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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명초(幕末明初), 우라가미(浦上) 기독교도 탄압사건에 대한 연구

Title
막말명초(幕末明初), 우라가미(浦上) 기독교도 탄압사건에 대한 연구
Other Titles
幕末明初、浦上キリスト教徒弾圧事件に関する 研究
Authors
유가영
Issue Date
2011
Department/Major
대학원 사회생활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dvisors
전인영
Abstract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우라가미(浦上) 촌락에서는 4번에 걸친 기독교도 탄압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서구 문물에 기반한 근대화에 성공하였다고 평가 받는 일본에 부합하지 않는 행보였다. 또한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조선과 비교하였을 때도 기독교 유입과 발전에 있어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근대 일본에 있어 기독교는 그 수용과 발전을 살펴보았을 때 특이점이 존재한다. 지금까지의 일본의 기독교 연구, 특히 근대 시기에 있어 기독교 연구는 역사학적인 측면에서의 연구 성과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본 논문에서는 역사학적인 시각으로 근대 일본에 있어 지식인들의 기독교 인식을 기독교 수용 및 탄압의 배경으로써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우라가미 기독교도 탄압 사건을 고찰하였다. 우라가미 지역에서 발생한 기독교도 탄압사건은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 이후 기독교도들이 잠복한 이래 발생한 대대적인 기독교도 탄압 사건임은 물론이며 기독교도들 역시 자신들의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함으로써 발발한 사건이다. 그러나 1차와 2차 탄압이 발생할 당시의 기독교도 신자들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뿐만이 아닌, 경제적인 이유가 내포되어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게끔 유도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 탄압의 정도도 ‘약한’수준의 탄압에서 그치게 된다. 그러나 3차와 4차 탄압의 경우, 정권 교체 및 개항이라고 하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발생하여 기독교도들 역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하여 정부의 탄압 역시 ‘강한’수준의 탄압으로 전환하게 된다. 특히 가장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진 우라가미 요방 쿠즈레(浦上四番崩れ)의 경우, 막부가 멸망하고 메이지 로 넘어가는 정권의 교체기에 발생하여 그 처벌이 메이지 정권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메이지 정권의 천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주의라고 하는 국가 구상과 맞물려 혹독한 기독교도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도 탄압은 서구 열강의 항의를 불러 일으켰고 더 나아가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의 불평등 조약개정을 위한 구미 순방 동안 지속적으로 걸림돌이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1873년, 메이지 정부는 기독교 금제(禁制)의 해제(解制)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기독교는 일본 근대화의 모습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는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근대화 역시 ‘유신’과 ‘복고’라고 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일본 기독교의 수용 및 발전과정이 그리 모순된다고 할 수만은 없다. 이처럼 일본의 기독교 연구는 일본만의 특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구 대상으로서 더욱 그 가치를 지닌다. 본 논문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한 우라가미 지역의 기독교도 탄압사건을 다루었다. 지금까지는 근대 일본을 연구함에 있어 기독교라고 하는 주제는 큰 화두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기독교를 바탕으로 근대 일본, 그리고 기독교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幕府末期から明治初期に、長崎の浦上では4回に至るキリシタン弾圧事件が発生した。これはアジアの国家の中で唯一に近代化に成功したと評価されたと言われる日本と合わない姿であった。そして隣りの中国と韓国のキリスト教の過程に比べると違う点である。つまり近代日本にとってキリスト教の受容と発展を研究したら特別な所がある。 これまでの近代キリスト教の研究、特に歴史的な研究成果は少ないのである。それでこの論文では歴史的に近づいて近代日本の知識人のキリストの認識を調べてから浦上キリシタン弾圧事件を考察した。 浦上キリシタン弾圧事件は島原の乱があったからキリシタンが潜伏した以来に発生した大きな弾圧事件であったのはもちろんキリシタンも自分の信仰を現れてから勃発した事件である。しかし第1次と第2次弾圧か発生する時のキリシタンは宗教的な理由に限らず経済的な理由もあったから弾圧が弱い水準だったが、第3次と第4次の場合は政権交代と開港の時期に発生してキリシタンもこの雰囲気のなかで積極的に自分の信仰を現れて政府も強い水準の弾圧で転換された。特に、浦上四番崩れの場合は幕府が崩れて明治政府に行く途中に発生してこの処分が天皇中心の明治政府に任されてもっとも強力な弾圧になれるようのである。 しかし、このようなキリシタン弾圧は西洋の抗議を起こされたし、岩倉使節團の不平等条約改訂をための努力に障害になっていることに驚き、結局1873年、明治政府はキリスト禁制から解制を宣言しなければならなっかたことである。 日本のキリストは日本の近代に会わないという矛盾が内在されていたが、日本の近代も維新と復古という両面性を持っているのを考えると、キリストに関する色々なことは単純に矛盾なことではないのである。そしてだからこそ特異性がある日本のキリスト教の研究は価値がある。 本稿では韓国では有名ではなかった浦上のキリシタン弾圧事件を研究した。今までは近代日本を研究するとしてキリスト教という主題はあまりしてなかったが、今回の研究を通じて近代日本のキリスト教を理解する一つの機会になれることを望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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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대학원 > 사회과교육학과 > Theses_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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