적 지위에 맞는 행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군주에 자리에 있는 사람은 군주로서 하늘이 부여한 의무를 다해야 하고 신하된 자는 신하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齊家 이후의 일, 治國과 平天下의 주체는 명백히 군주이며, 군주야말로 정치의 핵심적인 주체가 된다. 정조는 性分에 대한 설명 후 명명덕과 신민의 해석에 중점을 둔다. 명명덕은 명덕을 밝히 밝힌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성리학자들은 명덕을 本心이라고 해석해왔다. 본심이라고 한다면 명덕역시 기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본심을 회복하는 것을 명덕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본심을 회복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된다. 정조의 이 해석은 性에 대한 해석과 맞물려서 정치의 주체가 군주라는 것을 강조하는 논리로 전개된다. 이것은 성리학이 진리를 깨달아 알고 실천하는 주체를 모든 인간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진리를 五常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군주존재의 특수성과 군주위상에 따른 실천의미로서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이 군주의 정치적 의무를 일차적으로 교화에 두고 해석했던 『대학』을 정조는 수신군주론과 군주의 교화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지 않고 먼저 자신의 의무라고 인정하고, 교화의 주체는 군주만이 할 수 있다고 규정하면서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는 논리로 전환시켰다.;Based upon the hypothesis that conflicts within Neo-Confucianism had issued diverse interpretation on monarchical power at the latter eras of Chosun, this thesis analyzes King Jungjo's monarchisic view and his argument on consolidating monarchic power by examining his interpretation of Great Learning. Lately much research on the latter period of Chosun has been made actively at the academic field of history. Research on political history concerning the policy of TangPyung has been revealing dynamic political changes and ideological conflicts of this era. The age of Jungjo is particularly notable for the cultural prosper that reached its full maturity, for new ideological thoughts such as realistic schools which had emerged as the nation advanced to an industrialized society, and for Kings effort in consolidating the nation by reinforcing his regal power through the policy of TangPyung. Thus much research on this era concerning Chogyemunshin system, Kyujangak, world view, geography, military embodiment, academic industry, and the policies to Western Science has been successfully made as the historical background for its academic tendency and for its consolidation of monarchic power. However in spite of the fact that many concur in the consolidation regal power that King Jungjo had brought, here is yet few research that discusses the King's political tendency in full-scale. For example, much research points out that King Jungjo, unlike other kings, had endeavored to identify Neo- Confucian perception with his own regal perception but it does not explore further to its details. Therefore studying the content as well as the context of King Juns political thoughts through his speeches and literary works is the foremost task that we are facing. If He intended to consolidate his power and position through Neo- Confucian thoughts, there would have existed discrepancies between them for the latter argues for moral trainings for kings while limiting princes monarchic power. He was intending to make use of the fact that the theory, especially basic principles of Neo-confucianism, acknowledges the absolute position of the prince even though it stands against any absolute power.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examine how King Jungjo with his task of reinterpreting the N Confucian without violating its principal ideas so that it may provide solid theoretical background in justifying his endeavor to reinforce the regal power. King Jungjo well understood that arguing and identifying himself as the one who has unified regal perception and confucian perception within himself and who can govern as the sage would enable him to establish and exercise the absolute power. The Jungjo's reinterpretation on prince is closely related to the historical context of late Chosun as his point of view clearly distinguishes him from any other Chosun neo-Confucian scholars and their view of politics. Although neo- sets Sage Kings' rule as its political ideal, it actually seeks practical and realizable rule for neo-Confucian has already acknowledged hereditary right of the prince. Such is the bureaucrats' practical governing which neo- confucian emphasizes as its political system. maintains that the prince within the hereditary system cannot be the sage and therefore his subjects with higher qualities should do the governing job instead. Therefore in Chosun where the neo- Confucianism has been accepted as its national ideology, its principal ideas have worked as the theoretical instrument that restrained princes to exercise monarchic power over the nation while the system has grown to be the national political system. In the latter period of Chosun, political factions and conflicts got intensified. Consequently, Confucian scholars was put in a difficult situation to claim their academic superiority over their king upon whom belonged king's preferment. They inevitably became dependent on the judgment and inclination of the prince/king in order for their political sects to survive in the faction fighting. Thus the faction of late Chosun opened the way to the prince to actively intervene in the political dispute by judging the right and wrong of the political views of each sect. Princes of Chosun, especially Sukjong, Yungjo, Jungjo, determined to make most of this conflicts between political sects and endeavored to establish firmly the prince-centered monarchical system. Such effort produced various disputes and discourses among the Confucian scholars and the princes concerning the political structure that would stabilize the political situation and that ultimately would realize the righteous government. For example, some argued that although prince-centered Tangpyung policy may prevent phenomenon of a change of governing party, it would always be a temporary expedient for it is putting together efficient people from every sect without discrimination of right and wrong. On the other hand, some demonstrated that for each sect to insist themselves as the right was a personal and self-centered attitude looking after the interest of their own party. They claimed that the prince should govern the nation at the center of the political field in order to make the politics good. Tnahpyung was proposed by Park Se Chae as one of these discourses at the reign of Sukjong. Park had perceived the drawbacks of (the political system maintained by bureaucrats and came to believe that the government should be reconstructed as a prince-centered one. Sukjong approved Park's Theory of Tangpyung and declared the nation to be Tangpyung system after the Kapsulwhanguk. He then converted one party rule system of national political system into the prince-centered Tangpyung system. Thus began the king-centered Tangpyung system of late Chosun. Tangpyung system started to be exerted more actively at the reign of Yungjo. Yungjos Tangpyung system was not only for the Noron who supported him but also the Soron and Namin who had participated in the Mushin rebellion that arose against his succession to the throne. It seems that he feared his power might be weakened if 노론 became the only central figure of the national politics. Therefore, right after the enthronement, Yungjo organized Tangpyung party that was composed of people from every political sects. Yungjo's Tangpyung system naturally received much criticism, especially from Noron. As Confucian scholars recognized that it would reinforce and consolidate the power of the king, more of them came to disapprove of it arguing that the prince who has not succeeded the tradition of Confucain's perception is more likely to have less knowledge or wisdom on politics than themselves. As to this, Yungjo tried to justify it by identifying repressive punishment, or royalty with filial duty. Indeed Prince-centered 탕평 was the policy that was in much demand at that time. However people could not be sure whether it would work only as a temporary expedient or would ultimately be the ideal policy, and Yungjos justification could not answer satisfactorily this question. He did not gained much sympathy from any sects for his .  On the other hand, Jungjo advocated his Tangpyung policy3, or consolidating the power of the throne by reinterpreting and revising neo- Confucianism. He demonstrated that neo- Confucian ideas of ideal politics consist of the identification of regal perception and Confucian perception and that the principles accepts the concept of fatalistic Ki according to which acknowledges the absolute status of the throne. In other words, Jungjo had turned Neo-Confucians theory which in fact was intended to limit princes power to his own advantage. He revised Neo-Confucians emphasis on the Moral traing of king and its saying that a king should realize the rule of Sage Kings to the king will realize the politics of Sage Kings. Thus Jungjo boldly converted Neo- Confucianism into a prince originated theory and justified his conduct to empower his throne. Moreover, Jungjo tactfully perceived principles of Neo-Confucian theory  and tried to get hold of the right to empower the throne as he himself proclaimed Neo-Confucian theory on prince. Neo-Confucian theory emphasized that prince, virtuous and self-complacent, should do much work in order to accomplish politically ideal nation while it did not oppose to the hereditary system of the throne. Neo-Confucian scholars believed that only when a prince adopts moral enlightenment as his ultimate political ideal, his regal status become more firmly settled. However such belief and theory of neo- Confucianism lay restraint on prince when it was practiced in the actual field of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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