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 354 Download: 0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 전환과정 분석

Title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 전환과정 분석
Other Titles
(The) Change of U. S. occupation policy toward Japan (1945-1948)
Authors
조윤경
Issue Date
1998
Department/Major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Keywords
미국일본점령정책정치외교
Publisher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Degree
Master
Abstract
본 논문은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의 전환원인과 과정을 밝히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일본점령은 일반적으로 1948년을 기점으로 초기 점령정책과 후기 점령정책으로 구분된다. 이 글은 미국 외교정책의 연장선에서 미국의 국익의 변화에 따른 일본점령정책의 전환과정을 분석할 것이다. 미국의 초기 점령정책은 '비군사화' 라는 목표에 입각해서 추진되었다. 미점령당국의 민주화 정책은 일본의 번영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제2차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그 토대가 되었던 일본의 군벌, 재벌, 그리고 지주의 경제적 근거를 제거하는데 기본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배상정책과 재벌정책 역시 비군사화 목표의 연장선에서 진행되었는데, 미행정부와 점령당국 간에는 그 규모와 범위를 둘러싼 이견이 존재했다. 이러한 견해차이는 국익의 변화와 더불어 미국의 일본정책마련 및 실행방법에 있어 변화를 초래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비군사화를 목표로 한 초기 점령정책이 진행되는 동안 미행정부는 변화된 안보의식과 일본에 대한 시각을 형성하게 되었다. 태평양 지역에서의 미국의 안보는 필리핀과 오키나와, 일본이 위임통치 했던 섬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바탕으로 보장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군사기지화에 대한 주장은 군부에서 제기되고 있었지만, 미행정부 내에서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에 직면하여 미국은 아시아지역에서 소련과 더불어 중국이라는 공산주의 세력과 경쟁하게 될 상황에 놓였고, 이에 따라 일본의 안보적 가치는 재평가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일간의 무역불균형 상태의 심화와 점령비용의 증가, 그리고 이러한 상황의 지속가능성이 대두됨으로써 일본이 미국의 계속적인 재정부담이 될 가능성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점령정책의 변화필요성은 1947년 초부터 제기되었지만, 미행정부의 일관된 정책으로 표명되지 못했고, 1948년에 접어들면서 국제적인 경제적 상황과 안보상황의 위기 심화로 인해, 1948년 말 정책전환이 구체화되었다. 미행정부의 점령정책이 검토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계기를 통해서 표출되었는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이해지역인 유럽의 안보적, 경제적 상황의 긴급성으로 행정부는 이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점령당국의 독자성을 들 수 있다. 1947년 3월 맥아더는 미행정부와 사전 논의없이 조기 평화안 체결을 제기했으며, 이는 국제적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미행정부는 조기 평화안 검토를 통해 일본점령정책의 제반을 제고했으며, 기존 점령정책이 미국의 변화된 이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점령종식은 적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책전환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1947년 중엽 미행정부는 정책목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에 합의했지만, 명확한 목표설정과 기존정책을 대신할 대안책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목표의 연장선에 있는 정책이 행해졌다. 1947년 말까지 국무성과 육군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일본을 공산화되어서는 안되며, 미국의 점령비용을 더 이상 증대시켜서도 안 된다는 목표에 합의했다. 구체적인 구상으로 일본의 경제력 향상을 통해 일본의 경제부흥을 달성하며, 원료수입을 미국이 아닌 동아시아지역에 의존하도록 만들며, 이를 위해 일정기간 동안 미국이 대규모 경제원조를 일본에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미행정부는 구체적인 정책을 마련해 나갔다. 1948년 1월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미행정부는 일본점령에 있어 미국의 우선적 목표가 변했음을 공개적으로 알렸고, 점령당국에 이에 따른 정책을 시행할 것을 전달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 두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 미행정부 내의 이견이 1948년에 접어들어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국무성과 육군성은 일본의 경제안정화가 미국의 점령정책에 있어 최우선 목표라는데 의견일치를 쉽게 보았지만, 변화된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에 있어 대립했다. 국무성은 일본의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아시아 주변국들의 협조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미국이 독자적 행동 (unilateral action) 을 취할 경우, 주변국들의 일본 군국주의 부활과 지역 경제중심지로서 일본의 재등장에 대한 우려를 우발시키게 될 것이므로 국제적인 협조체제를 통해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육군성은 미국의 이해에 따라 즉각 경제부흥이 미국의 우선적 목표임을 알리고, 효율상의 이유로 독자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이견이 1948년 1월에 접어들면서 해소되었던 것이었다. 둘째 미행정부와 점령당국간의 이견으로 미행정부는 단일 정책노선을 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행정부와 점령당국은 경제력 집중 배제 및 독점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극동위원회 문서 230 (FEC230)의 시행을 둘러싸고 이견이 심화되었다. 1947년 10월 육군성은 맥아더에게 집중배제법 제정연기를 요청했지만, 맥아더는 이를 거절하고, 1947년 12월 과도경제력 집중배재법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맥아더의 독자적인 행동은 미행정부에게 대일 점령정책 수행에 있어 장애물로 인식되었고, 정책의 목표전환 뿐만 아니라 실행방법에 대해 미행정부의 단일 입장이 필요함을 인식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걸쳐 1948년 3월 케넌과 드레이퍼가 방일했고, 경제 안정화를 위한 대안정책마련을 위해 존스튼 사절단과 영사절단이 방일했다. 그 결과 미국의 대일정책의 전환을 의미하는 NSC13/2 (미국의 대일정책에 관한 건의사항:Recommendation with Respect to US Policy toward Japan)이 대일정책 지침으로 선택되었고, 1948년 10월 트루만 대통령의 재가에 의해 최종안으로 확정되었다. 이 문서에서는 소련의 공산주의 세력 확장정책이 세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국제정세 인식을 전제로, 일본의 정치적 안정과 공산화의 방지를 도모하기 위해 경찰력의 증강 및 경제부흥·경제안정에 역점을 둘 것을 시사했고, 이를 위해 일본정부로의 대폭적인 권한이양과 점령기관의 권한축소, 공직추방의 완하, 민간기업의 강화, 무역활동에 대한 장애제거, 재정균형의 조속한 달성 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문서를 지침으로 미국의 구체적인 대일경제정책 지침인 경제안정 9원칙이 1948년 12월 10일에 확립되었고, 태평양지역에서의 미국 이익을 보호하는 정책의 연속선상에서 대일 점령정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This thesis has the purpose finding how the U.S. decided to change the occupation policy. The occupation of Japan had continued from 1945 to 1952. Occupation policy toward Japan underwent so drastic changes during 1948. 1 will ravel out the process of change in US. policy toward Japan in the context of American foreign policy which was reflected by national interest. U.S. early policies of democratization and demilitarization were implemented not for Japanese prosperity but for demolishing the bases of Japanese militarism. Washington and SCAP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envisioned and worked out Reparation program and Zaibatsu program in view of U.S. primary goal of demilitarization. But there was disparity between two main actors surrounding scale and scope of occupation program, which would influence the route of occupation policy in the near future. Washington administration came to have different security concept and views of Japan which were developed after the end of World War II, while SCAP advanced the occupation program aimed at demilitarization in Japan proper during the same period. Criginally U.S. security in Pacific was secured by assuring Americar control of Philippines, Okinawa, the former Japanese mandated islands. Therefore agencies in washington couldn't reach agreement about the need to establish military bases on the Asian mainland or Japan. As U.S. faced the widespread of communism and Soviet influence in the world, US. reevaluated the importance of Japan in the context of regional security and global economy. Moreover the intense imbalance trade and increased occupation costs was deepened and considered as the great burden to US taxpayers. Why didn't U.S. administration change the occupation policies, even if administration realized the need of shift in emphasis about initial policy? Of the several reasons for this, there are two that affect the capacity of U.S. to cope with that situation. The first, Asia is not the main theater. While U.S. national interest exclusively concentrated on Europe during the two years after the end of World War II. The second, SCAP had (3 relative independence in implementing occupation policy in Japan where was far from cold war. In March 1947, occupation policies toward Japan surfaced as important issue in US administration by MacArthur's suggestion of early peace treaty. As a result, Washington administration launched on reexamination of overall occupation policy and reached an agreement that U.S. had to lay the groundwork for economic recovery of Japan and make arrangements for adequate military security based on the U.S.'s changed national interest. But occupation policies based on earlier aim of demilitarization were still implemented because U.S. administration didn't map out an alternative agenda nor discovered how to constrain SCAP's independence. In the late of 1947, civilian and military agencies reached the agreement that the priorities were placed on these; the first Japan should not be included into the communist sphere whatever happened, the second the occupation cost in Japan should not be increased. As a result administration concluded that the U.S. had little alternative but to promote Japan's recovery and its integration with the rest of Asia. U.S. envisioned more detail economic recovery plan which included three factors such as a large scale of economic assistance from U.S., industrial capacity of Japan, potential sources and market of Asian countries. It was the early of 1948 that the shift of goal of US was in public and concrete policies based on this goal were delivered to SCAP. There were two crucial reasons of the delay. The first is, the disagreement in approaches to new policy between civilian and military agencies compromised by the time of January 1948. While military agency (Defense Department) called for unilateral action and proposed an immediate shift in emphasis affording neither SCAP nor the Far Eastern Commission any opportunity to interfere, civilian agency (State Department) considered that U.S. unilateral action would provoke worries of Asian countries that Japan could reemerge as a economic center and the resurgent Japanese militarism. Moreover it would hamper the Japanese economic recovery plan which had to depend on expanded trade with Japan's neighbors. Divergence of opinion was settled by the State Department decision in support of unilateral action. The second, a united front within the administration was essential to force MacArthur to back off from occupation in Japan. The trouble between Washington administration and SCAP was intense with regard to the anti-monopoly program and de-concentration program. Although Army Department asked MacArthur to halt the legislation of de-concentration law, he compelled the Diet to pass the de-concentration law in the late of 1947. Appalled by this action, the State and Defense departments' leadership resolved to throttle MacArthur by a united front of administration to take a coherent action of occupation policy. During 1948, not only high-level policy makers such as. Kennan and Draper but also special missions led by Johnston and Young visited to investigate the results of initial occupation policy performed by SCAP. Consequently the concrete occupation plan of economic stabilization, which was reversed by altered US priority toward Japan, was establised on December 10, 1948 on the guide of NSC13/2(recommendation with respect to US policy toward Japan). Although the administration and SCAP remained committed to the wartime legacies of liberal transformation for at least the first two years, the occupation policy was shifted for safeguarding national interest of United States. After all Truman's endorsement of NSC13/2, the winding down of the Occupation's initial economic reforms, and the implicit curb on MacArthur's powers, put Washington administration in a position to implement its larger goals for Japan rn the context of national interest.
Fulltext
Show the fulltext
Appears in Collections:
일반대학원 > 정치외교학과 > Theses_Master
Files in This Item:
There are no files associated with this item.
Export
RIS (EndNote)
XLS (Excel)
XML


qrcode

Items in DSpace are protected by copyright, with all rights reserved, unless otherwise indicated.

BROWSE