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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과 한국농촌사회 변동

Title
농지개혁과 한국농촌사회 변동
Authors
양지은
Issue Date
2000
Department/Major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이 논문은 해방 이후 농지개혁이 한국 농촌사회 변동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농지개혁이 실제 지역 차원에서 전개되어 나간 과정을 추적하고, 그 결과 농가경제의 변화 및 지주층의 정치·경제적 성격 변화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였다. 농지개혁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주로 전국적인 차원에서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전체적인 추이를 살펴보는 내용이 많았으며, 최근에는 이러한 논의가 갖는 피상성을 보완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실제 지역 사례에 관한 조사 연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지역 연구 방식은 지방 자료를 직접 분석하고, 현지 조사를 통해 보다 생생한 증언을 수집함으로써 농지개혁 과정 전반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들 역시 기존 연구와 마찬가지로 농지개혁으로 인한 농지의 이동상황에만 집중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서의 연구들에서 나타났던 또 다른 한계 역시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즉, 농지개혁의 추진 및 진행과정에 영향을 주었던 정치적 상황에 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점들을 보완하기 위하여 한 지역을 선정, 농지개혁의 실제 진행과정과 그 결과를 분석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연구대상 지역으로 선정한 곳은 전라남도 담양군이다. 본 논문은 일제시기 이 지역의 정치·경제 상황의 개괄에서 시작하여 해방 이후 농지개혁의 추진 및 진행 과정을 살펴보았다. 농지개혁으로 인한 농촌사회 내부의 토지소유구조 및 정치변동에 대해서는 담양군의 전반적인 정세를 살펴보는 가운데 우선, 한 농가를 선정, 해방 이전부터 농지개혁 이후 시기까지 토지소유상황을 추적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담양군의 대지주 두 집안을 선정, 역시 해방 전후 시기부터 농지개혁 이후까지 이들 지주가의 토지소유 변동 및 정치·경제 활동 양상을 변화를 검토하는 방식을 택했다. 1945년 해방 당시 담양군 농가의 8할은 자자겸 소작 또는 순소작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들에게 해방이란 일본인 지주들이 사라졌다는 뜻이었으며 따라서 전 일본인 소유 농지를 나누어주는 것 이상으로 해방을 실감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일본인 지주의 소작지(귀속농지)는 해방 정국의 2대 과제였던 일제 잔재의 청산과 농업문제의 해결, 즉 농지개혁 문제가 중첩되어 있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따라서 해방 직후 자연스럽게 귀속농지 분배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이는 한국인 지주들의 소작지(매수분배농지)에 대한 개혁 요구로까지 확대되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은 농지개혁을 주도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좌익의 선동을 차단하고 남한에 반공 자본주의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1948년 미군정이 관할하고 있던 귀속농지 불하에 의해 첫 번째 결실을 보게 되었으며, 같은 해 구성된 대한민국 초대 정부에 의해 1950년 매수분배농지 전체에 대한 개혁으로 완수되었다. 담양군의 농지개혁은 1948년에 시작되지 못하고 1950년에야 귀속낭지와 매수분배농지 모두를 대상으로 실행되었다. 여기에는 해방 직후 혼란한 상황 속에서 지역에 따라 농지개혁이 시차를 두고 진행되었음을 뜻한다. 미군정의 귀속농지 불하가 단행되자 좌익의 입지가 전반적으로 약화되었지만 불하가 지연된 지역에서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담양군에서는 1공화국 정부가 수립되고 난 1949년까지도 입산 활동하던 좌익 세력이 출몰, 기습적으로 농지개혁을 선포하고 사라지는 등 농지개혁이 지속적인 선동주제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19450년 농지개혁이 실시된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1950년 3월에 착수된 농지개혁은 불과 3개월 만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농지개혁에 대한 농민들의 지지와 신뢰는 확고했다. 때문에 인민군이 무상몰수·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을 선포하였을 때 정부의 농지개혁으로는 농지를 분배 받을 수 없었던 일부 고농(顧農, 머슴) 만이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나섰다. 수복 직후부터 재개된 농지개혁의 결과 담양군 인구의 8할에 달하는 농민들이 평균 세마지기 남짓의 농지를 분배받았고, 이는 일제시기를 통해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 가는데 반해 농지소유의 확대는 극히 어려웠던 탓에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농가의 상황에 제동을 거는 계기가 되었다. 그 동안 농지대가 상환의 과중함에 따른 농가경제의 악화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일제시기에는 농가경제 상황이 전남 지역 내에서도 하위 수준에 정체되어 있던 담양군의 농민들이 법정 상환기간 5년 내에 90%에 달하는 상환량을 완납함으로써 농지개혁으로 인한 농가경제의 활력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한편, 담양군의 대표적인 지주가였던 국채응 가와 국정완 가는 농지개혁으로 인해 소유 농지 대부분을 분배당하고 산업 자본가로의 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소작지 경영을 중심으로 하던 지주가의 전업은 쉬운 일도 아니었고 당시에는 투자할 대상 역시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여기에 농지 대가의 보상도 지연되는 가운데 인플레이션이 가중되어 그 실질가치마저 하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 지주가 전업에 실패하고 몰락하고 있었다. 본 논문에서 분석한 두 지주가 중에서도 전업에 성공한 것은 국정완 가뿐이다. 국정완 가는 해방 이후 무역업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하였으며, 4대 국회의원에 당선, 정치·경제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농지개혁 이전에 두 지주가의 토지소유 규모는 오히려 국채응 가가 600여 정보, 그리고 국정완 가는 200정보 남짓으로 약 1/3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간의 상대적인 지위와 영향력의 역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조건의 차이 때문이었다. 우선 국채응 가의 토지소유 80%이상이 농지에 집중되어 있던 데 반해 국정완 가는 40%정도만이 농지였다. 그 결과 일제시기 동안 국채응 가는 농장을 설립하는 등 농업 중심적인 성격을 강하게 보였고, 반면 국정완 가는 소작지의 경영 외에 양조장을 운영하는 등 농업 외 분야로의 전업과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국채응 가는 주로 담양군 지역에 머무르며 소작지의 운영에만 집중한 반면, 국정완 가의 장남은 미군정 통역관으로 그리고 정부 수립 이후에는 경찰 계에서 활동하면서 중앙 정치와의 연계를 보이고 있다. 당시 귀속재산의 불하 및 농지개혁의 추진이 미군정과 1공화국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던 상황에서 중앙 정치와의 연계는 직접적으로는 귀속재산을 불하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이밖에도 정부 정책 및 당시 정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이는 당시 혼란한 정세에 적응하는데 중요한 힘이 되었다. 소작지의 정확한 분포 상황마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마름을 통해 소작료만을 수취하는 정태적 지주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국채응 가가 자본전환에 실패한 반면 국정완 가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정치적 연계와 이를 바탕으로 한 예민한 시류 감각 그리고 이미 일제시기에 농업 외 분야로의 자본전환 경험이 배경이 되었다. 농지개혁은 농촌사회에 영세자작농 체제를 확립, 이전의 지주-소작관계를 소멸시켰다. 그 결과 농민들은 농가경제의 악화에 재동을 걸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하였으며, 지주가는 이전에 안정적으로 누리고 있던 정치·경제적 지위를 위협받고 자본전환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대에 전남 지역의 20정보 이상 피분배 지주 중에서 이러한 전환에 성공, 이전의 정치·경제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10%남짓에 불과했다. 이러한 농촌사회의 변동 속에서 국가는 지주의 사적 권력을 공공권력으로 대체해 나감으로써 농촌사회 내부에 깊숙이 침투하였다. 여기에는 농지개혁을 통한 농민들 의지지 확보로 강화된 정통성과 실제 농지개혁 사업을 주관ㄴ하면서 확대된 국가의 역할 및 역량이 바탕이 되었다.;It is a case study on a Korean rural society which experienced changes by Land Reform in 1950. Tamyang-Gun in 1950s was a microcosm of the Korean rural society at that time and land reform was the most important driving forces of changes in it. This study raised questions as following: when was the land reform started and how was the political situations in a rural society changed by land reform? What is the effects of land reform on the peasantry and the landlord class respectively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m? Finally, what are the meaning and implication of land reform? To answer these questions this study select a local area and a peasant family and two landlord families for a care study. Tamyang-Gun as classified as one of the most radial county in South Korea between 1945 and 1950(Bruce Cumings, 1981) so it would be a dynamic case for this study. The Choi Ki An family was a half-tenant, a kind of middle class in rural society and It was the middle class on which the Korean Land Reform focused. The Guk Chae Woong and the Guk Jung Wan families were two major landlords in Tamyang-Gun. The Choi family and the Guk families are good examples for investigating the changes of the peasantry and the landlord class by land reform. When liberated from the Japanese colonial rule in 1945 a vast majority of the Korean engaged in agriculture and about 76% of them were tenants. So struggles Between the peasantry and the landlord class was the most important issue of the Korean society. Land reform was considered as an ultimate solution for this conflict by the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AMG) and many of the Korean political forces from the Left or the Right All of them knows many of the powerful effects of land reform on the peasantry. It was directly related to the support of peasants which essential to take the hegemony of the liberated country. So they wanted to take the leadership of land reform and make this a solid basis for their gaining of political power. It was the AMG who started land reform by a disposal of Japanese vested land in 1948. By doing this, the AMG could guarantee the victory of the Right over the Left at the first election for an establishment of a government in South Korea. The first President Rhee Seung Man and the South Korean Government completed land reform in 1950 and ti made the agitation of the Left powerless. In Tamyang-Gun, land reform was started in 1950, just three months before the Korean War and dealt with the Japanese vested land and the Korean nationals owned land simultaneously. Tamyang-Gun/s radical political situation partly caused by this delayed land reform. But once started, even though unfinished, it caused by this delayed land reform. But once started, even though unfinished, it would be a firm barrier to communism during the Korean War. And tenants who received land would be strong supporters of Rhee and the Government. For the peasants land reform was a starting point of an improvement in economic situation and a liberation from the landlords' private rules. On the other hand land reform meant a strong point of an improvement in economic situation and a liberation from the landlords' private rules. On the other hand land reform meant a strong threat to the landlord class. Their politico-economic status which established on the land ownership and protected for generations were in danger. To keep their status they had to transform their identity as capitalists, business executives or bureaucrats. Only one of the Guk families, Guk Jung Wan family, could make this transformation successful as a capitalists and bureaucrats. The other family declined gradually. Only one son of Guk Chae Woong succeed in this transformation. The conditions of this success were the experiences of the non-agricultural business management, the entrepreneurship and a strong relationship with the political authorities. Political relationships would be an important route to get the disposal of vested enterprises and the information useful to business. In fact, bureaucrat-capitalist became a major element of the capitalists in 1950s. Guck Jung Wan's eldest son worked as a translater of the SMJ and later the police officer in 1950s, These posts had a strong and effective influence on the Korean society at that time. In conclusion, land reform was the basis for constituting an anticommunist government in South Korea and the driving forces for dissolving the long-sustained tenancy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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