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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片戰爭 硏究(1840-1842)

Title
阿片戰爭 硏究(1840-1842)
Other Titles
Conflicting interests and its way of settlement between China and Great Britain during the Opium war, 1840-1842
Authors
姜周賢
Issue Date
1998
Department/Major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Keywords
아편전쟁중국영국정치외교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The Opium war has been evaluated as a historical diverging point that brought about significant changes not only in Chinese history but also in international politics within East Asian region.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opium war lies in the fact that the effect of Chinese sovereignty forfeiture overlook the East Asian region, changing the traditional international order itself. This thesis is not an interpretation of the through decadent process of China after the opium war. Rather, this thesis deals with the initial stage of sovereignty forfeiture by focusing on cognitive, economic, and political situation that induced the extreme confrontation prior to the opium war. It is about the first step in the opening of China, not the whole process of losing its sovereignty. It also discusses mode of the interest conflict and cognitive attitude that China and Great Britain pursued. With a most-favored-nation clause, the treaty of Nanking systemized and maintained legal and institutional privileges to acquisite concessions in China. Whereas it did a favor for the western capitalistic countries, it served as a starting point of the long sovereignty forfeiture process for China. Then, what were the factors other than British exercise of pressure that generated a quick conclusion of the treaty of Nanking despite of such historical significance. This thesis examines the background of the conclusion of the treaty of Nanking which contained unfavorable content for China in several aspects: cognitive, economic, and political. The main focus is on the question why it was concluded abruptly within short period of time without going through other steps of negotiations. Economic and political interests that China and Great Britain seek were specifically expressed in Canton. In this process, opium acquired political and social significance, let alone the economic significance in the regional trade that was performed as an economic strategy for the rectification of the trade imbalance. In southern region of China that was engaged in the opium trade, the exising Chinese economic order and foreign relations were challenged by Great Britain. British demanded the revision of Chinese coastal trading institutions, which included not only trading regulations and privileges, but also new diplomatic procedures that would enable Westerners to negotiate commercial matters on a recognized official basis. An incidence of jurisdictional dipute concerning extraterritoriality indicates that the relationship between China and Great Britain no longer confined into economic issue concerning trade, but has expanded to diplomatic conflict between the countries. Generally, agreement of customs tariff, abolition of the Cohong monopoly, extraterritoriality, and the opening of new ports were the issues that could only be solved through a national level diplomatic channel, rather than by some trader groups. Great Britain pursued her interest in a national level, depending on political support from the liberal trade power and naval abilities. The goal of Great Britain was to support economic activities of the British people and guarantee their extraterritorial rights to remove Chinese interference. With the treaty of Nanking, Great Britain established legal and institutional basis that enables the expansion of systematic and continuous political influences along with economic right. While Great Britain was turning her economic interest into political issue, the role of the commissioners who was sent to prevent the outflow of silver and to resolve the opium problem turned into political and military issue to protect China from British military threat. In the process of solving such complicated interest conflict, without damaging political authority, China had to oppose to British demand which claimed international relations counded upon a basic premise of equality among sovereign nations with military threat. Within such a process, China focused on eradicating political threat to the Ch'ing dynasty by minimizing the conflict with Britain into regional level and prevented to expand this to a matter of life and death political issue in national level. However, Chinese policy employed in this case did not deviate from the established policies used to deal with the frontier. Although, there had been military threat within the Chinese frontier, the policies could be remained since it was not a demand of equality among the nations. Such recognition originated from Ch'ing's historical experience which showed peaceful relations with Southeastern countries and stability of inland China traditionally, and concluded that strategic significance of coastal area was less important than the revolt in inland. Therefore, China tended to solve the conflict with Great Britain through temporary blockade or personal amity, and adhered to conciliatory measure following the established policy when Great Britain employed armed force. As the opium war developed, Chinese government officials who were delegated from the center showed consistency in a sense that they confined the problem as a matter of regional issue and avoided the damage to the political authority of Ch'ing dynasty. However, in confronting Great Britain in the war, China could not keep consistency by using military attack and conciliatory policy one after another or sometimes simultaneously. Chinese attention was focused on seeking safety and eliminating challenges to the political authority of Ch'ing dynasty by every means to halt British military threat in Peking. China made no concrete mention of proposition nor the content of the negotiation. As for the Chinese, appeasement was morally distasteful, but in settling the "barbarian affairs", it was a matter of making a choice between danger and safety, rather than between right and wrong. The objectives of diplomatic policy that China set up prior to the mid 19th century was not problem solving, but rather preventing its occurrence from the initial stage. Great Britain transformed economic interest. in Canton to political issue and found a justification for the war within the process by moving the focus of the argument from the immorality of the opium trade to trade conditions in the future and security of British safety. As established economic and political order related with "outer" world was threatened by British military power, China set up a goal to consider it as a regional level issue in order to seek stability of the Ch'ing government. Through the process of settlement, attitude and negotiating capability of the representatives from the China and Great Britain represented how their intentions took a part in inducing prompt conclusion of the treaty.;아편전쟁은 중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지역의 국제정치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분기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편전쟁 이후 전개된 중국의 국권상실과정의 영향이 비단 한 국가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 지역의 전통적인 국제질서 자체가 변화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큰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이 글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국권을 상실해가는 全과정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국권 상실의 초기단계, 즉 아편전쟁이 발생하기 이전 어떠한 인식적, 경제적 정치적인 상황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갈등충돌의 결과를 가져왔는지, 또한 전쟁의 전개과정에서 양국이 추구하는 이해관계의 갈등양상과 처리방법에서 나타난 인식적 태도 등을 검토하고 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입장에서는 특정 국가가 중국과의 조약을 톤해 확보한 권리를 그 이외의 국가도 공유할 수 있는 최혜국조항에 의해 중국에 대한 이권을 획득하는 법적·제도적 권리를 체계화하고 지속시킨 근거가 된 남경조약이 중국의 입장에서는 국권을 상실해가는 긴 과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압력행사이외에 중국이 그 당시에 남경조약을 그토록 신속하게 체결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중국에게 불리한 내용으로 구성된 남경조약이 별다른 교섭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빠른 시일내에 체결되었던 배경을 인식적, 경제적, 정치적인 측면에서 검토한다. 중국과과 영국이 상대국가를 대상으로 하여 갖고 있던 경제적, 정치적인 이해는 광동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구체적으로 표출되었다. 영국이 무역역조를 시정하기 위한 경제적인 전략으로 채택한 지역무역에서, 아편이라는 상품은 단지 경제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아편무역에 연계된 중국의 남동연안지역 특히 공식적으로 외국무역에 개방되었던 廣東 지역에서는 중국이 견지하고 있던 기존의 경제질서와 대외질서관이 직접적으로는 영국의 상업세력에 의해서 도전받았다. 치외법권이라는 법적인 관할권문제 등은 중국과 영국과의 관계가 더 이상 무역이라는 경제적인 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국가간의 외교적인 갈등관계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관세율의 규정, 公行의 폐지, 치외법권의 확보, 새로운 무역항의 개방과 같은 요구들은, 몇몇 상인집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외교적 방법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영국은 해군력과 자유무역세력의 정치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하여 중국에 대한 이해관계를 國益의 차원에서 추구하였다. 중국에서 자국국민들의 경제활동을 지원하고 중국이 이를 방해하지 않도록 영국 국민의 지위를 치외법권으로서 보장받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영국은 결국 남경조약을 통해 경제적인 이권과 함께 정치적인 영향력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확대시킬 수 있는 법적, 제도적인 근거를 마련하였다. 영국이 광동지역에서의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대등한 국가간의 교섭이라는 정치적인 문제로 변화시키는 동안, 중국의 침차대신의 역할도, 은의 유출을 방지하고 아편문제를 해결하는 사회, 경제적인 것에서 북경에 대한 영국의 군사적인 위협을 막아내는 정치, 군사적인 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해관계의 갈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군사적인 위협을 바탕으로 주권국가의 평등성을 기본전제로 한 국가간의 병렬적인 관계를 주장하는 영국의 요구를 중국은 정치적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요구를 저지시켜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영국과의 갈등관계를 국가의 사활이 걸린 정치적인 문제로 확대시키지 않고, 지역적인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축소시켜 청조에 대한 정치적인 위협을 제거하는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사용되었던 중국의 정책은 기존에 중국이 변경지역을 다루어오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국의 주변지역에서 있어왔던 군사적인 위협은 국가간의 평등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역적인 차원에서 처리될 수 있었다. 특히 전통적으로 남양지역국가들과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중국내부의 안정을 중요하게 여겼던 중국에게, 남동연안지역에서의 소란은 내륙지방의 반란보다 전략적인 중요성이 덜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궁은 일시적인 무역봉쇄조치나 개인적인 和親의 방법으로 영국과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경향을 나타내었고, 영국이 무력을 강력하게 사용하게 되었을 때에도 중국은 여전히 기존의 夷를 다루던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회유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서양국가와의 관계는 새로운 洋務의 차원이 아닌 夷務의 차원에서 인식되었다. 아편전쟁의 전개과정 동안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 사이에서는 청조의 정치적인 권위를 해치지 않는 동시에 영국과의 문제를 지역적인 것으로 한정시키려 한다는 점에서는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에 대한 대응 방식에 있어서는 오히려 군사적인 공격과 지나친 화친정책을 번갈아, 혹은 동시에 사용하는 등,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중국은 북경에 대한 영국군의 군사적 위협을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중지시켜 청조의 정치적인 권위를 더 이상 도전받지 않고 안전을 도모하는데에만 관심을 나타내었을 뿐, 영국군의 제의나 협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도덕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옳고 그른 것이 아닌 위험과 안전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였다. 19세기 중반 이전에 중국이 갖고 있던 외교정책의 목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단계부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은 광동지역이 갖는 경제적인 이해를 정치적인 문제로 전환시켰고 이 과정에서 전쟁에 관한 논쟁의 중심을 아편무역의 비도덕성에서 미래의 무역조건과 영국국민의 안정보장으로 옮김으로써 전쟁의 명분을 찾았다. 반면 중국은 중국의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 기존에 유지해오던 대외적인 경제·정치질서가 영국의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 위협받게 되자, 청정부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도록 이를 지역적인 차원에서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남경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중국과 영국대표의 협상력과 태도등에서, 양국의 이러한 의도들이 조약 체결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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