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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대의 대거란정책 연구

Title
고려 태조대의 대거란정책 연구
Authors
김소영
Issue Date
2000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이 논문은 高麗 太祖代의 契丹에 대한 外交政策이 후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어떻게 변화·전개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성격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기존의 연구들을 통해 태조대 거란과의 관계에 대한 검토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그 변화과정과 배경에 대해서 일치된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태조대의 대거란 정책에 대해 발해 멸망과 후삼국 통일정책, 그리고 北進政策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외에도 태조의 대내·외 정책의 방향과 중국·거란의 역학관계 거란의 대외정책 및 渤海遺民과 女眞族의 동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한편 태조대의 대거란 정책과 북진정책과의 직접적 관련성에 대해서도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이에 본 논문에서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태조대의 대거란 정책의 전개과정과 원인을 살피고, 그 성격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즉위 직후 태조는 고려의 국가적 안정과 후삼국 내에서의 외교에 주력하면서 한반도 내에서 고려의 위상을 정립시키고자 하였다. 920년 이후에는 중국의 後唐, 吳越과 교섭하는 동시에 발해와도 修好하였다. 그러나 아직 거란의 직접적 위협이 없고 발해와 수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해정벌에 앞서 고려를 포섭하고자 했던 922년의 거란 접근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킴에 따라 고려는 거란의 팽창정책에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925년 이후 두 차례 정도 사선을 파견하여 거란의 세력 우위를 인정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그 동향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927년 이후 후백제와의 각축이 치열해지자 고려는 後唐과 활발한 교섭을 추진하여 외교적 후원을 얻고자 하였다. 반면 고려와 거란과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이는 당시 거란의 관심이 중원진출에 집중되었고,928년 이후 渤海舊地에서의 거란의 영향력이 축소되어 고려가 거란의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이다. 또한 후 백제와의 무력 충돌이 격화되고 있었으므로 태조는 거란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후삼국 통일 후 고려는 거란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태조는 後晋과의 밀착을 통해 거란을 견제하는 한편, 938년 고려를 방문한 胡僧 말라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거란 협공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942년에는 후진과 거란의 관계가 악화되자 이 틈을 타서 ‘만부교 사건’을 일으켜 거란과의 국교를 과감히 단절하였다. 후삼국 통일 후의 이러한 강경책은 후진과의 밀착을 통해 거란의 고려에 대한 압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또한 고려의 北邊에 인접해 있는 여진족이나 후발해 같은 발해잔존 세력들을 포섭하여 대외적인 명분을 세우는 동시에 북방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태조대의 거란에 대한 정책은 후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크게 변화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역사적 성격을 지닌다. 첫째, 태조대의 거란에 대한 외교정책은 국내·외의 정세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에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고려의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둘째, 태조대의 대거란 정책이 초기의 우호적인 접근에서 후반기에 강경책으로 변화한 것은 영토확장을 위해 北進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한반도 북부의 여진족과 발해 잔존세력을 포섭하여 북방의 안정을 꾀하고자했던 측면이 더 강했다는 점이다. 셋째, 이 시기 高麗의 거란정책은 渤海 멸망이나 그 이후 발해 유민들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만부교 사건과 같은 강경책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여진족뿐만 아니라, 발해유민이 세운 후발해가 비교적 안정된 국가 체제를 이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 태조 후반기의 대거란 강경책과 중국 지향의 외교책은 거란의 침입을 받기 전까지 고려 초기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결국 태조대의 거란 정책은 초기의 교섭관계에서 냉각기를 거쳐 후반기에는 적대정책으로 변화하였으며, 거란과의 단교 상태는 980년대 거란 聖宗이 고려를 침략하여 무력으로 사대관계를 맺을 때까지 계속되었다.;This thesis is to investigate how Koryo ̄ dynasty's policy toward Kitan(契丹) changed before and after its unification of the late Three Kingdoms(後三國) and the historical significances of it. At first, the first King Strived for domestic stability and outside duty within the Korean Peninsula and formed a friendly relation-ships with the late Ta´ng(唐) and Owo ̄l(吳越) of China and Parhae(渤海). Since there hadn't been any direct threat of Kitan yet, he made no response to its approach in 922. However, as Kitan destroyed Parhae in 926, Koryo felt the threat of Kitan's expansion policy and began to send envoys to Kitan And as rivalry between Koryo and the late Paekche(後百濟) had become severe since 927, Koryo actiely tied itself with the late Ta´ng while loosening its tie with Kitan. Because Kitan concentrated its efforts to advance into the central territory of China, its power over Parhae weakened, so was its threat to Koryo ̄. In 938, throught a Chinese monk(胡僧), Mala(말라), the King proposed China to attack Kitan on both sides, and in 942 a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late Chin(後晋) and Kitan become worse he severed diplomatic relations with Kitan by making the so-called "Manpu bridge scandal(萬夫橋事件)". The hard-line policy in the latter period aimed at weakening Kitan's pressure through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late Chin. Also to justify itself abroad and stabilize northern regions by winning the residual forces of Parhae such as Yo ̄jin(女眞) and the late Parhae(後渤海) over to its side. Koryo― dynasty's policy toward Kitan during the reign of the first king has historical significances as follows: first, policy toward Kitan was established according to the political changes of the surrounding countries and Koryo's practical interests related to them; Second, the hard-line policy after the unification was to stabilize northern frontiers by gaining the residual forces of Parhae over to Koryo ̄'s side rather than to actively advance northward; third, policy toward Kitan at this time was closely connected with the movements of Parhae people after its downfall ; fourth, the significance of the first kings policy toward Kitan and diplomacy oriented to China is great since they become the groundwork of early foreign policies of Koryo ̄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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